[7] 배우 꿈꾸는 서울대생 권수민 씨(하)
“사회변화로 인한 기성세대와 신세대의 갈등에서 기성세대가 자주 사용하는 말.”
나무위키에 실린 ‘요즘 젊은 것들’ 정의입니다. 폄하의 뉘앙스가 짙지만, 사실 다들 한때는 그런 말을 듣지 않았나요. “누구나 처음엔 어린이였지. 허나 그걸 기억하는 어른은 별로 없어.”(생텍쥐페리 ‘어린 왕자’에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청년들 목소리를 담아보려 합니다. 그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에서 어쩌면 인생이란 타래의 실마리를 찾게 될지도 모르니까요. 살짝 여지를 남기고자 (젊은)엔 괄호를 쳤습니다. 나이가 어디쯤 와있건, 우린 모두 ‘요즘 것들’ 아닌가요.
권수민 씨는 지난해부터 본격적으로 연기활동을 시작해 영화 ‘동대문’ ‘침묵’, 연극 ‘코피노 아이’ 등에 출연한 신인배우다. 아직은 배우라는 타이틀보다 연기를 배우는 지망생에 가까운 처지지만 꿈을 향한 열정과 노력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 사진제공 권수민 씨
“즐거운 시간은 오래 이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는 게 인생의 첫걸음이지만, 괴로운 시간 역시 마찬가지라는 사실은 인생이 끝나갈 때가 다 되어서도 알기 어렵다.”(하라 료의 소설 ‘어리석은 자는 죽어야 한다’에서)
서울대 자유전공학부 2학년인 권수민 씨(20)는 자신을 “스스로 가시밭길에 걸어 들어간 사람”이라 했다. 물론 그가 어느 길로 가건 그 앞에 뭐가 기다릴지는 누구도 모른다. 하지만 ‘꿈’을 접었다면 평탄한 꽃길로 갈 기회가 적지 않았던 건 맞다. 영어와 중국어에 능통한데다, 인터내셔널 바칼로레아(IB·국제공통 대학입학 자격시험)’ 만점을 받은 흔치 않은 스펙을 보유했기 때문이다.
-학교와 연기수업 병행하기가 힘들진 않나요.
“확실히 체력적으로 버거울 때가 있어요. 최근에도 중간고사 기간이었는데 오디션 3개가 겹쳤거든요. 시험도 오디션도 대충 준비할 수 없잖아요. 일주일 넘게 하루 2시간 정도 잔 거 같아요. 게다가 과외도 6명을 2시간씩 주 12시간 하다보니…. 옛날엔 막연하게 학교 다니고 연기도 하면 무작정 행복할 줄 알았는데, 실제로 닥치니까 정신이 멍해지는 게 이러다 과로로 쓰러질 수도 있겠구나 싶기도 해요.”
권수민 씨가 지난해 출연한 영화 ‘평범한 대학생이 조선시대로 온 사건’의 한 장면. 수민 씨는 주인공 최수빈 역을 맡았다. 사진제공 권수민 씨
“그럼요. 좌절이 일상이죠. 지난해부터 지금까지 오디션을 50번 정도 봤는데, 떨어지는 건 괜찮아요. 주위에서 함께 도전하는 연기지망생 언니 오빠들도 ‘오디션은 원래 500번은 봐야 하는 거야’라고 얘기해주시더라고요. 앞으로 10년은 더 열심히 볼 자신 있어요. 힘든 건 오디션 자체가 아니라…, 항상 그런 건 아니지만 인간적으로 모멸감을 느낄 때가 종종 있거든요. ‘왜 저렇게까지 말하지’ 싶은 거죠. 지적이나 비판은 당연히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하는데, 인격을 모독하는 말이나 행위들은 아직도 익숙해지질 않네요.”
-연예계가 워낙 거칠단 얘기가 많죠.
“저도 그런 말들 워낙 많이 들어서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했거든요. 그런데도 언제나 그 이상이 있더라고요. 이 길을 선택했으니 감수해야 하는 거긴 한데, 기본적인 존중도 받지 못할 땐 정말 속상하죠. 여긴 약육강식의 법칙이 너무 뚜렷하게 존재하는 것 같아요. 엄마 아빠 속상하실까봐 이런 얘긴 안 하고 싶긴 한데, 집에서 혼자 울기도 많이 울었어요. 그냥 다 내려놓고 펑펑 눈물 쏟고 나면 속이 좀 시원해지거든요. 그럼 다시 또 힘내서 열심히 해보자 마음먹게도 되고요.”
-그런 일을 겪어도 포기하겠단 맘은 들지 않는군요.
“네, 한번도요. 저도 그게 좀 신기하긴 해요. 몸도 마음도 정말 다 털려버리는 기분이 들 때가 있어요. 그런데 그럴수록 더 하고 싶단 생각만 들어요. 더 오기가 생기고 더 각오하게 돼요. 경험 많은 어른들에겐 하찮아 보일 수도 있지만, 지금 내가 이렇게 고생하고 있는데 이대로 끝난다면 너무 억울한 거예요. 꼭 뭐라도 돼서 옛이야기 웃으며 할 수 있는 연기자가 돼야겠다는 마음만 가득해요.”
“그런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닌데, 제가 한국인이기 때문 아닐까요. 한국드라마를 보고 연기와 처음 사랑에 빠지기도 했고, 여기서 인정받지 못하면 어디 가도 어려울 거란 생각이 들었어요. 사실 처음 연기학원 다닐 때 ‘한국말 잘 하는 외국인이 연기하는 것 같다’는 지적을 받기도 했어요. 아무래도 외국에서 오래 살다보니 어투가 자연스럽지 못했나 봐요. 그래서 밤마다 몇 시간씩 잠 줄여가며 발음연습을 했었어요. 여기서 뭔가 이룬 뒤의 먼 미래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우리나라에서 승부를 봐야죠.”
서울 관악구 서울대 종합교육건물 인근에서 포즈를 취한 권수민 씨. 편안한 차림으로 만난 그는 화사한 꽃들이 만발한 화단과 잘 어울리는 건강한 청년이었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이젠 이렇게 인터뷰했으니 소용없는 일이 됐지만, 그전까진 웬만하면 굳이 밝히지 않으려고 했어요. 연기하는데 그건 아무런 의미도 없다고 생각했고, 그런 걸로 평가받고 싶지도 않거든요. 지난해 말 단편영화를 찍을 때도 감독님은 물론 스태프들도 아무도 몰랐어요. 학교는 그냥 제가 학생으로 다니고 배우는 곳일 뿐이지, 연기와는 아무 상관도 없으니까요.”
-배우로서 어떤 역할을 해보고 싶은가요.
“지금이야 맡겨주시면 뭐든 열심히 해야죠. 연기를 꿈꿀 때부터 여러 가지 인생을 살아볼 수 있다는 점에 매력을 느꼈기 때문에, 무슨 배역이든 상관없어요. 사실 제가 외모가 ‘딱 봐도 연예인 급’이 아니라는 걸 잘 알아요. 작품에 들어가도 제가 원했던 역이 아니라 다른 캐릭터를 맡는 경우도 적지 않고요. 일단은 어디서건 전력을 다할 뿐이죠. 근데 최근엔 학원이나 오디션에서 거칠고 센 역할도 잘 어울리겠단 얘길 여러 번 들어서 그런 쪽으로도 연구하고 있어요.”
-그런 연구는 어떻게 하는 건가요.
“관련 작품 보고 연기 연습하는 게 기본이지만, 제가 아직 경험이 많지 않잖아요. 그래서 다양한 장소에 일부러 찾아가 보기도 해요. 최근엔 밀항 브로커 연기에 관심이 생겨서 혼자 인천항에 가서 한참동안 돌아다녀봤어요. 제가 한국으로 몰래 들어온다면 어떻게 어디로 들어와야 할까 계획을 짜봤죠. 그쪽에 폐건물 같은 게 많아서 거기도 들어가서 이곳저곳 살펴봤어요. 공간이 주는 상상력의 힘이란 게 있으니까요.”
-너무 위험한 곳은 혼자 가지 마세요.
“하하, 네. 조심할게요. 물론 제 나이에 맞는 하이틴로맨스를 해보고 싶은 생각도 많죠. 혹시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 보셨나요. 거기에 ‘나도 꽃으로 살고 있소. 다만 나는 불꽃이오’란 고애신(김태리)의 대사가 나와요. 꽃처럼 살 수 있지만 가슴 속의 열정을 이루기 위해 주변의 시선에 굴복하지 않는 마음이 느껴져서 너무 좋았어요. 영화 ‘타이타닉’의 로즈(케이트 윈슬렛)도 그렇고요. 제가 꿈꾸는 삶이나 연기도 그런 거예요. 피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고, 한발 한발 내딛는.”
지난해 8월 열린 ‘세종대왕 소현왕후 선발대회’(대한민국 한복모델 선발대회)에 출전했던 권수민 씨. 예선 본선을 거쳐 결선까지 올랐다. 사진제공 권수민 씨
“방금 말씀드린 배우들도 좋아하지만, 지난해 개봉한 영화 ‘불도저에 탄 소녀’에서 혜영을 연기했던 김혜윤 배우님은 정말 닮고 싶다고 느꼈던 분이에요. 뵌 적은 없지만, 제가 다니는 연기학원 선배시기도 해요! 세상의 부당함에 맞서 싸우는 연기에 반해서 이것저것 관련 자료를 찾아봤는데, 저희랑 비슷한 길을 걸으셨단 점도 너무 끌렸어요. 그분도 수많은 오디션을 보고 작은 단역부터 차근차근 밟아 올라가셨거든요. 게다가 그 무엇보다 연기에 대한 열정이 강하신 점이 공감도 가고 매력적이었어요.”
-잔인한 질문을 드릴 텐데, 어쩌면 연기자로 자리를 못 잡을 수도 있어요.
“음…, 그렇지 않길 바라지만 모든 게 제 맘대로 되는 건 아니겠죠. 하지만 앞으로 최소한 10년은 절대 포기하지 않을 거라고 약속드릴게요. 졸업하고 직장을 다니더라도 계속 연기를 배우고 오디션에 도전할 겁니다. 오디션 중에 가끔 제가 서울대 다니는 걸 아시고 ‘재미로 배우 해보려는 것이냐’고 물으시는 분들도 있어요. 절대 그런 게 아니라는 걸 보여드리려면 중도에 포기하는 일은 없어야겠죠.”
-대학생 때 할 수 있는 게 많아요. 그런 걸 놓치는 게 아깝진 않나요.
“여행이나 연애 같은 거 말씀이시죠? 주위에서 그런 말씀 많이 하시긴 해요. 근데 전 반대로 혹시 다른 일로 연기에 집중하는 시간을 뺏기지 않을까 그게 더 걱정이에요. 물론 훌륭한 배우가 되려면 연애도 해보고 다양한 경험을 쌓는 게 좋겠죠. 그런 감정이나 기회를 억지로 막고 있는 건 아니지만,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게 연기니까요.”
-강남 대형빌딩을 준대도 연기는 포기하지 않을 건가요.
“당연하죠. 비교도 안 돼요.”
권수민 씨가 지난해 출연한 독립영화 ‘침묵’의 촬영장에서 찍은 한 컷. 주인공 예림을 연기한 수민 씨는 교복을 입고 있으면 영락없는 고교생으로 보인다. 사진제공 권수민 씨
“무섭기는 해요. 마음에 상처가 될 수도 있겠죠. 이런 친구도 있구나 좋게 봐주시길 부탁드리지만, 그것 역시 제 맘대로 되나요. 다만 아시다시피 세상엔 정말 각양각색의 배우가 존재하잖아요. 권수민도 자기 나름의 색깔을 지닌 배우가 되려고 노력하는 사람 중 하나라고 여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직 세상 물정 다 모르는 것도 맞는 말이에요. 하지만 연기만큼은 제일 밑바닥에서 차근차근 배워가고 있어요. 최선을 다하면 언젠간 진심이 통하지 않을까요.”
-혹시 부모님께 하고 싶은 말이 있나요.
“에구…, (한참동안 말을 잇지 못하다가) 어릴 때 신께선 왜 저한테 연기라는 시련을 주셔서 이렇게 힘들게 만드시나 싶은 적도 있었어요. 배우의 꿈만 아니었다면 아빠 엄마한테도 예쁨 받는 딸이었을 텐데 싶기도 했고요. 항상 마음 깊은 곳에선 죄송함이 가득해요. 하지만 어쩌겠어요. 이걸 안 하면 못 살 거 같은데. 스스로 원망도 한탄도 많이 했지만, 결국 결론은 똑같았어요. 저는 이 길을 갈 겁니다.”
-미래에 수민 씨는 어떤 배우가 돼 있을까요.
“지금 같아선 배우라 불리기만 해도 행복하겠죠? 지난해 상업영화(주경중 감독의 ‘동대문’·미개봉작)에 처음 출연했는데, 너무 행복했지만 아직 부족한 게 많다는 것도 느꼈어요. 다만 제가 볼 때 제 장점은 ‘독기’라고 생각해요. 외모도 연기력도 아직은 어디서 내세울 정도가 아니라는 건 제가 더 잘 알아요. 하지만 고등학교 때도 그랬고, 전 뭐든 될 때까지 끝까지 하거든요. 어떤 일이 있어도 절대 포기하지 않는 배우가 되겠습니다. 전 연기를 너무 사랑하니까요.”
[나의 옛날이야기] ‘요즘 (젊은) 것들’은 연재 글마다 청년들이 직접 고른 옛 사진들을 싣고자 합니다. 자신의 얘기를 들려주며 그 시절을 들춰보는 ‘코너 속의 코너’입니다. 권수민 씨가 보내준 두 번째 사진은 고교 때 연극 ‘Everyone Gets Abducted by Aliens’에 출연했던 모습입니다. 주인공 Conspiracy Jane(왼쪽)을 연기했던 수민 씨는 “대사량도 많고 힘들었지만 연기에 도전하는 게 얼마나 행복한지 깨달았던 순간이었다”고 떠올렸습니다. 사진제공 권수민 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