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만의 방’ 더는 누릴 수 없었던, 출산 후 여성 예술가들의 분투기 아이와의 경험 작품에 녹인 시인… 공동 양육 강조한 SF작가 르 귄 등 이 시대 워킹맘의 삶과도 닿아있어 ◇나의 사랑스러운 방해자/줄리 필립스 지음·박재연 외 옮김/536쪽·3만3000원·돌고래
붓도 펜도 놓지 않은 그녀들 (윗쪽 사진부터) ① 1943년 두 아들을 곁에 두고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는 인물화의 거장 앨리스 닐. 닐은 네 아이를 낳았지만 그중 둘을 일찍 잃었다. 그는 언론 인터뷰에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난 그림을 그려야만 했어. 안 그랬으면 도저히 살아낼 수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② 미국 인물화의 거장 앨리스 닐이 둘째 아이를 낳은 직후인 1928년과 이듬해 그린 ‘웰 베이비 클리닉(Well Baby Clinic)’. 오른쪽 위 가장자리에 창백한 얼굴로 아이를 내려다보고 있는 건 닐 자신이다. ③ 1960년 미국 오리건주의 바닷가에서 아이를 안고 있는 작가 어설라 르 귄. 고전의 반열에 오른 공상과학(SF) 소설을 남긴 그는 자녀 양육에 동참한 남편에 대해 “나는 그에게 의지할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육아를 혼자 떠맡는 여성들의 절망감을 느끼지 않았다”고 회상했다. 돌고래 제공·ⓒThe Estate of Alice Neel
책은 예술과 양육이 양립할 수 있는지를 파고든다. 세계적인 여성 문인들의 전기를 써 온 저자가 20세기 초 태어나 엄마이자 예술가로서의 삶을 산 이들을 통해 양육자와 예술가 사이의 갈등과 방황을 고찰했다. 앨리스 닐뿐 아니라 노벨 문학상 수상자 도리스 레싱(1919∼2013)과 비평가 수전 손태그(1933∼2004) 등 여성 예술가들의 삶이 담겼다.
양육과 예술 사이에서 아이가 방해자이기만 한 건 아니라고 저자는 말한다. 아이를 낳아 기르는 건 ‘자기만의 방’이 완전히 무너지는 경험이지만, 어떤 이들은 거기서 나아가 그보다 크고 넓은 세상을 만들었다는 것. 노벨 문학상 수상자 토니 모리슨(1931∼2019)은 엄마가 되는 일에 대해 “내게 벌어진 가장 해방적인 일”이라고 했다. 시인 오드리 로드(1934∼1992)는 1963년 태어난 딸에 대한 시 ‘이제 나는 아이와 영원히 함께하므로’에서 “내 다리는 우뚝 선 탑이었고 그 사이로/새로운 세계가 지나가고 있었지”라고 썼다. 글쓰기와 양육 사이에서 길을 찾은 이들 가운데 일부는 아이의 존재를 통해 자신보다 더 큰 타자의 세계를 만난 경험을 작품에 녹여냈다.
책에는 저자의 이야기도 담겼다. 두 아이가 초등학생일 때 이 책을 쓰기 시작한 그는 아이들이 대학생이 됐을 무렵에야 집필을 마칠 수 있었다고 한다. 일과 양육 사이에서 길을 찾는 이들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다.
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