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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 레전드’ 김주성이 전직 은행원 형님의 전화를 기다리는 이유[유재영의 전국깐부자랑]

입력 | 2023-06-25 11:33:00

[5] 김주성 동아시아축구연맹 사무총장- 은행원 출신 프로축구단 사장 김영하 성남FC 대표이사의 ‘찐우정’




깐부. 국어사전에는 ‘같은 편’, 나아가 ‘어떤 경우라도 모든 것을 나눌 수 있는 사이’라는 보충 설명이 달려 있습니다. 제아무리 모든 것을 갖춘 인생도 건전한 교감을 나누는 평생의 벗이 없다면 잘 살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미국 하버드 의대 로버트 월딩어 교수는 동아일보 신년 인터뷰에서 “행복을 결정하는 결정적 요인은 부도, 명예도, 학벌도 아닌 사람들과 따뜻하게 의지할 수 있는 관계”라고 했습니다. 좋은 인간관계는 건강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고 합니다. 깐부들 사이에 피어나는 ‘같이의 가치’를 소개합니다.

  ● ‘나’와 잘 지내던 김주성 총장에게 생긴 ‘나를 보여주고픈’ 사람
“친한 사람만 봐도 시간이 모자라요. 나와 맞는 사람에게 시간을 집중하자는 게 삶의 지론입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이 자주 들게 하는 사람이 있어요.”
1980~90년대를 주름잡은 한국 축구의 전설인 김주성 동아시아축구연맹(EAFF) 사무총장(59)의 주변 사람들은 그가 이런 말을 쉽게 하지 않는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안다.
김 총장은 한국 선수로는 처음으로 3년 연속(1989~91년) 아시아 올해의 선수상을 받았다. 왼쪽 측면 공격수로 아시아를 휘젓고 1986년 멕시코,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 본선 무대를 밟았다. 손흥민(토트넘)의 원조 격이다. 1994년 미국 월드컵에서는 미드필더로 한국이 스페인, 독일 등을 상대로 선전하는 데 이바지했다. 이후 중앙 수비수로 변신해 K리그에서 공격수, 미드필더, 수비수 포지션에서 모두 시즌 베스트 11상을 받았다. K리그 최초의 영구 결번(16) 주인공이기도 하다. 2002년 한일 월드컵 4강 주역인 ‘테리우스’ 안정환이 청소년 때부터 롤모델로 삼았던 레전드다.

집념과 노력으로 반전에 반전을 그린 화려한 축구 인생이었다. 무명이었던 대학 시절 단 한 번 찾아온 기회를 놓치지 않고 대표 선수로 발탁돼 공격과 미드필드, 수비에서 전천후 역할을 하는 멀티 플레이어로 한국 축구의 레전드가 됐다. 1985년부터 96년까지 국가대표 선수로 활약한 김주성. 대한축구협회 제공

중앙고 재학 시절만 해도 유망주로 평가받지 못했던 그는 조선대에서 순전히 혼자의 노력으로 조용히 묻힐 뻔 했던 축구 인생을 반전시켰다. 대학 3학년 때인 1985년 국가대표에 선발됐고, 철저한 자기 관리로 롱런을 이어갔다. 독일 분데스리가 진출 꿈도 이뤄냈다.

김 총장은 현역 시절 ‘그라운드의 야생마’, ‘아시아의 삼손’으로 불렸다. 별명 자체가 김 총장의 온갖 스타일을 대변한다. 다른 흔한 공격수 스타일과 다르길 원했다. 상대 수비수 3~4명은 확실하게 힘과 스피드로 무너뜨릴 수 있어야 직성이 풀렸다. 한두 번 수비에 걸려도 끈질기게 돌파를 시도하고 체력적인 부담을 주게 해 수비수가 질리도록 했다. 대표팀에서 주전 자리를 잡기 시작하면서 파격적으로 갈기머리를 길러 본인의 파워와 스피드, 역동성을 더 돋보이게 하는 데 활용했다.

1988년 서울 올림픽 당시 부산 구덕운동장에서 열린 아르헨티나와의 조별리그 3차전에서 김주성(왼쪽)이 상대 수비를 앞에 두고 드리블하고 있다. 이날 아르헨티나에 1-2로 패하면서 조별리그에서 탈락하자 김주성은 갈기머리를 기르기 시작했다.  그는 이듬해인 1989년부터 3년 연속  아시아 최우수선수에 선정되며 ‘아시아의 삼손’으로 거듭났다. 베스트일레븐 제공


김주성은 삼손처럼 머리를 기른 뒤부터 아시아 최고의 공격수로 전성기를 맞이한다. 아래 사진은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 아시아 지역 최종예선 중국전에서 다이빙 헤딩슛을 터트린 뒤 포효하고 있는 김주성(왼쪽). 옆은 황선홍 2023년 항저우 아시아경기 축구 대표팀 감독이다. 김주성은 최종예선 최우수선수로 선정됐다. 

김주성은 한국 축구에서 언급되는 수많은 레전드와는 결이 다르다. 외유내강형인데 더 냉정하게 사리 판단을 하려는 면모가 강하게 풍긴다. 온화한 인상과 달리 내면에는 다른 세계와 카리스마가 있다. 표정으로는 티가 나지 않는데 축구 지능이 뒷받침된 수읽기와 계산에 밝다. 자기만의 생각이 정리되면 그라운드에서 거침없는 집념과 승부욕을 발휘했다.

일상에서도 자기 스타일에 대한 확신이 있다. 물론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정보가 그 배경에 있다. 학구열이 강해 박사 학위까지 땄다. 그러면서도 이를 알아달라고 남에게 요구하지 않는다. 행여 설명을 할 때는 필히 매너를 지킨다. 김 총장을 잘 아는 사람들이 인정하는 일관된 모습이다.

 2004년 대한축구협회 국제국 전문위원으로 입사해 행정가로서 제2의 인생을 시작했을 당시의 김주성 총장. 동아일보 DB

그래서 다가가기에 더 어렵고 높은 벽을 느끼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현역 시절 개인적으로 깊은 친분을 맺고 지냈다는 축구 담당 기자들이 많지 않다. 현역 은퇴 후 국제축구연맹(FIFA) 국제스포츠관리자 과정을 이수하고 대한축구협회 국제국에 입사해 20여년 가까이 축구 행정가로 일하고 있는 그를 지금도 사석에서 만나기는 쉽지 않다. 알려진 인맥은 대한축구협회에서 같이 근무했거나 현역 시절 대우로얄즈(현 부산)에서 같이 뛰었던 선후배 동료 정도. 인간 관계에 대해선 다다익선(多多益善)보다는 과유불급(過猶不及)의 이치를 더 따르는 편이다. 친해져도 적정 거리를 유지하면서 개인사 공개도 최대한 자제하는 편이다.
이런 그의 ‘선’을 무너뜨린 사람이 있다. 김 총장이 이례적으로 평생 매일 봐도 지겹지 않을 ‘깐부’라 주저 없이 말하는 대상이다. 최근 만난 자리에서 김 총장은 “친한 것보다 좋아한다”며 정면의 한 사람을 응시했다.


● 서로 상극인데 이렇게 재밌을 수 있어? 친한 것보다 좋아한다 말해주고 싶은 ‘우리’

달라도 둘이 있는 게 세상 편하다는 김영하 대표(왼쪽)와 김주성 총장. 축구 스타와 대한축구협회를 후원한 은행의 마케팅 담당 직원으로 처음 만났을 때의 어색함은 이제 기억도 나지 않는다. 연락만 되면 발길 닿는 대로 떠난다는 두 사람. 김 총장의 고향인 강원도 양양을 찾았다가 인제 백담사에서 망중한에 빠진 ‘깐부’. 김영하 제공 

김 총장이 빠져든 ‘깐부’는 프로축구 K2(2부) 성남 FC(성남시민프로축구단)의 김영하 대표이사(63)다. 지난 시즌 프로축구 K1(1부)에서 K2리그로 떨어진 팀 부활의 특명을 안고 올해 새 사장으로 부임한 김 대표는 전직이 은행원이다. ‘은행원 출신 첫 프로축구단 대표이사’라는 수식어가 이름 앞에 붙어다니게 됐다. 성남, 분당 지역에서 두 차례 은행 지점장을 한 경력도 있다.

생판 축구와는 관계없는 전직 은행원이 왜 프로축구단 대표가 됐는지 궁금하겠지만 김 대표는 사실 국내 축구 마케팅의 근간을 닦은 선구자다. 1988년 하나은행의 전신인 서울신탁은행에 입사한 김 대표는 하나은행의 2002년 한일 월드컵 후원과 대한축구협회 공식 스폰서 참여를 20여년 넘게 진두지휘했던 실무자다.

김 대표가 성남 FC에 부임하자 고향 지역 체육회에서 축하 현수막을 내걸었다고 한다.

“민망해서 현수막을 내려달라고 했더니 ‘이 고향 출신 고위 공직자들은 너무 많은데 프로축구단 대표는 처음이라 꼭 축하해줘야 해서 못 내리겠다’고 하더라고요.”

2004년 김 총장이 대한축구협회에 입사하고 나서 공식 후원사와 파트너 관계로 만난 두 사람은 첫인사를 나누고 지금까지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 소소한 만남을 거듭하면서 자연스럽게 절친한 사이로 발전했다.

김 대표는 “TV로만 보던 스타를 봐서 처음에는 얼떨떨했다. 우리 가족들에게도 ‘김주성’은 영웅이었다”면서 자신과는 너무 다른 스타일의 김 총장과 평생 친구가 된 게 믿기지 않는다고 했다. 김 총장이 “서로 성격은 아예 다르다”고 선을 긋자 김 대표는 “정말 독특한 스타”라며 맞장구를 쳤다. 김 대표는 “내 고향에 가면 사람들이 ‘김총’(김 총장이 2012년 대한축구협회 사무총장을 맡고 나서 편하게 부르는 지칭)을 보고 ‘축구 선수 김주성 닮았다’고 많이 그런다(웃음). 그런데 보통 이런 상황이면 ‘맞다’라고 인정하는데 김총은 손사래를 치고 숨어버린다. ‘나 잘났어. 알아봐줘’라는 스타 의식이 전혀 없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김 대표는 “나는 두루두루 사람들과 친분을 쌓는데 김총은 반대다. 은행에서 영업을 할 때는 김총이 이해가 안 됐는데 은행을 나오고부터는 어느새 김총 말을 따르고 있다”며 웃었다.

평소 셀카를 잘 안 찍는 김영하 대표(오른쪽)는 유독 김주성 총장을 만나면 거리에서 즉석 기념 셀카를 찍어 남긴다. 김영하 제공.

1분을 지켜봐도 둘은 ‘티키타카’가 너무 잘 맞는다.

“오늘까지 우리 4일을 연속으로 보네. 난 너무 재밌어.”(김영하)

“그래도 일은 같이 하지 말자고요. 동업.”(김주성)

“겉으로는 단순하게 판단하는 것 같은데 속으로 고민을 많이 하는 스타일이에요. 그래서 스트레스를 받는 편이죠.”(김영하)

“그래도 언행일치는… 안 돼요. 하하.”(김주성)

“내가 운전을 하면 김총은 ‘운전 못한다’고 타박을 하면서 뒷좌석에 앉아요. 김총한테 이길 수 있는 건 정말 나이하고 골프밖에 없다니까. 하하”(김영하)

대체로 장난과는 거리가 먼 김 총장이 김 대표 앞에서는 장난기가 조금 있는 점잖은 동생으로 팩폭(팩트폭행)을 날린다. 이를 김 대표가 편하게 받아준다. 이런 분위기만으로도 앞으로 둘이 어떻게 지낼지 예상이 된다.

- 평생 보셔야죠?
“안 갈 이유가 없는 것 같아요. 형님 연락을 이상하게 계속 기다리게 됩니다.”(김주성)
“잘해주는 것보다는 한결같은 게 중요한 것 같아요. 우리 사이에선.”(김영하)

티격태격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서로를 너무 위하고 배려하는 마음이 크다.
김 대표는 “김총이 고향 부모님이 계시는 노인복지관까지 직접 찾아가 용돈을 드리기까지 한다. 알면 알수록 속정이 깊은 사람이다. 자기의 진가를 서서히 나에게 보여주는 게 정말 고맙다. 내 옆에 없으면 빈 자리가 너무 커 보일 사람”이라고 했다. 김 총장은 “업무적으로 만났는데 개인 관계로 인연을 발전시켰다는 자체만으로 형님에게 감사하다. 서로가 축구로 추억을 나눌 수 있는 구심점이 되고 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고 가슴 뿌듯해했다.
김 총장이 김 대표를 대하는 태도에서 무심코 책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 ‘건강한 까칠함’이란 인간 관계에서 거부당하고 상처받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내려놓는 힘이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러면 상대에게도 홀가분하게 내 모습을 전부 내보일 수 있는 것이다. 나의 그런 모습을 수용해 주는 사람들과는 더 기분 좋게 잘 지내면 되고, 나를 비난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비난이 일리 있는 것인지 아닌지를 살펴 나를 고치거나, 그것이 아니라면 그 사람의 문제로 치부해버리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까칠함이 무례함과는 차이가 있다. 까칠함에는 나 자신에 대한 예의, 나아가 다른 사람에 대한 존중이 담겨 있다.>

‘나는 까칠하게 살기로 했다(상처받지 않고 사람을 움직이는 관계의 심리학ּ 저자 양창순)’에서


● 가려운 곳 긁어주며 더 풍성해지는 ‘우리 축구’ 

김영하 성남 FC 대표가 사무실이 있는 성남축구센터 1층에 있는 팀 전시실에서 2014년 FA(축구협회) 우승컵을 만져보며 명문 구단으로 부활을 자신했다. 성남은 일화 시절까지 포함해 K1에서 7번 챔피언 자리에 올랐다. 유재영 기자 elegant@donga.com

“사자성어를 보면 친구를 의미하는 말이 많은데, 그중에서도 지기지우(知己之友)가 딱 맞는 것 같아요.”

김 대표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속마음을 잘 알아주는 벗’이라는 의미의 말로 김 총장과의 관계를 정리한다. 그래도 행여 김 총장에게 짐이 되지 않기 위해 노력을 많이 했다. 정년 퇴임 등으로 은행을 떠나 있던 지난 몇 년간 다시 축구 일을 찾으려고 발품을 많이 팔았다. 김 총장은 “속으로 별 걱정을 많이 했던 때였지만 믿었다”고 했다. 그리고 김 대표는 성남 FC 대표이사 공모를 통해 정말 축구계로 돌아왔다.

“하나은행을 모기업으로 하는 대전 구단도 아니고, 경기인 출신도 아닌 분이 본인 실력으로 성남 프로구단의 대표가 됐다는 건 대단한 일이죠. 가능성이 희박한 도전이었는데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팀을 정상으로 정비할 수 있는 능력에서 많은 점수를 딴 것 같아요. 축구단 경영의 전문성 담보는 시대가 요구하는 사항입니다. 김 대표께서 이런 면모를 잘 보여주시고, 성남시와 구단-감독-선수 사이에서 건강한 견제구, 응집의 중심이 되면서 새로운 인생을 멋있게 펼치셨으면 해요.”(김주성)

“김총과 무조건 축구 얘기를 오래 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만 했어요. 성남 FC는 큰 홍역을 치르면서 소위 인구 3000만 명이 아는 구단이 됐다고 하잖아요. 불명예스러운 면이 부각되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밑져봐야 손해날 것 없는 긍정적인 상황이라고 봅니다. 은행원의 시각으로 축구단의 회계 관리 등에서 새로운 게 보이더라고요. 뭐라도 잘 해야겠다는 마음으로 내 경험을 총동원해서 명문 구단의 자존심을 회복시키려고 합니다.”(김영하)

김 대표와 김 총장은 축구공으로 하나 되자는 의미로 대한축구협회 후원 관련 업무를 통해 인연이 된 몇몇 지인들과 ‘공일회’라는 친목회 모임을 만들어 우정을 나누기도 한다. 김 총장이 유일하게 참석하는 모임이다. 김영하 제공.

1970년에 창간해 53년째를 맞은 국내 유일 축구전문지 ‘베스트일레븐’의 박정선 대표도 김 대표와 김 총장의 특별한 깐부다.  두 사람의 축구 행보에 든든한 후원군 역할을 한다. 둘이 부르면 무조건 달려가는 의리파이기도 하다. 김영하 제공 

축구 얘기라면 ‘아무말 대잔치’라도 신이 난다.

“김총만 보면 예전에 김총이 대우 시절 경기 도중 데니스(러시아 출신 전 수원 공격수. 2003년 한국으로 귀화) 목을 밟았던 게 기억 나.”(김영하)

“좋은 선수였죠. 데니스….”(김주성)

김 대표의 즉흥 도발(?)에 김 총장이 숨을 고르자 김 대표는 “공격수 하다가 수비로 내려온 건 김총이 처음이지 않나. 대단한 건데”라고 김 총장을 띄우며 표정을 살핀다. 그러자 김 총장은 “박성화 감독(전 청소년대표팀 감독)께서 국가대표팀에서 스트라이커도 하고 나중에 수비수를 하셨죠. 점프력이 워낙 좋으셔서…”라며 차분하고 겸손한 동생의 모습을 다시 유지한다. 이러다 서로 잘 몰랐던 축구 개인사가 나오고 더 가까워진다.

김 대표가 성남 FC에 오고나서 김 총장이 여러 모로 큰 힘이 되고 있다. 김 대표는 “김 총장의 도움으로 선수의 이모저모를 세밀하게 관찰하는 눈이 생겼다. 독일 등 해외 구단들의 동향에 대해서도 정보를 알기 쉽지 않았는데 김총 본인이 해외에서 뛰던 경험과 네트워크를 활용해 정확한 해석을 내려준다”고 했다.

김 대표는 김 총장의 화려한 현역 시절의 커리어, 알찬 축구 행정 경험, 승부욕과 성취욕, 평범하지 않은 학구열과 겸손함 등이 축구팬과 대중에게 활발하게 전해져 국가적인 선한 영향력이 됐으면 한다. 외부 활동을 더 적극적으로 해달라는 바람이었다. 김 총장은 “100년이 지나도 내 현역 시절의 스피드를 기억해줬으면 한다”고 우회적으로 김 대표의 말에 긍정적인 화답을 했다. 김 총장은 “저도 32살의 나이 때 공격수에서 수비수로 변신하면서 화려한 과거를 잊고 다시 축구에 눈뜨자고 다짐했고 실천했다. 형님의 최근 활동을 보면서 축구는 벗기면 벗길수록 새롭다는 것을 또 느낀다. 욕심을 부리지 않는 선에서 또 다른 ‘김주성 축구’를 찾고 싶은 마음이 형님 때문에 든다”고 말했다.

오늘보다 더 좋을 내일에 대한 기대감을 서로 주고받는 건 일상사다.

“김총이 월드컵에서는 골을 못 넣었지만 저와 함께 남은 축구 인생에서 드라마틱한 ‘골’을 넣었으면 좋겠어요. 사장이 되고 나서 체중이 68kg까지 빠졌는데 김총과 함께 더 뛰어야죠.”(김영하)

“형님의 몸무게는 다시 원상복귀될 겁니다. 하하. 장담해요. 프로축구단 대표로 사람들과 많이 만나셔야 되니까요. 그런데 내일은 뭐 하실 거예요?”(김주성)










유재영기자 elegan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