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이 사람을 보라
윤두서의 자화상은 외관을 통해 내면을 드러낸다. 정신을 가다듬어 올바른 상태에 놓고, 우주를 관통하는 이치를 응시하고자 하는 강고한 자아가 엿보인다. 사진 출처 문화재청 홈페이지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윤두서의 자화상은 단지 대상의 외관을 묘사한 데 그치지 않는다. 외관을 내면을 드러내는 창구로 활용한다. 과연 어떻게? 정면을 응시하는 눈동자가 내면의 창구일까? 고대 중국의 사상가 맹자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사람 속에 있는 것 중에 눈동자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 눈동자는 그 악을 덮어두지 못한다. 가슴속이 바르면 눈동자가 맑고, 가슴속이 바르지 않으면 눈동자가 흐리다. 그 말을 듣고 그 눈동자를 보면, 사람이 어떻게 자신의 가슴속을 숨기겠는가?”(存乎人者, 莫良於眸子. 眸子不能掩其惡. 胸中正, 則眸子瞭焉. 胸中不正, 則眸子眊焉. 聽其言也, 觀其眸子, 人焉廋哉.) 실로 윤두서 같은 눈동자를 한 사람이라면, 지조 있는 인생을 살았을 것 같다.
이 자화상이 윤두서의 실제 모습과 얼마나 닮았을까. 그것을 확인할 길은 없다. 자신을 추한 모습으로 그리고 싶은 사람은 드물다. 윤두서의 자화상이 보여주는 것은 윤두서의 실제 모습이라기보다는, 윤두서가 보고 싶었던 자기 모습일 것이다. 정신을 가다듬어 올바른 상태에 놓고, 우주를 관통하는 이치를 응시하고자 하는 강고한 자아. 윤두서의 자화상에 따르면, 인간은 감히 그 정도의 존재다.
프랜시스 베이컨의 자화상은 강고한 자아가 아닌 무엇이 오고 간 흔적, 그 자체를 자신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자신을 어여쁘게 이상화하고 싶은 충동 같은 것은 없다. 사진 출처 경매회사 크리스티 홈페이지, 미 휴스턴현대미술관 홈페이지
구타당한 베이컨은 앙심 같은 것은 품지 않았다. 그는 맞는 것을 오히려 좋아했다. 오, 제발 더 때려줘. 베이컨을 때리고 나서 당황했을 구타자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연구자 데즈먼드 모리스에 따르면, 베이컨은 자기를 고문한 사람들과 섹스를 즐겼다. 피학적 동성애자였던 베이컨은 남창으로 일하면서 돈을 벌곤 했다. 역시, 조선 시대 양반이 할 일은 아니다.
자화상 속에서 베이컨은 실로 두들겨 맞은 사람의 얼굴 모양을 하고 있다. 무엇에 두들겨 맞은 것일까? 인부들의 주먹에? 함께 피학적 성행위를 즐기던 애인의 채찍에? 아니면 동성애를 인정하지 않던 동시대에? 그것도 아니라면 삶 자체에? 피학 성애자였던 그는 자신을 두들겨 패는 삶 자체를 사랑했는지도 모른다. 그 사랑의 결과가 그의 예술이다. 그가 예술가로 큰 성취를 이루자, 세상은 살갑게도 기사 작위를 제의했다. 베이컨은 이렇게 거절했다. “그런 명예를 받으면 늙어 보여서 싫어.”
이게 베이컨의 실제 모습일까. 글쎄. 이것은 베이컨이 자기라고 생각한 모습이다. 베이컨은 생전에 자기 얼굴은 푸딩처럼 생겼다고 말했다. 자신을 어여쁘게 이상화하고 싶은 충동 같은 것은 없다. 베이컨은 과연 자신의 모습을 그저 뭉개버린 것일까. 그저 지워버린 것일까. 그래도 거기에는 흐릿하게 누군지 알아볼 수 있는 어떤 흔적이 있다. 베이컨의 초상화를 통해서 본, 인간이란 간신히 그 정도의 존재다. 그러한 존재는 가훈 같은 건 남기지 않는다. 베이컨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순간을 넘기려고 아무 말이나 한다.”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