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몇 안 되는 성장 산업’. 일본의 ‘주간동양경제(슈간도요게이자이)’가 지난달 게재한 애니메이션 산업 특집 기사에 쓴 표현입니다. 요즘 부쩍 일본 애니메이션 인기가 한층 높아졌다는 느낌이었는데, 실제 산업이 급성장 중인 겁니다.
일본 애니메이션 하면 ‘IP(지식재산권)의 힘’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기도 하죠. 한국 게임이나 웹툰, 드라마 산업을 이야기할 때도 일본 애니메이션처럼 되면 좋겠다는 이야기가 나오곤 하는데요.
그럼 일본 애니메이션은 산업적으로 무엇이 특별할까요. 최근 일본 애니메이션 산업에 대한 분석 리포트를 쓴 하나증권 윤예지 애널리스트와 이야기 나눴습니다.
세계적으로 인기를 끈 애니메이션 ‘귀멸의 칼날’. 일본 대표 만화 출판사인 슈에이샤의 원작을 바탕으로 애니메이션 제작사 유포테이블이 제작해 2019년부터 방영 중이다. 공식 홈페이지
10년간 두 배로 급성장
-일본 애니메이션은 우리에게 친숙하지만 산업적 측면에서 바라본 적은 별로 없는데요. 이 산업 자체가 엄청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있다고요?“일본 애니메이션 산업은 2021년 기준 2.7조엔 규모입니다. 규모 자체보다 성장률이 매우 놀라운 부분인데요. 2012년도엔 1.3조엔 규모였던 게 10년 만에 2배 사이즈로 커졌습니다.
성장이 내수와 수출 중 어디에서 왔느냐도 중요한데요. 지난 10년간 내수 시장은 0.4조엔 정도 성장했는데, 나머지 1조엔 넘는 성장은 해외에서 발생했습니다. 지금은 내수와 수출 비중이 50대 50일 정도로 해외에서 많이 소비되고 있죠. 일본 애니메이션 라이선스를 가장 많이 사가는 국가는 북미, 중국, 대만, 한국 순입니다.”
윤예지 하나증권 애널리스트는 인터넷과 게임 업종을 주로 담당한다. 성장이 나오는 유망한 섹터를 찾다가 기관투자자들의 수요가 커지고 있는 일본 애니메이션 산업을 분석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전영한 기자
“한국 드라마를 생각하면 OTT에 파는 게 가장 큰 매출인데요. 일본 애니메이션 내수시장의 전체 파이 중 49%가 굿즈 매출이고요. 또 재미있는 게 아케이드, 그러니까 파친코가 포함돼있는 게임장 관련 매출이 22%를 차지합니다.
제작위원회와 넷플릭스
-일본은 유명한 애니메이션은 대부분 ‘제작위원회’ 시스템으로 제작이 된다는데요. 이게 좀 생소한데, 어떤 건지 설명해주세요.“쉽게 말해 제작위원회는 애니메이션 제작을 함께할 회사들의 모임인데요. 이렇게 모이는 가장 큰 이유는 양질의 애니메이션 하나를 만드는 데는 수십억원의 돈이 들기 때문입니다. 이를 관련 기업들이 나눠 부담하고 그 과실도 나눠 가지는 구조인데요.
제작위원회에 주로 들어가는 회사는 애니메이션 제작사, 원작 만화를 가지고 있는 출판사, 굿즈를 만들 반다이남코 같은 회사, 유통을 담당하는 애니플렉스나 토호 같은 배급사가 있고, 덴츠 같은 광고회사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일본의 제작위원회 시스템은 버블기가 끝나고 제작비를 모으기 어려워진 1990년대에 등장했다. 1995년 ‘신세기 에반게리온’이 제작위원회 형태로 만들어져 히트를 치면서 일본 애니메이션 업계에 이런 제작 방식이 자리잡았다. 신세기 에반게리온 공식 홈페이지
“애니메이션 하나를 만들려면 수십억원, 규모가 크면 수백억원이 들기도 하는데요. 그 비용을 분담하는 것이 제작위원회가 탄생한 이유이기도 하고, 여전히 가장 중요한 기능입니다. 우리가 잘 된 애니메이션만 봐서 그렇지, 흥행이 안 된 사례도 굉장히 많아요. 그런데 제작위원회의 경우 여러 작품에 나눠서 투자해서, 10개 중 2~3개만 터져도 먹고 살 수 있죠.
단점은 아마 아시는 분들도 있을 텐데요. 애니메이션 제작사 중엔 영세한 곳이 많습니다. 제작비가 한 50억원이라고 하면, 제작사가 태울 수 있는 돈은 많지 않아요. 그럼 대부분 돈이 어디에서 오느냐. 돈이 많은 방송사나 광고회사, 아니면 원작을 가진 출판사에서 오죠. 애니메이션 제작에 있어 가장 큰 크리에이티브를 담당하는 건 제작사인데도, 돈을 많이 태우지 못하는 환경이다 보니 작품의 창의성과 작품성이 상업성에 의해 훼손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최근 이 트렌드가 조금 바뀌기 시작했어요. 제작사들도 규모를 조금씩 키워나가기 시작했기 때문이죠. 지난해 가장 화제가 된 애니메이션 작품이 ‘체인소 맨’인데요. 이걸 마파(MAPPA)라는 애니메이션 제작사에서 만들었는데, 마파가 100% 자본을 투자해서 제작했습니다. 애니메이션 제작사가 100% 제작비를 들여 만드는 작품이 나오기 시작한 거죠.”
지난해 애니메이션 화제작 ‘체인소 맨’. 일본 제작사 마파가 이례적으로 100% 제작비를 투자해 제작했다. 공식 홈페이지
“그렇죠. 이제 한국 드라마와 마찬가지로 일본 애니메이션 산업에서도 넷플릭스가 중요한 시장 참여자가 됐습니다. 넷플릭스가 오리지널을 제작할 땐 만약 제작비가 200억원이면 20억원의 이익을 챙겨주는 식으로 계약을 하거든요. 흥행과 무관하게 이익을 올릴 수 있는 구조이기 때문에 ‘망해가던 애니메이션 제작사를 살려주는 게 넷플릭스’라는 의견도 있습니다. 그래서 넷플릭스 오리지널 애니메이션도 꽤 많이 제작하고 있고요.
다만 아주 히트한 작품들은 넷플릭스 오리지널로 제작되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다. 체인소 맨도 그렇고 귀멸의 칼날, 도쿄 리벤저스, 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 스파이 패밀리 등. 만화 팬덤이 아주 큰 작품들은 모두 애니메이션 제작위원회로 들어갔어요. 즉, 2차 판권으로 돈을 많이 벌 수 있을 만한 작품은 오리지널로 가지 않죠.
물론 넷플릭스 오리지널 중에서도 히트작들이 계속 나오기는 합니다. 그래서 애니메이션 제작사들의 라인업을 보면 마진을 방어해주는 넷플릭스 오리지널 작품이 있고,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으로 2차 판권 매출을 세게 노려볼 만한 제작위원회 작품이 섞여 있습니다.”
-성공이 보장된 작품이라고 여길수록 자기네가 IP를 가져가야 하니까 넷플릭스에 넘기지 않는군요. 한국 드라마 시장 환경과는 분위기가 많이 다르네요.
“그렇죠. 한국 드라마랑 일본 애니메이션의 가장 큰 차이는 IP가 어디에 있느냐입니다. 한국 드라마는 OTT를 중심으로 형성된 시장이기 때문에 글로벌 OTT한테 IP가 가는 경우가 많고요. 일본은 여전히 제작위원회 형태로 많이 제작되기 때문에 일본 기업이 IP를 가져가는 구조입니다.
또 생각해볼 만한 게 한국 드라마 제작사들은 그 자체로는 별로 브랜드가 없어요. 올해 넷플릭스 드라마 중 가장 기대작이 ‘폭싹 속았수다’인데 그 작품이 왜 유명할까요. 출연진(아이유, 박보검)과 작가(‘동백꽃 필 무렵’의 임상춘 작가) 때문에 유명한데, 그거 어디서 제작하는지 혹시 아시나요? 팬엔터테인먼트인데요.
그런데 우리가 ‘팬엔터테인먼트에서 제작하니까 그 작품 재미있겠다’라는 생각은 잘 안 하잖아요. 그런데 일본 애니메이션 회사 중에서 귀멸의 칼날을 만든 ‘유포테이블(ufotable)’ 같은 제작사가 작품을 만든다고 하면 ‘액션신이 재미있겠다’라는 생각을 합니다. ‘마파’ 같은 제작사가 만든다고 해도 기대된다고 하고요.
그래서 드라마 제작은 개인 단위로 팬덤이 생기고 산업의 과실도 몰리는데 비해, 애니메이션은 기업 단위로 브랜드 파워와 팬덤이 생깁니다. 주식 투자 관점에서는 드라마보다는 일본 애니메이션이 좀 더 나은 선택지인 거죠.”
제작사 고마진의 열쇠, IP
장화 신은 고양이가 회사의 상징인 토에이 애니메이션. 마징가Z와 캔디, 세일러문 등을 제작한 전통의 애니메이션 제작사이다. 대표 IP는 원피스, 드래곤볼, 소년탐정 김전일 등. 토에이 애니메이션 공식 트위터
“일본 애니메이션 제작사 중에 가장 유명한 회사는 토에이 애니메이션이고요. 시가총액이 5조원 정도 됩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드라마 제작사보다 훨씬 큰 규모의 회사이죠(스튜디오드래곤 시가총액 1.73조원). 올해 3월 마감된 2022년 회계연도(2022년 4월~2023년 3월)를 기준으로 매출이 8700억원에 영업이익 2900억원을 냈습니다. 이 정도 어닝이면 역시 한국의 가장 큰 드라마 제작사보다 훨씬 큰 규모이고요.
전년과 비교해 매출이 상당히 가파르게 성장했는데요. 그 이유가 ‘더 퍼스트 슬램덩크’(2022년 12월 개봉)가 글로벌 히트했는데, 이게 바로 토에이 애니메이션이 만든 작품이고요. 한국에서는 흥행하진 않았지만 원피스와 나루토 극장판도 토에이가 제작했습니다.
토에이 애니메이션을 통해 이 산업을 좀더 설명해 드린다면, 전체 매출에서 영상을 제작하고 판매하는 매출이 40%가 조금 넘고요. 2차 판권 매출이 50% 가까이 됩니다. 이게 매출에서 그런 거고, 이익을 살펴보자면 2차 판권이 기여하는 이익 비중이 65% 가까이 됩니다. 확실히 고마진의 비즈니스를 가지고 있다고 이해해주시면 됩니다.”
“토에이 애니메이션은 판권 매출 중 작품별 비중을 공개하지 않는데요. 아이지포트(IG PORT)라는 중소형 애니메이션 제작사 상장사가 있습니다. 이 회사가 시총 1500억원 정도인 작은 회사인데, 자기네 판권 매출에서 어떤 작품이 기여하는지를 공개해요. 그중 가장 크게 기여하는 작품이 ‘공각기동대’인데, 그게 1995년에 시작한 시리즈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히트친 IP, 특히 시리즈 IP가 생기면 그 팬덤이 시즌2로 가면서 더 확장되고, 사람들이 쓰는 돈이 커지면서 회사의 이익은 불어나는 거고요. 그렇게 히트한 시리즈 IP를 가지고 제작사가 이익을 확보하면 새로운 IP에도 도전할 수 있는 자금 여력도 생겨서 선순환 구조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윤예지 애널리스트는 기관투자자들도 최근 일본 애니메이션 산업에 관심이 많다면서, 개인 투자자들도 관심을 가질 만하다고 설명한다. 전영한 기자
“저는 한국 웹툰이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는 게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웹툰이란 매체가 우리나라엔 익숙하지만 해외엔 아직 익숙하지 않은 매체인데요. 애니메이션은 글로벌 공통 매체이거든요. 글로벌 팬덤을 키울 수 있는 중요한 매개가 애니메이션이 될 거라고 생각하고요. 실제 한국 웹툰이 제작위원회 형태로 일본 제작사를 통해서 애니메이션을 제작하는 게 시작됐습니다.”
-일본 애니메이션 제작사가 제작하는 형태로요?
“네. 디앤씨미디어라는 웹툰 CP사가 올해와 내년에 3개 작품을 공개해요. 하나는 올해 4월 공개된 ‘그녀가 공작저로 가야 했던 사정’인데요. 제작위원회 형태로 제작이 됐고, 일본 애니메이션 제작사가 만들었습니다. 상당히 준수한 흥행을 했고요.
디앤씨가 가진 IP 중 이런 루트를 걷고 있는 것 중 가장 기대되는 게 ‘나 혼자만 레벨업’입니다. 아마 들어보셨을 거예요. 그 IP가 일본에서 가장 인기 있었던 한국 웹툰이고요. 에이원픽처스(A-1 Pictures)라는 일본에서 매우 인지도 있는 애니메이션 제작사가 만들기 때문에 큰 기대를 받고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계속 트라이를 하다 보면 한국 웹툰 중에서도 귀멸의 칼날 같은 작품이 하나 나오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렇게 되면 진짜 그땐 한국 웹툰 기업들이 다 리레이팅을 받을 수 있는 계기가 될 겁니다.”
한국 웹툰이 일본에서 제작위원회를 통해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된 사례인 ‘그녀가 공작저로 가야 했던 사정’. 공식 홈페이지
“만약 콘텐츠 투자에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일본 주식은 놓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요즘 많이 합니다. 한국에서 투자할 때 반도체를 빼먹을 수 없잖아요. 그것처럼 일본은 콘텐츠 강국이고요, 일본 콘텐츠 기업들을 찾아보면 ‘이게 상장이 되어 있네?’ 싶은 기업들이 많이 상장돼있습니다. 일단 일본 공영방송부터 다 상장사이고요. 공영 방송사의 이익 모멘텀이 애니메이션인 경우도 많습니다.
지금이 엔저이기도 하고, 일본 주식시장은 한국과 시차가 없어서 장중에 바로 대응이 가능하다는 장점도 있습니다. 예전엔 언어의 장벽이 있었지만 이젠 AI 번역 시스템도 잘 갖춰져 있고요. 따라서 일본 주식 투자도 한번 시도해보시면 좋지 않을까 합니다.” By. 딥다이브
어쩌다보니 한국 드라마 산업 인터뷰에 이어 일본 애니메이션 산업을 주제로 한 인터뷰를 하게 됐습니다. 산업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는 계기가 되시길 바랍니다. 인터뷰 주요 내용을 요약해드리자면
-일본 애니메이션 산업이 가파른 성장세를 기록 중입니다. 해외 매출이 빠르게 늘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일본의 유명 애니메이션은 관련 회사들이 ‘제작위원회’를 구성하고 제작비를 분담하는 방식으로 제작됩니다. 막대한 제작비를 효과적으로 끌어모으기 위해 1990년대부터 자리잡은 제작방식인데요. 지금도 가급적 인기가 검증된 작품일수록 넷플릭스 오리지널이 아닌 제작위원회 방식으로 만들어서 IP를 확보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히트친 IP는 제작사에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합니다. 10년, 20년 뒤까지 이익에 기여하기도 하는데요. 애니메이션을 만들어 판매하는 것보다 2차 판권 사업이 제작사에 더 큰 이익을 안겨줄 정도라는군요.
*이 기사는 27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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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애란 기자 haru@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