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경제사회노동위, 해법은
1998년 외환위기 극복 대타협 1998년 2월 6일 한광옥 노사정 위원장(왼쪽에서 네 번째)을 포함한 노사정위 대표들이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사회적 대타협에 합의한 뒤 박수를 치고 있다. 동아일보DB
이정식 고용노동부 장관은 올해 초 국회 대정부 질문에 출석해 노동개혁 추진 방식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이렇게 말했다. 노사정 사회적 대화 기구인 대통령 직속 경제사회노동위원회(경사노위)는 현 정부 출범 이후 공회전만 하다가 이달 7일 한국노동조합총연맹(한국노총)의 불참 선언으로 사실상 멈춰 섰다. 7년 5개월 만에 노사정 공식 대화 창구가 닫히자 이참에 사회적 대화의 틀을 다시 짜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주애진 정책사회부 기자
● 대타협-탈퇴, 반복의 역사
한국의 사회적 대화는 김대중 정부 초기 1998년 1월 출범한 노사정위원회에서 시작됐다고 볼 수 있다. 1997년 외환위기 때 국제통화기금(IMF)은 한국에 노동시장 유연화, 금융기관 구조조정 등을 요구했다. 당시 정부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회적 대화를 제안했다. 한국노총과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노총)이 참여한 가운데 노사정위는 그해 2월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사회협약’을 체결했다. 노동계가 정리해고, 파견근로 등 노동시장 유연화를 받아들이고, 경영계는 노동 기본권 보장 등을 수용하며 서로 양보한 결과였다.
하지만 협약 직후 민노총은 내홍을 겪다가 노사정위를 탈퇴했고, 협약 관련 입법 지연 등으로 한국노총과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까지 탈퇴하면서 이행 과정이 순탄치 않았다. 민노총은 이때부터 약 25년간 사회적 대화를 거부하고 있다.
이후 한국노총과 경총이 탈퇴와 복귀를 반복하는 가운데 노사정위는 근로시간 단축 합의(2000년), 노사관계 선진화 대타협(2006년) 등 나름의 결실을 냈다. 노사정위는 2007년 경제사회발전노사정위원회로 개편됐다. 이명박 정부에서 중단됐던 사회적 대화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계기로 다시 활성화됐다. 노사정에 시민사회까지 더해 2009년 2월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노사민정 합의’를 이뤘다. 노동계는 파업 자제, 임금 동결을 실천하고 경영계는 일자리를 유지하도록 노력한다는 내용이었다.
● 참여 주체 확대에도 여전히 난항
문재인 정부는 한국형 사회적 대화를 표방하며 2018년 11월 경사노위를 출범시켰다. 그동안 제기된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정부는 경사노위 참여 주체를 대폭 늘렸다. 근로자위원이 2명에서 5명으로 늘었는데 기존 양대 노총(한국노총과 민노총)의 대표 각각 1명에 청년, 여성, 비정규직 등 3명의 계층별 대표가 새로 포함됐다.
노조 조직률이 낮고 대기업, 정규직 중심인 양대 노총이 노동계를 대표하면서 미조직, 취약계층 노동자의 목소리가 반영되지 않는다는 지적을 반영한 것이다. 다만 이들 계층별 대표를 ‘전국 규모 총연합단체인 노동단체’가 추천하도록 법에 규정해 여전히 양대 노총의 영향력 아래에 뒀다. 사용자위원도 경총, 대한상공회의소에 중소·중견기업, 소상공인까지 포함해 5명으로 늘었다. 경사노위 출범 준비에 참여했던 민노총은 내부 갈등으로 막판에 불참했다.
이렇게 탄생한 경사노위도 파행을 겪고 있다. 한국노총만 참여한 ‘반쪽짜리’ 출발 후 당정의 요청으로 진행된 탄력적 근로시간제 확대 관련 합의 과정에서 여성, 청년, 비정규직 대표가 반발해 의결이 무산됐다. 결국 2019년 7월 경사노위 위원들이 전원 사퇴하고 두 달 뒤 새로 위원을 위촉한 뒤에야 탄력근로제 합의안을 의결할 수 있었다. 이에 사회적 대화가 정부의 정책적 수단으로 전락해 신뢰를 잃었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이번에 한국노총이 2015년 1월 이후 처음으로 사회적 대화 중단을 선언하면서 경사노위는 다시 위기를 맞았다.
● 제도보다 ‘대화 의지’가 중요
노동 전문가들은 한국처럼 노사 갈등이 심한 사회일수록 사회적 대화를 통해 서로 의견을 교환하고 갈등을 줄여나가는 과정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노사가 합의에 이르지 못해도 그 과정에서 서로 양보할 수 있는 부분이 어디까지인지를 확인하는 것만으로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지금처럼 정부가 전문가 중심으로 노동개혁을 주도하는 방식이 빠를 수는 있지만 그 과정에서 거센 반발에 직면해 오히려 더 큰 난관에 부딪힐 수 있다는 것이다. 올 3월 정부가 발표했다가 ‘주 69시간제 논란’에 휩싸인 근로시간 제도 개편안이 대표적이다.
최영기 한림대 객원교수(전 한국노동연구원장)는 “사회적 대화가 어렵다고 하는 건 반드시 합의를 도출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이라며 “위기 때는 과거 방식의 대타협이 필요하겠지만 평소에는 정책 협의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어 “노사가 서로 생각을 확인하고 합의에 실패했을 때는 각자 의견을 병기해 정부나 국회에 제출하는 것으로 사회적 대화의 역할은 충분하다”고 했다.
노동계의 대표성 문제는 국내 최대 노총인 한국노총의 위상을 인정하면서 의사결정에서 독점권을 행사하는 구조를 개선하는 방식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견해가 많다. 양대 노총의 조직률이 약 12%(2021년 기준)에 불과하지만 자발적으로 회비를 내는 노동자 245만 명을 보유한 유일한 세력이라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박지순 고려대 노동대학원장은 “이만큼 대표성을 갖춘 다른 조직을 찾기 힘든 현실을 고려해야 한다”면서 “그 대신 이를 보완해 취약계층 노동자의 목소리를 더 반영할 수 있는 논의 구조를 만드는 것이 과제”라고 했다. 한국노총이 불참을 선언할 경우 근로자위원 전원이 이탈하는 현재의 독점적 구조를 바꾸면 노총이 수시로 판을 깨고 나가는 관행도 개선될 것으로 기대된다.
전문가들은 현 사회적 대화의 틀이 완벽하진 않지만 중요한 것은 제도가 아닌 정부와 참여 주체들의 ‘의지’라고 강조했다. 최 교수는 “노동계와 경영계를 대표하는 단체들이 조직력이 부족한 상황에서 대통령의 강한 의지 없이는 사회적 대화가 이뤄지기 어렵다”며 “대통령이 먼저 노동계를 대화 상대로 인정하고 사회적 대화를 하자고 나서야 한다”고 했다.
주애진 정책사회부 기자 jaj@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