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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과 내일/이철희]국정원 인사파동, ‘제1고객’의 책임은 없나

입력 | 2023-06-28 23:48:00

정보전과 막후외교 활약하는 美 CIA 국장
유례없는 파열음에 흔들리는 韓 NIS 원장



이철희 논설위원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취임 직후 중앙정보국(CIA) 국장으로 33년 외교관 경력의 윌리엄 번스 전 국무부 부장관을 임명했을 때 미국 언론은 70년 전 외교관 출신 첫 민간인이자 역대 최장수 CIA 국장을 지낸 앨런 덜레스에 비유했다.

덜레스는 그의 형 존 포스터 덜레스 국무장관과 함께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행정부의 대외정책을 쥐락펴락한 인물이다. CIA의 규모와 역할을 크게 확장시키며 미소 냉전체제의 뼈대를 구축했다. 덜레스 시대는 제3세계 쿠데타 조종과 암살 음모 같은 CIA 역사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던 ‘비밀공작의 황금기’이기도 했다.

바이든의 번스 기용은 신냉전 기류에 휩싸인 국제질서 격변기에 외교와 정보를 효율적으로 결합해 세계에 ‘미국의 복귀’를 알리겠다는 구상으로 받아들여졌다. 번스는 일찍이 이란 핵합의를 위한 오랜 비밀접촉을 이끌어 ‘비밀외교무기(secret diplomacy weapon)’라는 찬사를 들었던 인물이다. 당파로 갈라진 상원도 번스 인준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그런 기대에 부응하듯 번스도 굵직한 이슈의 현장마다 그 흔적을 남겼다. 특히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석 달 전 모스크바를 방문해 바이든의 경고 메시지를 전했고, 이후 동맹과의 정보 공유를 통한 반(反)러시아 전선 구축과 러시아발 가짜 정보를 선제적으로 무력화하는 성공적인 정보전을 폈다. 최근 미중 간 소통의 물꼬를 트기 위한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의 중국 방문에 앞서 비밀리에 베이징을 다녀간 이도 번스였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해 김규현 전 외교부 차관을 새 정부 첫 국가정보원장으로 발탁한 것도 번스의 사례와 비슷해 보인다. 윤 대통령은 김 원장에 대해 “30여 년간 외교안보 분야에서 핵심적 역할을 해온, 국제적 안목을 가진 전문가”라고 강조했다.

김 원장 이전에도 외교관 출신 정보 수장이 있었다. 노신영 국가안전기획부장과 이병기 국정원장. 특히 노신영은 외무부 장관 출신으로 중앙정보부와 안기부 역사상 최초의 문민 수장이었고 이후 국무총리를 지내 전두환 대통령의 후계자 반열에까지 올랐다. 서슬 퍼런 군사정권 아래서 그 한계는 분명했지만 권력자의 신임을 얻어낸 가히 독보적 인물이었다.

김 원장 기용에 대해서도 확실한 일처리, 원만한 대인관계, 철저한 자기관리 등 호의적 반응 일색이었고 부정적인 얘기는 들리지 않았다. 국정원 고위직에 대한 전면 물갈이가 단행되고 전직 국정원장 두 명에 대한 고발까지 이뤄졌지만 ‘정권이 바뀌니 또 그러나’라는 곱지 않은 시각 속에서도 김 원장을 직접 겨냥하는 이들은 없었다.

그랬던 김규현 체제에 최근 파열음이 요란하다. 윤 대통령이 재가까지 마친 국정원 1급 인사를 닷새 만에 번복한 것은 유례없는 사태다. 김 원장 측근이 인사를 전횡했다는 논란에 휩싸이면서 그의 리더십은 깊은 상처를 입었다. 더욱이 대통령의 신뢰에 의문이 제기되면서 거취를 놓고 입방아에 오르는 처지에 놓였다.

이르면 오늘 발표될 장차관 인사에 김 원장 교체는 포함되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고 김 원장에 대한 재신임은 아닌 듯하다. “리더십에 문제가 있긴 하지만 조직 안정이 우선이다” “향후 인사 가능성은 어느 조직에나 열려 있지 않느냐”는 얘기가 대통령실에서 심심찮게 나오는 마당이다.

사실 이번 인사 파동을 놓고선 정권교체기 물갈이를 둘러싼 내부 반발을 넘어 자기 사람을 심기 위한 새 권력 내부의 파워게임 양상이라는 관측이 많다. 국정원장이 최측근에 휘둘렸다면 그 자체로 큰 문제가 있는 것은 확실하지만, 그렇다고 외부 입김에 핵심 안보기구 수장의 입지가 흔들린다면 그건 임명권자이자 ‘제1 고객’인 대통령의 책임일 것이다.




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