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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소녀, 내일은 광대… 우리는 매일 다른 욕망속에 산다

입력 | 2023-07-03 03:00:00

에스파스 루이비통 ‘온스테이지’서, 美 현대사진 예술가 신디 셔먼展
스스로 여러 정체성으로 분장-연출, 1970년대부터 활발히 작업하며
폭발적인 자기표현의 시대 예고해
수많은 얼굴들, 현대인 욕망 반영… “고정된 성 정체성 해체” 해석도




신디 셔먼이 세계적 작가로 이름을 알리게 된 ‘무제 필름 스틸’ 시리즈 중 하나인 1979년 작품 ‘무제(우는 여자)’. 영화 속 전형적인 여성의 모습을 작가가 주인공이 돼 연출했다. 에스파스 루이비통 서울 제공

술잔을 앞에 두고 한 손에는 담배를 쥔 여자가 눈물을 흘리고 있다. 짧은 금발 머리 여자의 진한 눈 화장, 옷깃과 소매에 있는 호피 무늬는 그녀가 애타게 갈망했던 무언가를 상징한다. 그러나 그것이 무너진 듯 화장은 눈물로 다 번지고, 여자는 허탈하게 허공을 응시하고 있다.

미국 예술가 신디 셔먼(69)을 세상에 알린 시리즈 ‘무제 필름 스틸’ 중 하나인 1979년 작 ‘무제(우는 여자)’ 이야기다. 이 작품을 비롯해 루이비통 재단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셔먼의 작품 10여 점이 한국을 찾았다. 9월 17일까지 서울 강남구 에스파스 루이비통에서 열리는 ‘온 스테이지-파트Ⅱ’전에선 현대 사진 예술을 대표하는 작가 셔먼의 초기작부터 루이비통 미술관에서 처음 공개되는 그의 최신작까지 골고루 만나 볼 수 있다.





● 오늘은 소녀, 내일은 광대

그는 이후 ‘광대’(무제#411, 2003년·가운데 사진)나 ‘연약한 여성’(무제#107, 1982년) 등으로 다양하게 변신한 자신을 사진으로 남기며 정체성을 탐구해 갔다. 에스파스 루이비통 서울 제공

전시의 문을 여는 작품 ‘무제’(1979년)를 비롯한 ‘무제 필름 스틸’(1977∼1980년) 시리즈는 1950, 60년대 미국 할리우드 영화 속 전형적인 여성상을 흑백 사진에 담고 있다. 셔먼이 직접 주인공이 되어 가발, 의상, 화장을 비롯해 공간 등 모든 것을 연출해 표현한 것이 특징이다. 여러 작품 속에서 그녀는 주부, 비서 등 다양한 직업을 비롯해 눈물을 흘리고 거울을 보는 등 영화의 한 장면 같은 모습을 연출했다.

셔먼은 어릴 때부터 스스로 분장하는 것을 즐겼고, 대학교 재학 중에도 파티 때마다 분장을 하고 등장했다. 그의 연인이자 동료 작가인 로버트 롱고(70)가 이를 사진에 담아 보라고 조언했고, 그 결과 ‘무제 필름 스틸’ 시리즈가 탄생했다.

그 다음으로는 셔먼이 패션 화보를 재해석한 작품들이 이어진다. 1982년 작품 ‘핑크 로브’는 셔먼이 누드모델을 연기한 모습을 담았다. 분홍색 담요를 끌어안고 있는 그는 연약한 소녀를 연상케 하지만, 2003년 작품 ‘광대’에서는 원래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분장을 하고 우스꽝스럽게 연출했다. 미술사 거장의 작품에 등장하는 역사적 인물을 패러디한 시리즈 ‘역사 인물화’(1989∼1990년)와 최신 시리즈인 ‘남성’(2019∼2020년) 연작 중 한 작품도 볼 수 있다.





● 욕망 속에 사는 현대인 단면 증언

종잡을 수 없을 정도로 자신의 수많은 다른 얼굴을 보여주는 작업은 매일 다른 욕망 속에 살아가는 현대인을 담은 것으로 평가받는다. 1970∼90년대 작업은 오늘날 인스타그램과 같은 소셜미디어에서 폭발적으로 쏟아지는 전 세계 사람들의 자기 표현을 예고했다. 누구나 소셜미디어를 통해 미식가, 여행자 등 자신의 다양한 면모를 뽐내는 시대를 앞서 보여준 것이다. 또 남성으로 분장하거나, 여성의 무수히 다채로운 모습을 보여주면서 사회적으로 규정된 남성성, 여성성을 해체하고 개인의 정체성을 탐구했다는 해석도 나온다.

그의 ‘센터폴드’ 연작 중 한 작품인 ‘무제#96’은 2011년 경매에서 당시 사진 작품으로는 최고가인 389만 달러(약 51억 원)에 낙찰됐다. 2012년 뉴욕현대미술관(MoMA)과 샌프란시스코 현대미술관, 2016년 로스앤젤레스 더 브로드 미술관, 2019년 영국 국립 초상화미술관과 밴쿠버 아트 갤러리에서는 그의 회고전이 각각 열렸다. 전시는 무료.




김민 기자 kimmi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