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유아부터 사교육 굴레]〈1〉 ‘취학 전 필수’ 된 사교육 초1 학부모 88% “취학 직전 사교육” ‘年 600만원 이상 지출’ 10% 달해… “어릴때부터 의존, 공교육 약화” 지적 사교육 카르텔-부조리 261건 신고… 강사-수능 출제진 유착의혹 수사의뢰
서울 성동구에서 두 자녀를 키우는 김모 씨(36)의 6세 첫째 아들은 이른바 ‘영유(영어유치원)’로 불리는 유아 대상 영어학원을 다닌다. 월 기본 수업료는 약 170만 원. 방과 후 과정으로 코딩, 국어(논술) 수업 등을 추가하면 200만 원이 넘는다. ‘줄넘기 학원’도 일주일에 두 번 간다. 추가로 ‘미술학원’을 목요일마다 다닌다. 2년 전부터는 주 1회 방문교사가 일대일로 지도해주는 홈스쿨링 학습지도 받아보고 있다. 첫째 아들 사교육비로 매달 약 310만 원이 나간다.
동아일보는 국회 교육위원회 소속 강득구 더불어민주당 의원실, 교육 시민단체 ‘사교육걱정없는세상’(사걱세)과 함께 초1 자녀를 둔 전국의 학부모 1만1000명을 대상으로 5월 16∼29일 설문조사를 했다. 그 결과 88%(9679명)가 “초등학교 입학 직전(6세) 1년간 자녀에게 사교육을 시켰다”고 답했다. 응답자의 49.2%(5408명)는 “1년간 3개 이상의 사교육을 시켰다”고 밝혔다.
올해 전국 4년제 대학의 한 학기(6개월 치) 평균 등록금은 약 339만 원이다. 김 씨가 첫째 아들 학원비로 매달 지출하는 310만 원보다 불과 29만 원 많다. 등하원 도우미 비용까지 포함하면 맞벌이인 김 씨가 버는 돈은 대부분 첫째 교육비, 돌봄비로 나간다. 김 씨는 “주변에서도 대부분 이 정도는 다 한다고 하니까 우리도 따라가지 않을 수가 없다. 초등학교 적응에도 도움이 될 것 같아 무리인 걸 알지만 시킨다”고 말했다. 김 씨는 둘째 아들(3)도 ‘영유’에 보내는 것을 고민 중이다.
최근 정부는 ‘사교육 이권 카르텔’과의 전쟁에 나섰다. 하지만 대부분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 대비나 특수목적고(특목고) 대비 사교육에 치중해 있다. 취학 전 아동들이 처한 사교육의 실태는 상대적으로 관심에서 비켜나 있었다. 매년 통계청이 발표하는 사교육비 조사도 초중고교생만 집계한다.
전문가들은 “학생들이 영유아기부터 사교육 굴레에 빠지면서 초중고 내내 학원에 의존하고 공교육은 제 기능을 못 하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고 경고했다. 홍민정 사걱세 대표는 “영유아 시기에는 무조건 빨리 달리는 게 아니라, 발달 단계에 맞는 교육과 지원이 중요하다. 이 시기를 놓치면 영원히 뒤처질 것처럼 불안감을 조장하는 사교육 업계의 공포 마케팅에 휘둘려선 안 된다”고 말했다.
3일 교육부는 지난달 22일부터 이달 2일까지 사교육 카르텔·부조리 신고센터에 총 261건의 신고가 접수됐다고 발표했다. 자신이 가르치는 학원 학생들에게 “내가 수능 출제 관계자와 만났다”며 문제를 유출한 혐의를 받은 학원강사는 경찰에 수사 의뢰했다.
“내 아이만 뒤처질까 조바심”… 0~4세 15%가 국영수 사교육
사교육계 “두뇌 완성기” 불안 자극
석달에 200만원 영어 키즈카페도
“무리한 선행학습, 스트레스 유발
경쟁 부추기는 입시제도 바뀌어야”
2년 전 아들(당시 7세)을 서울의 유명 사립초에 입학시킨 최모 씨는 당시 첫 담임교사에게서 “왜 아이를 미리 영어 유치원에 보내지 않았느냐”는 면박을 들었다. 같은 반 친구들 상당수는 영어 유치원을 졸업했고, 일반 유치원을 나온 아이들은 영어 실력 때문에 그 사이에서 주눅 들 수 있다는 것이 교사의 설명이었다. 최 씨는 “마치 내가 나쁜 엄마가 된 것 같아 아이에게 너무 미안했다”며 “공교육이 이러니 부모들이 영어 유치원이나 한글 선행학습에 매달릴 수밖에 없지 않느냐”고 했다. 사립초뿐만 아니라 대다수 공립초에서도 사교육을 통해 선행학습을 받고 입학한 사례가 흔하다. 한 공립초 1학년 담임교사는 “한글을 안 떼고 오는 학생은 반에 1, 2명뿐이고, 수학도 진도를 앞서가는 아이들이 많다”고 말했다.석달에 200만원 영어 키즈카페도
“무리한 선행학습, 스트레스 유발
경쟁 부추기는 입시제도 바뀌어야”
● “재능개발-선행학습 위해” 사교육 택해
사교육 업계가 ‘유아기 두뇌 완성’ 등 광고로 부모들의 불안을 자극하면서, 사교육 시작 연령도 내려가는 추세다. 이번 조사에서 응답자의 15%가량은 “자녀가 다섯 살도 되기 전에 사교육을 시켰다”고 답했다. 0∼4세에 국어 사교육을 시작했다는 응답은 15.4%, 영어는 15.9%, 수학은 13.3%로 나타났다.
사교육의 형태도 점차 다양해지고 있다. 최근에는 회원제로 운영되는 ‘영어 키즈카페’도 성행 중이다. 주로 백화점에 입점하는 한 영어 키즈카페는 3개월(200만 원대)∼2년(1000만 원대) 단위로 회원을 모집한다. 원어민 교사와 일대일 학습이 가능하고, 독서와 미술 수업도 받을 수 있다고 홍보한다. 일반 키즈카페와 달리 부모는 입장할 수 없다. 명칭만 키즈카페일 뿐 사실상 사교육 시설인 셈이다.
● 전문가 “학습 취약해질 수도… 심리 문제까지”
전문가들은 아이들의 발달 단계를 무시한 사교육이 장기적으로는 학습 동기나 흥미를 떨어뜨릴 수 있다고 지적한다. 스트레스로 심리 상담을 받는 유아도 적지 않다. 한유미 호서대 유아교육과 교수는 “당장은 영어로 인사하고 셈을 잘하는 게 성과가 나타나는 것으로 보일 수 있지만 고교나 대학까지 그 격차가 유지될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며 “사교육 의존도가 높은 학생은 오히려 자기주도적 학습에 취약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초등생 때부터 대입에 ‘올인’하는 구조가 바뀌지 않는 한 영유아 사교육 열풍을 억누르긴 쉽지 않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견해다. 박창현 육아정책연구소 연구위원은 “‘경쟁에서 이기는 아이를 키우겠다’는 부모들의 태도가 변하려면 입시제도와 초중고 공교육부터 바뀌어야 한다”고 말했다. 강 의원은 “교육의 출발선인 영유아 단계부터 시작되는 사교육은 부모의 경제 수준에 따른 교육 불평등을 초래하고 있다”며 “한글도 못 뗀 아이들부터 시작되는 선행학습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고 말했다.
박성민 기자 mi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