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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을 구한 맥아더의 집념, 인천상륙작전[정전 70년, 끝나지 않은 6·25]

입력 | 2023-07-05 11:00:00

[8회]






동아일보 산하 화정평화재단은 정전(停戰) 70주년을 맞아 6·25 전쟁 3년을 재조명하는 기획 ‘정전 70년, 끝나지 않은 6·25’를 연재합니다. 아픈 과거를 되풀이하지 말자는 취지로 회고록과 연구자료를 바탕으로 전쟁을 통해 각국이 추구했던 목표의 허실을 조망하고 아울러 전국에 산재한 6·25 격전 현장을 찾아 당시 격전 상황도 재구성합니다.

 인천 옹진군 영흥도의 해군 전적비에 해군과 대한청년단 방위대원 전사자 14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데 대부분 9월 14일과 15일 전사했다. 구자룡 화정평화재단 21세기평화연구소장

대부도와 선재도를 지나 도착하는 영흥도는 시화방조제로 직선 도로가 뚫렸어도 인천항에서 자동차로 1시간 20분 가량 걸리는 곳. 여기에 세워진 ‘해군 영흥도 전적비’ 아래에는 임병래 중위 등 해군 8명과 대한청년단방위대원 6명 전사자 명단이 화강암에 새겨져 있다. 눈길을 끈 것은 이들의 사망 날짜. 1950년 9월 14일과 15일, 인천상륙작전 전날과 당일이다. 맥아더가 이끄는 미 10군단 주도의 유엔군 인천상륙작전이 순조롭게 이뤄진데는 한국 해군과 민간인 청년 대원들이 희생을 무릎쓰고 인천 앞바다 길을 열어 놓은 것도 큰 기여를 했음을 보여준다.

인천 웅진군 영흥도에 세워진 ‘해군 영흥도 전적비’.  구자룡 화정평화재단 21세기평화연구소장



 ● 상륙전 인천 앞바다 정지 작업과 양동 작전 
영흥도는 인천항으로 가는 유일한 해로인 비어수로(飛魚水路)의 입구에 있는 전략적 요충지. 상륙작전을 앞두고 해군은 8월 18일과 20일 덕적도와 영흥도를 차례로 탈환했다. 적 40명을 사살하고 100여명을 포로로 잡는 과정에 아군도 4명이 전사했다. 이중 박동진 중사의 이름을 딴 유도탄 고속정도 진수됐다.

미군 유진 클라크 대위가 이끄는 ‘클라크 첩보대’는 9월 1일부터 영흥도를 거점으로 청년단을 조직하고 켈로(KLO) 부대와 함께 월미도, 인천 및 서울 시내까지 대원을 파견해 북한군의 해안포대 수량 및 배치, 북한군 병력 상황 등을 파악하는 ‘x-ray 작전’을 수행했다. 그런데 상륙작전 직전인 14일 북한군 1개 대대 규모 병력이 영흥도를 기습했다. 소수만 지키고 있다가 대부대의 공격을 받아 피해가 컸다. 임병래 소위와 홍시욱 대원은 다른 대원들이 피신할 시간을 벌기 위해 퇴각하지 않고 남아 적과 맞섰다. 둘만 남은 뒤 포로로 잡힐 경우 상륙작전 비밀이 노출되는 것을 막기 위해 남겨 두었던 총알로 자결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등대였던 인천 팔미도 등대로  오르는 길.  맥아더와 인천상륙작전에서 함포 사격을 하는 군함 대형 벽화가 그려져 있다. 구자룡 화정평화재단 21세기평화연구소장

클라크 첩보대와 KLO 부대는 상륙작전 전날 비어수로를 비추는 팔미도 등대를 확보하는 ‘트루디 잭슨 작전’을 무난히 수행해 15일 0시 30분 등대를 점화했다. 상륙작전을 시작하라는 ‘봉화’를 올렸다.

1903년 세워진 우리나라 최초의 팔미도 등대(왼쪽), 100주년인 2003년 퇴역했다. 인천상륙작전 때는 상륙함대가 진입하는 비어수로를 비췄다.  우측은 신축 등대.  구자룡 화정평화재단 21세기평화연구소장

맥아더는 상륙 사흘전인 12일 미영(美英) 혼성 부대가 군산에서 소규모 상륙작전을 벌이도록 했다. 하루 전날에는 삼척에서 함포 사격을 실시했다. 상륙 당일에는 포항 북쪽 낙동강 방어선의 북한군 뒤편 장사동에서 ‘명작전’으로 불리는 학도병 주도의 상륙 양동작전을 벌였다.

하늘에서 드론 촬영한 인천자유공원의 맥아더 동상. 멀리 인천항과 앞바다를 내려다 보고 있다. 인천 = 홍진환 기자  



● 상륙작전보다 더 어려웠던 내부 설득 
인천상륙작전을 앞두고 8월 23일 도쿄에서 열린 전략회의가 열렸다. 맥아더는 콜린즈 육군참모총장 등 다른 참석자들은 “토의가 아니라 계획을 포기하도록 설득하려고 했다”고 회고했다(맥아더, 189쪽)

해군은 조수와 지형이 상륙에 위험하다, 썰물 때는 과거 수백년간 황해에서 밀려와 쌓인 진흙이 부두에서 2마일까지 뻗쳐 있다. 비어수로는 조수가 6노트 속력으로 드나든다. 기뢰를 부설하기 좋고, 취약 지점에 배가 침몰하면 다른 배가 통과하기 힘들다. 수륙양용부대가 월미도를 2시간 이내에 무력화해야 한다. 오후 밀물 이후에는 밤을 보낼 교두보를 확보해 다음날까지 견뎌야 한다. 반대하는 이유가 끝이 없었다.
육군은 현재 전투지역에서 너무 멀다. 낙동강 방어선에서 제1 해병 여단을 빼면 방어선이 위태로워진다. 서울을 탈환해도 미 8군과 연계되기 어려워 상륙부대가 고립될 수 있다. 차라리 군산으로 상륙하자. 맥아더는 “인천으로 하지 않으려면 다른 사령관을 임명하라”고 버텼다.

인천 연수구의 인천상륙작전 기념관 입구. 왼쪽 나무는 ‘맥아더 장군 나무’로 명명됐다.  구자룡 화정평화재단 21세기평화연구소장

맥아더의 비서 로우니는 “맥아더는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후 벌어졌던 세계 역사상의 주요 전쟁에 대해 6시간 동안 열변을 토하며 인천상륙 작전의 필요와 성공 가능성을 설득해 동의를 받아냈다”고 했다. 그는 회의 후 참모들에게 “인천상륙작전은 세계 역사를 통틀어도 22번째 위대한 전투로 남을 것”이라고 했다.(로우니, 58쪽)

맥아더는 “북한도 인천상륙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오히려 기습을 해야 한다. 군산은 상륙해도 방어선 좌측에 병력을 조금 보태는 의미밖에 없다. 인천을 거쳐 서울을 점령해야 적의 보급로를 끊는다”고 주장했다.

“인천상륙작전이 아니면 희생을 내는 전투를 무한정 계속해야 한다. 여러분은 장병들을 도살장 소처럼 피비린내나는 방위선에 두기 원하는가? 이 순간에도 운명의 초침이 똑딱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지금 행동하지 않으면 우리 앞에는 죽음이 있을 뿐이다. 상륙작전은 반드시 성공하고, 10만의 생명을 구할 것이다.”(맥아더, 195쪽)

인천 연수구 인천상륙작전 기념관의 ‘자유 수호의 탑’.  구자룡 화정평화재단 21세기평화연구소장



● 인천, 상륙에 불리한 요소 다 갖춰 ‘성공 확률 5000분의 1’    
인천 앞바다 조수 간만의 차는 9m로 캐나다 펀디만의 20m를 제외하면 가장 크다. 간조시 개펄이 최대 4km여서 때를 못맞추면 개펄 수렁에 빠진다. 바닷가 모래사장은 없고 오히려 높은 방파제로 둘러져 있다. 해안 상륙이라지만 모래사장을 건너는 것이 아니라 사다리를 놓고 올라가는 ‘공성전’ 같아서 인천은 방어에 절대적으로 유리한 지형이었다. 상륙작전을 위해 ‘적색해안’으로 이름붙인 인천항에 상륙하는 해병대가 일본에서 제작해 가지고 온 알루미늄 사다리를 놓고 올라가는 모습이 상징적인 장면이 됐다.

인천상륙작전 기념관 외부에 조성된 ‘해벽을 넘어 상륙하는 미 해병대’ 조각상.  구자룡 화정평화재단 21세기평화연구소장

인천항으로 접근하는 해로는 비어수로 한 곳이어서 해안포나 기뢰의 표적이 되기 쉬웠다. 북한군 전차와 병력 2만 명 가량이 주둔해 있던 서울에서 인천은 30km 가량에 불과해 5,6시간이면 도달할 수 있었다. 밀물은 12시간 간격이 있어 후속 부대가 오기전까지 첫 상륙 부대는 홀로 버터야 한다. 미 극동해군사령관 찰스 터너 조이 제독은 “해군 작전상 모든 지리적 핸디캡을 갖추고 있어 성공 확률은 5천분의 1”이라며 인천 상륙에 반대했다.

인천 월미도 진입로에 인천상륙작전 ‘적색해안 상륙지점’이 표시되어 있다.  구자룡 화정평화재단 21세기평화연구소장

 월미도로 가는 진입로에  세워진 ‘맥아더 길’ 표지석 . 구자룡 화정평화재단 21세기평화연구소장



● 상륙작전의 맹장 맥아더, 작전명 ‘크로마이트’
인천상륙작전 작전명 ‘크로마이트’는 보안을 위해 군사 작전을 전혀 연상시키지 않는 크롬 광석에서 따왔다. 상륙작전으로 ‘100-A’(낙동강 반격 후 군산 상륙), ‘100-B’(인천), ‘100-C’(군산), ‘100-D’(인천 상륙 후 주문진 추가 상륙) 등이 검토되었으나 맥아더의 집념과 판단으로 ‘100-B’로 결정됐다. 조수 간만의 차가 큰 인천에서 상륙이 가능한 날짜는 9월 15일, 10월 11일, 11월 3일 세 날을 전후한 2,3일. 낙동강 방어선 전황이 급박해 가급적 빨리 결행해야 했던 것도 9월 15일로 낙점한 이유 중 하나다. 7월 21일 미 육군 7사단과 제1 해병사단이 상륙부대로 선발돼 10군단이 구성됐다. 한국군은 해병 1연대와 육군 17연대가 각각 미 해병 1사단과 7사단에 배속돼 상륙작전에 참가했다.

인천상륙작전 참가 부대


함정(척)
상륙부대
미군
226
10군단(제1 해병사단과 7사단)
국군
15
제1 해병 연대, 국군 제 17연대
연합함대
20
영국 프랑스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등 참가
합계
261
약 4만명 (해공군 포함시 7만5000명)

인천자유공원의 맥아더 장군 동상. 인천 = 홍진환 기자 

맥아더는 전쟁 발발 직후인 6월 29일 한강 방어선을 시찰하고 돌아간 뒤 7월 4일 사령부에 인천상륙을 위한 ‘블루하츠(BLUE HEARTS)’ 계획을 수립하도록 지시했다. 7월 22일 상륙 예정으로 검토됐다. 그런데 북한군 남진 속도가 너무 빨라 7월 8일 중단을 지시했다.(이상호, 180쪽)

맥아더는 태평양 전쟁에서 많은 섬들을 공략하면서 ‘아일랜드 호핑(island hopping·섬 건너뛰기)’ 방식으로 상륙 작전에 성공한 것이 50여회에 이르는 ‘상륙작전의 귀재’였다. 방어가 강한 섬은 건너 뛰고 방어가 약한 섬을 공략해 일본의 보급선을 차단하는 것이다.

맥아더는 1945년 9월 일본군을 무장해제하기 위해 인천항으로 들어 올 때도 대부대를 인천에 상륙시킨 경험이 있다. 1950년 봄에는 주일 미군에 대해 일본 열도에서 대대급까지 상륙훈련을 시킨 적도 있다. 이런 다양한 상륙작전 지휘 경험이 6·25 전쟁의 전세를 일거에 뒤집는 역사적인 상륙작전을 성공시키는 밑거름이 됐다. 치밀한 육상과 항공 정찰을 통한 북한군의 동향 파악도 있었다.


9월 15일 ‘그날 하루’00:30 팔미도 등대 점화
02:00 유엔군 함포사격
06:33 미 제1 해병사단 5연대 3대대 150명 월미도 상륙
06:55 월미산 정상 탈환
08:00 월미도 장악
17:30 미 해병 1사단 5연대와 1연대, 인천항 적색해안과 녹색해안 상륙
20:00 인천 탈환

● “월미산 높이가 2~3m 낮아졌다” 맹폭 후 전격적인 상륙  
해발 108m 월미도는 인천항을 둘로 나누며 내려다보고 있어 상륙작전을 위해서는 반드시 제압해야 했다. 월미도에는 북한 제226 육전대 소속 1개 대대 500명 가량이 월미산 정상 송신소 인근에 주둔해 있었다.

 ‘그날을 기억하는 나무’. 월미산 공원에는 인천상륙작전 당시 포격에서 살아남은 나무 중 7그루를 ‘평화의 나무’로 선정해 보호하고 있다.  구자룡 화정평화재단 21세기평화연구소장

팔미도 등대가 켜진 뒤 새벽 2시 미군은 월미도에 일제히 함포 사격을 가했다. 맥아더는 마운트 맥킨리호 함상에서 작전을 직접 지휘했다. 15일 오전 6시 33분 함포 사격이 멈춘 뒤 미 제1 해병사단 5연대 3대대 대원 150명이 월미도 북쪽 ‘녹색해안’에 상륙했다. 상륙 순간부터는 피아가 섞여 포격 지원을 받을 수 없기 때문에 휴대 장비와 무기만으로 전투를 벌여야 했다. 같이 상륙한 M-26 전차 9대의 지원하에 월미산 정상을 점령한 것은 상륙 20여분 만인 6시 55분이었다. 이어 오전 8시 월미도를 완전 장악했다.

인천 시민들의 휴식 공간으로 돌아온 월미산 정상.  작은 안내판만이 이곳이 인천상륙작전 당시 핵심 고지였음을 알게 한다. 구자룡 화정평화재단 21세기평화연구소장

같은 날 오후 5시 반 밀물 시간에 미 해병대가 현재 대한제분 앞 방파제 부근 ‘적색 해안’과 남쪽의 ‘청색 해안’에 상륙했다. 미군은 인천 시내를 남북으로 진격하면서 참호를 파고 주둔하고 있는 북한군을 고립시켰다. 이날 오후 8시 인천을 탈환했고 이튿날 오전 일찍 대부분의 북한군은 투항하거나 인천에서 철수했다. 역사적인 인천상륙작전은 단 하루 만에 성공을 거두었다. 아군 인명 피해는 전사 21명, 실종 1명, 부상 174명으로 예상의 20% 수준이었다고 한다. 15일 해병 제1사단이 상륙한 다음날부터 미 7사단이 뭍으로 올라왔다.

앞서 인천상륙을 위해 모두 261척의 군함이 일본 요코하마 사세보 고베 그리고 부산 등에서 출발했다. 부산에서 출발한 한국 해병 17연대 장교는 출발할 때까지도 어디로 가는지 몰랐다고 했다.



● 인천 탈환에는 하루, 서울 탈환에는 13일 

북한군은 인천을 하루 만에 내주었으나 서울 방어에는 총력을 기울였다. 인천으로 상륙한 미 7사단이 경인 남쪽 공격에 투입됐다. 인천에서 허를 찔린 사실은 낙동강의 북한군에도 전해져 18일부터 본격적으로 붕괴되기 시작했다. “38선까지 후퇴하라”는 명령도 내려졌다. 9월 26일 상륙부대 미 10군단과 낙동강에서 올라온 미 8군이 ‘초전 죽미령 전투’가 있었던 경기도 오산에서 랑데뷰했다.

서울 마포구 연희동 ‘해병대 104고지 전적비’.  서울 시내에서는 드문 전투 전적비다. 구자룡 화정평화재단 21세기평화연구소장

서울 방어에 인민군은 2만 여명이 투입됐는데 연희 104고지 전투가 고비였다. 하루 밤에도 2,3차례 뺏고 뺏기는 백병전이 벌어졌다. ‘연희 104고지’는 서울 시내에서는 드물게 6·25 전적비가 세워진 곳이다. 9월 28일 서울 수복은 기습 남침으로 뺏긴지 3개월 여 만이었다. 29일 오전 10시 맥아더 사령관이 김포비행장에 도착해 정오 중앙청 앞에서 이승만 대통령에게 “서울을 돌려드린다”는 연설을 했다.


● 북한, 몰랐나 알고도 당했나  
북한군에는 8월 26일 상륙작전 대비 지시가 내려왔다. ‘인천 방어지구 사령부’가 마련돼 9월 15일까지 방어 준비를 마치라는 것이었다. 월미도와 인천 항구에 포대도 설치됐다. 하지만 막강한 화력을 당해내지 못했다. 북한군은 낙동강 방어선에 집중하고 있는데다 보급선도 길어져 다른 지역 상륙작전에 대비할 여력이 없었다는 분석이 많다.

중국은 개전 초기부터 후방 상륙작전을 경계하도록 북한에 조언하면서 인천과 원산을 지목했다.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의 비서 레이잉푸(雷英夫)는 8월 초 일본에 파견돼 상륙작전에 관한 정보를 수집했다. 그는 미군 부대가 상륙작전 훈련을 받고 있으며 일본 항구마다 미국과 세계 각 지에서 온 선박들로 붐빈다는 것을 확인했다. 레이잉푸가 맥아더가 인천을 선택할 확률이 높다고 보고한 것이 8월 23일이었다. 마오쩌둥(毛澤東)은 김일성에게도 전달했으나 인천항 폭파 등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핼버스탬, 462쪽)

북한의 ‘조국해방 전쟁사’에서 김일성은 인천을 점령했을 때부터 상륙작전을 예상하고 7월에는 방어를 강화하라고 했으나 조치가 이뤄지지 않았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는 김일성이 책임을 밑에 떠넘기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는 분석이다.(이상호, 187〜9쪽)


● 인천상륙작전은 얼마나 공개된 작전인가 
도쿄에서 맥아더 사령부를 취재하는 기자들 사이에서 인천상륙작전은 (언제 실행되는 지는 정해지지 않았지만 언제가 할 것으로 예상한) ‘누구나 아는 작전’이라는 별명이 붙었다고 한다.(히긴스, 188쪽)

프란체스카 여사는 상륙작전 보안이 허술했다고 지적했다. “미 8군에 들어갔던 우리 경관 한 명이 미군 병사와 대화했는데 글쎄 이 병사 말이 ‘전쟁에 대해선 걱정 말아라. 2주일 내에 우리가 상륙작전을 벌여 공수부대로 적의 배후를 치게 된다’고 하더라는 것이다.”(프란체스카 일기, 9월 6일자)

애치슨 국무장관은 “인천상륙작전이 일본에서는 ‘상식 작전(Operation Common Knowledge)’이라는 별명으로 불렸고 사전에 정보가 누출됐는데 다행히 북한에는 전해지지 않았다”고 했다.(애치슨, 580쪽).

“비밀이 유지된 것은 새로운 병력배치를 목격하고 그 이유를 추측할 수 있었던 일선 종군기자들과 고국에 있는 편집자들이 군의 전략 수행에 적극적으로 협력한 덕분이었다.” 맥아더는 도쿄의 기자들이 인천상륙작전을 알고 있었지만 보도하지 않고 도와줬다고 했다. 공격 개시 1주일전 마스터 플랜의 세부가 완성되어 있었는데 대규모 작전을 수행하려면 사전에 비밀이 누설될 가능성도 있었다는 것이다. 기자들은 상륙작전에서 사용된 알루미늄 사다리 제작 의뢰만 보고도 인천을 예상할 수 있었지만 보안을 지켰다고 한다.(맥아더, 195쪽)



맥아더와 대선 출마“맥아더는 대통령이 되려고 5000 대 1의 기적이 필요하단 말입니다.”

영화 ‘인천상륙작전’에는 미군이 인천으로 상륙할 지를 두고 북한 군부와 도쿄의 맥아더사령부에서 각각 논란을 벌이는 장면이 나온다. 공통점은 맥아더가 인천 상륙을 고집하는 목적이 대선 출마 때문이라는 것이다.

영화속 북한군 인천지구사령관은 “미제는 성공 확률 5000분의 1로 생각하지만, 확률이 적은 인천으로 왜 오나. 바로 맥아더 그 늙은이가 영웅으로 남고 싶어서다. 맥아더는 대통령이 되려고 5000 대 1의 기적이 필요한 것이다.”

도쿄의 맥아더사령부에 모인 미 고위 인사들도 인천상륙 작전을 반대하면서 맥아더의 대선 출마를 거론한다. “맥아더는 사다리와 등대가 있으니 상륙작전 걱정이 없다고 한다. 인천을 노르망디 삼아서 대권에 도전하려는 거요!”

‘사다리’는 인천항구가 절벽이 높아 사다리가 필요했는데 일본에서 제작한 사다리를 놓고 올라가면 된다고 한 것을 비꼰 것이다.

맥아더는 1944년 공화당 대선 예비경선에 이름을 올린 적이 있다. 민주당 출신 루즈벨트 대통령을 싫어한 공화당 일부에서 출마를 권유했다. 그는 네브래스카주 공화당 의원 아서 밀러와 주고 받은 편지가 밀러에 의해 공개되면서 경선에서 중도 하차했다. 편지에는 아서가 “미국에서 자행되는 독재가 사람들의 권리를 파괴할 것입니다”라는 내용이 있다. 맥아더는 “미국의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의원님의 현실 인식이 진정한 애국자들을 일깨우는 귀감이 될 것입니다”라고 화답했다. 현직 육군대장이 군 최고통수권자를 향해 ‘독재’라고 하는 말에 맞장구를 친 것이다.

앞서 맥아더는 필리핀 근무 시절 자신의 참모를 지냈던 아이젠하워 육군참모총장이 1946년 5월 도쿄를 방문했을 때 아이젠하워에게 차기 대선 출마를 권유했다. 아이젠하워도 맥아더에게 출마를 권유하자 “나이가 많다”고 고사했다. 그러면서도 1947년 자신을 추종하는 사람들에게는 ‘제안이 오면 수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핼버스탬, 186쪽)

맥아더의 ‘크리스마스 대공세’ 작전 실패에도 대선 출마가 거론된다.

1950년 11월 ‘그리스마스 때까지 귀국!’이라는 구호가 맥아더라는 개인 광고효과를 극대화시키기 위해 고안됐다는 것이다. 미 대선(1952년 11월)을 앞두고 대통령 후보가 되겠다는 야심을 품고 있었다는 것이다.(웨인트라웁, 37쪽)

1950년 10월 트루먼과의 웨이크섬 회담 중에도 트루먼이 대선 출마 의향을 물었다. 맥아더가 정치적 야심이 있는지 떠보기 위한 것이었다.

“저는 추호도 그런 생각이 없습니다. 각하에 대항할 장군이 있다면, 그 이름은 아이젠하워지 맥아더는 아닙니다”라고 대답했다. 대통령은 웃으면서 개인적으로는 아이젠하워를 좋아한다고 대답하면서도 “아이젠하워는 정치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라. 아이젠하워가 대통령이 된다면 그랜트(남북전쟁 시의 북부군 총사령관)도 완전무결한 대통령의 견본이 될 수 있을 거야”라고 말했다.(맥아더, 215쪽). 트루먼이 아이젠하워에 대해 낮게 평가했지만 2년 후 차기 선거에서 아이젠하워가 공화당 후보로 당선돼 프랭클린 D. 루즈벨트 이후 20년 민주당 집권을 끝냈다.
참고 문헌

더글러스 맥아더 지음, 『맥아더 회고록』, 1, 2권, 일신서적, 1993.
데이비드 핼버스탬 지음, 정윤미 이은진 옮김, 『콜디스트 윈터』, 살림, 2009.
딘 애치슨, 『Present at the Creation』, Norton & Company Inc., 1969.
마거릿 히긴스 지음, 이현표 옮김, 『자유를 위한 희생』, 코러스, 2009.
에드워드 L. 로우니 지음, 정수영 옮김, 『운명의 1도』, 후아이엠, 2014.
스탠리 웨인트라웁 지음, 송승종 옮김, 『장진호 전투와 흥남 철수작전』, 북코리아, 2015.
이상호 지음, 『맥아더와 한국전쟁』, 푸른역사, 2012.
이승만 구술, 프란체스카 지음, 조혜자 옮김. 『프란체스카의 난중일기』, 기파랑, 2010.
구자룡 화정평화재단 21세기평화연구소장 bonh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