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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에서/유근형]“北에서 하는 방식인데”… 국격 깎아내리는 정당 현수막

입력 | 2023-07-05 00:06:00

유근형 사회부 차장


“남쪽으로 건너와서 이런 꼴을 볼 줄 몰랐다.”

북한에서 정치 선전물을 쓰는 일(특관원)을 했던 탈북자 A 씨는 최근 대한민국 곳곳을 뒤덮은 정당 현수막을 보면 기가 찬다고 했다. 북한에서나 보던 원색적 문구들을 곳곳에서 쉽게 볼 수 있다는 것이다. A 씨는 “평양에서나 하는 구식 선전·선동을 인터넷과 모바일 강국인 남한 정치인들이 왜 쓰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22대 총선을 280일 앞둔 대한민국은 그야말로 ‘현수막 공화국’이다. 올 5월 행정안전부의 ‘현수막 설치 가이드라인’이 나왔지만 거의 달라진 게 없다. 사거리와 횡단보도마다 덕지덕지 붙은 현수막에 시민들은 정신적 신체적 피해를 호소한다. 노골적 상대 비방이나 자기 홍보가 많아 아이들 보기에도 민망하다. “도대체 왜 이런 문구를 매일 보며 살아야 하느냐”며 분노를 토로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정당 민주주의를 강화하자는 취지로 시작된 정치 현수막 무제한 허용은 순기능을 상실한 지 오래다. 원색적 비방이 주를 이루는 문구는 오히려 시민들이 문제의 본질을 알기 어렵게 한다. 극단의 시각을 부각시켜 사회를 분열시킬 뿐이다. ‘전당대회 돈봉투 의혹’을 비꼰 ‘더불어 비리 비호당’, 윤석열 대통령의 수능 발언을 지적한 ‘대통령 때문에 못 살겠다!’ 등이 그렇다. 한 재선 의원은 “당에서 지역구에 문구를 하달하면 전국에 같은 문구가 걸리는데, 그러다 보니 풀뿌리 민주주의의 가치나 다양한 시각은 배제되기 일쑤”라고 했다.

정당 현수막이 여의도의 고인 물을 유지하는 측면도 있다. 현역 의원과 당협위원장(지역위원장)만 현수막을 게재할 수 있어 정치 신인에게 불리한 구조이기 때문이다.

지자체들도 현역 의원들의 심기를 거스를까 싶어 몸을 사린다. 실제로 경기 북부의 한 현역 의원은 홍보 현수막 수십 개를 지역에 도배했다. 게재 기한(15일)을 훌쩍 넘겨도 떼지 않자 정치 지망생들이 시청에 “단속에 나서 달라”고 요청했지만 공무원들은 “당사자에게 직접 전화하라”고 했다. 한 정치 지망생은 “행안부 지침에 따르면 정당 현수막은 정당 돈으로 해야 하는데, 현역 의원들이 정당법을 위반하며 개인 돈을 투입해 사전선거운동을 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A 씨는 “북한의 정치 선전물에서 체제의 모순이 극명하게 드러난다”고 했다. 예컨대 ‘일당백으로 뭉치자’라는 문구의 현수막이 걸리면 인민들은 “또 시작”이라며 두려워했다고 한다. 이후 인민반장 등 중간 간부들이 모여 실천 방안을 찾는다며 논의한 후 결국은 김치, 쌀, 옥수수 등 충성 물품들을 걷어가기 때문이다. A 씨는 “공개적으로는 쉬쉬해도 북에서도 가족이나 가까운 지인이 있는 자리에선 선전물을 욕하는 사람이 많았다”고 했다.

한국은 어떤가. 극단의 정치와 혐오를 부추기는 정당 현수막은 이미 국격을 심각하게 훼손하고 있다. 외국인 관광객들이 현수막 내용을 알게 되면 한국의 민주주의 수준에 감탄할까? 오히려 반대일 가능성이 높다. 오죽하면 전체주의에 신음하다가 건너온 탈북자마저 “신물 난다”고 하겠나. 늦었지만 이제라도 국회가 관련법 재개정에 나서야 한다.






유근형 사회부 차장 noel@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