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랜더쿠’는 한 가지 분야에 몰입해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 가는 ‘덕후’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자신이 가장 깊게 빠진 영역에서 나만의 브랜드를 만들어 내고, 커뮤니티를 형성해 자신과 비슷한 덕후들을 모으고, 돈 이상의 가치를 찾아 헤매는 이들의 이야기에 많은 관심 부탁합니다.
명품 시계에 관심이 없어도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봤을 브랜드, ‘롤렉스’에서 가장 유명한 모델은 ‘서브마리너 그린’이다. 물량도 많지 않아 백화점 ‘오픈런’ 대란을 일으켰다. 중고 플랫폼에 접속해 보니 리셀가는 2300만 원 정도. 심지어 최근 중고 시세가 주춤해서 이 정도다. 지난해에는 3800만 원까지 리셀가가 치솟기도 했다. 발매가는 1300만 원인 것을 감안하면 못해도 천만 원은 오른 것이다.
스마트 워치가 보편화된 시대, 아날로그 시계의 인기가 시들해졌을 거라 생각하기 쉽지만 오히려 고급 시계 산업은 계속해서 성장하고 있다. 보스턴컨설팅그룹(BCG)의 최근 자료에 따르면, 2021년 750억 달러(약 99조 원)이었던 글로벌 명품 시계 시장 규모가 지난해에는 790억 달러(약 104조 원)로 커졌다. 이중 신제품 시장은 550억 달러, 중고품(리셀)은 240억 달러 규모였다. 하이엔드급 럭셔리 시계에 대한 수요는 많아지는 반면 공급은 부족한 상황이다. 이제 시계는 시간을 확인하는 것, 그 이상의 가치를 지닌다.
롤렉스의 서브마리너 그린 116610LV(구형, 통칭 헐크)와 126610LV(신형, 통칭 스타벅스)_출처 : 롤렉스
소비를 통해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는 시대, 시계는 여전히 패션 혹은 지위의 상징 역할을 하며 인기를 끌고 있다. 실제로 국내에도 시계 덕후들이 꽤 있다. 이들은 온라인 커뮤니티에 ‘새로운 아이를 데려왔다’며 시계 착용샷을 자랑하거나 하이엔드 시계에 사용된 부품을 분석하며 각자의 ‘드림워치’를 꿈꾼다. 그리고 이런 시계 덕후들의 정점에 시계전문가 김한뫼 ‘MOI 워치(엠오아이 워치)’ 대표가 있다.
김 대표는 명품 시계 감정 및 시계 커스텀 분야에 국내 최고 전문가로 꼽힌다. 세계 최대 시계 박람회로 꼽히는 바젤월드(Baselworld)에 스위스 시계 브랜드 아티아(ArtyA)와 합작 출품한 시계로 완판 기록을 세우며 커리어와 명성을 쌓아왔다. 시계 특수 정밀 감정 기법에 전문성을 보유한 그는 한국명품감정원 전문 시계 감정 자문이자 시계 감정 교육 강사로도 활동한다. 롤렉스, 파텍필립 등 명품 시계 브랜드 직원 교육을 진행하기도 했으며, 세계적인 경매 회사 필립스의 투자 자문, 스위스 시계 제작 공구회사의 기술 고문 등으로 활약했다. 최근에는 중고 거래 플랫폼 번개장터의 고문으로 발탁되었다.
천만 원 단위를 넘어 억대의 가격대를 형성하기도 하는 하이엔드 시계가 본인과 상관없는 세상이라 여겨왔을 수 있다. 하지만, 몰랐던 자본의 흐름을 아는 것만으로도 흥미진진하고 시야가 넓어질 것이다. 혹시 모르지 않나. 시계의 매력을 발견하는 계기가 되어 새로운 '영끌' 목표가 생길지도. 정밀한 설계로 매초 정확하게 자리를 옮기는 시계의 무브먼트에 매료되어 보자.
시계를 감정 중인 MOI 워치 김한뫼 대표_본인 제공
김한뫼 대표는 하이엔드 시계 투자 전문가이자 ‘다이얼 메이커’다. 그의 이름을 딴 회사인‘MOI 워치(엠오아이 워치)’는 커스텀 시계를 제작하는 업체다. 본인만의 시계를 갖고 싶은 시계 마니아를 위해 하이엔드 시계에 보석을 추가하거나 특별한 각인을 넣는 식이다. 의뢰를 받으면 세상에 단 하나뿐인 다이얼(시간을확인할 수 있는 시계의 얼굴 부분)을 제작하기도 한다. 이외에도 제네바, 뉴욕, 홍콩 등에서 열리는 경매에서 시계를 낙찰받거나출품하고 싶어 하는 이들을 위해 감정과 가격 산정, 시계 투자를 위한 컨설팅 등의 업무도 하고 있다.
그는 우리나라의 전통 기법과 전통미를 시계에 차용한 것으로 유명하다. 김 대표는 해외 브랜드 시계들과의 차별화를 고민하던 중 전통 공예 기법 ‘옻칠’에서 가능성을 발견했다. ‘옻칠’은 옻나무에서 채취한 천연 원료로 작업을 하는 기법으로 유럽의 ‘에나멜’기법과 유사하나, 변형이 없고 습기에 강하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옻나무 수액을 여러 번 덧바르는 등 까다로운 작업을 거쳐야 한다.
이를 시계에 접목하는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주로 나무 위에 붙이는 기존 공예품과 달리 금속 위에 작업을 해야 했고, 동시에 시계 내부가 두꺼워지지 않도록 해야 했다. 수없이 많은 시행착오와 3년의 연구 끝에 김 대표는 시계 다이얼 제작에 최적화된 배합 비율과 접착 방식, 건조 조건 등의 노하우를 찾아냈다. '옻칠' 다이얼 시계는 2017년 바젤월드(Baselworld)에 출품해 완판 기록을 세웠다.
김 대표가 옻칠 기법으로 수제 제작한 다이얼. 현재는 한지와 에나멜 재료를 혼합하여 세상에 단 하나뿐인 시계를 만들고 있다. 특히 국가 원수나 재벌 회장의 얼굴을 담아내는 초상화 다이얼은 피스 당 수천만 원이 넘는 금액에 제작된다_본인 제공
시계 투자가 새로운 재테크로 떠오르고, 빈티지 시계나 리셀에 대한관심도 높아지면서 김 대표는 시계 투자 자문의 역할도 하고 있다. 매년 세계 3대 경매에 참석으로, 시계뿐 아니라 그림, 보석, 고미술품 등의 거래 경험으로 국제 트렌드와 흐름을 가장 잘파악하고 있기 때문.
2018년 2억에 구매되어 2023년 11억에 판매된 필립 뒤포(Philippe Dufour)의 심플리티(Simplicity). 필립 뒤포는 현대 시계 제작의 '살아있는 전설'이라는 평을 받는다_김한뫼 대표 제공
하이엔드 시계에 눈을 뜨기 시작한 덕후들은 시계의 세계에 입문하고 나면 자연스럽게 김 대표에게로 당도하게 된다고 말한다. 유수의 기업 회장들도 시계를 사기 전에 그에게 조언을 구한다고. 김 대표는 “수년 전부터 독립 시계 브랜드들을 추천해왔다”고 귀띔했다. 시계 장인들이 한 땀 한 땀 부품을 제작하고 조립하는 독립 워치 메이커의 시계들은 제작되는 양이 많지 않아 희소성이 높고, 웬만한 금융 상품이나 부동산보다 수익이 높다.
김 대표가 현시점 투자 추천 대상 1순위로 꼽는 시계는 렉셉 레세피(Rexhep Rexhepi)의 크로노미터 컨템포레인(ChronomètreContemporain)이다. 렉셉 레세피는 스위스의 젊은 독립 워치 메이커로, 젊은 시계 제작자 중 가장 유망하다고 평가받으며 시계 애호가들이 극찬하는 ‘핫’한 시계를 만들고 있다. 지난 5월 홍콩 필립스 경매에서 이목이 쏠린 이유다. 김 대표 역시 대기업과 함께 해당 시계 입찰에 참여하였으나, 6억 정도로 예상했던 금액이 11억까지 올라 낙찰에는 실패했다. 2022년 출시 가격은 2억이었다고 하니 1년 새 5배가 넘는 놀라운 가격 상승이다.
홍콩 경매에 출품되었던 렉셉 레세피의 크로노미터 컨탬포레인_김한뫼 대표 제공
김 대표 역시 “시계가 자산으로 여겨지는 흐름이 계속될 것”이라며, “NFT(대체 불가능 토큰)나 STO(토큰 증권)의 등장으로 디지털 거래 형태에 대한 논의가 이미 활발하다”고 말했다. 값비싼 시계를 실물로 주고받지 않아도 디지털 문서만으로 거래와 소유 증명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금 거래소에서 골드바를 구매하고 보관증을 받는 것처럼, 현물 없이 NFT를 거래하는 방식으로 점차 바뀔 것이다. 시계는 전 세계적으로 환금성이 좋고 이동이 편리하다 보니 투자의 개념으로 시계에 접근하는 사람이 계속 늘어날 수밖에 없다”고 김 대표는 덧붙였다.
홍콩 필립스 경매에 참석한 김한뫼 대표. 바라보고 있는 시계는 청나라 마지막 황제인 '푸이'가 생전에 착용한 시계이다. 금번 경매에 출품되어 67억에 낙찰되었다_본인 제공
김 대표는 시계 투자 이외에 교육을 통해 시계 전문가를 양성하고 있기도 하다. ‘시계 무브먼트 오버홀’ 강좌는 기본, 심화, 고급, 전문가 과정으로 구성되어 있어 각 과정을 모두 수강하면 전문성을 갖춘 시계 기술자로 거듭날 수 있다. 가장 처음엔 기본 이론과 함께 무브먼트를 분해하고 조립하며 기술을연마하는 과정을 거친다. 또한 ‘시계 감정’ 강좌도 운영하고 있어 롤렉스, 까르띠에 외 스위스 명품 시계의 가품과 정품 감정 여부를 감별하는 실전 노하우를 교육한다. 명품 시계 브랜드에서 근무하는 이들을 위한 세일즈 특강도 진행한다.
그는 15년간 1천 여 명에 이르는 시계 수리 및 감정 교육생을 배출했다. 그의 교육을 받은 수강생들은 창업을 하거나 스위스, 독일 등의 해외 시계 전문 교육 기관으로 유학을 떠나 해외 지사에서 근무를 하기도 한다.
국내 시계 산업 발전에도 힘 쓰고 있는 김한뫼 대표_본인 제공
후학 양성에도 시간을 많이 쏟고 열정적인 이유는 수강생과의 동반 성장이 목표이기 때문이다. 시계 산업은 단기간에 성장할 수 없다는 특징이 있다. 자본이 많다고성공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기술이 좋다고 성공을 보장받을 수도 없다. 김 대표는 수강생들이 가지고있는 재능을 최대한 발휘하여 안정적으로 안착할 수 있도록, 수강생들의 비즈니스를 돕고 있다.
어떻게 시계에 발을 들이게 되었냐는 질문에 그는 “그저 먹고살기 위해서 였다”라며 별거 아닌 듯 대답했다. 거창하지 않은 진솔한 답변 속에 25년간 국내 시계 산업에서 활약해온 그의 내공이 엿보인다. 묵묵히 쉬지 않고 움직이는 시계의 초침처럼 앞으로도 그의 활약은 이어질 것이다.
인터비즈 지희수 기자 heesuj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