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일가를 호위하는 부대 출신으로, 15명을 이끌고 탈북한 뒤 현재 서울 시민의 안전을 지키는 자율방범대 대장으로 활동 중인 강윤철 씨. 5일 자신이 담당한 구간을 순찰하고 있다.
서울 강서구 가양3동 자율방범대 대장 강윤철. 그의 경력은 특이하다. 북한 호위사령부 경보대대 군인 출신이다. 평양에서 김 씨 일가의 안전을 지키던 그는 지금은 30명의 대원을 이끌고 저녁에 2~3시간씩 순찰을 하며 서울 시민의 안전을 책임지고 있다.
이뿐만 아니라 강서구 의용소방대 대원으로 각종 소화기 점검을 도맡아하고 있다. 동 주민자치회 회원도 겸하고 있다. 이런 일들은 모두 자원봉사다. 그의 실제 직업은 공공기관 차량 담당 공무원이다. 호위사령부 군인 출신인 강 씨가 15명을 데리고 한국까지 탈북해 오기까지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 그가 태어난 세상
강 씨는 1983년 북한 양강도 혜산에서 태어났다. 집안과 출신 성분은 매우 좋았다. 할아버지 형제 중 한 명은 북한에서 최상위 출신 성분인 항일 열사였다. 외가도 좋았다. 양강도 풍산 혁명박물관에 가면 강 씨의 친가나 외가 가족사진이 많이 걸려 있다고 한다.
그가 태어났을 때 집안에는 중앙당 고위 간부로 있는 친척도 많았다. 부친의 이모부는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 산하의 주체사상연구소 책임간부였다. 황 전 비서와 가장 많이 싸웠다는 이유로 망명 사건이 있은 후에도 건재했다. 큰 외삼촌은 해군대학 학장이었고, 다른 외삼촌 한 명도 도당 책임비서 사위였다.
강 씨의 할아버지는 은행 지배인, 아버지는 군수공장 휴양소 소장을 지냈다. 이런 유복한 환경에서 태어났지만, 고난의 행군은 그의 집안을 빗겨가지 않았다. 전적으로 국가 배급에 의존해 살았던 그의 집도 쌀이 떨어졌다.
어머니가 잘 사는 친척집을 다니며 쌀을 구해 집으로 가져왔다. 어린 강 씨도 가끔 어머니와 함께 쌀 구하러 갔는데, 이 과정에서 역전에 뒹구는 시신도 많이 보았다.
그러나 그의 어린 시절을 지배하는 기억은 역전에서 강도를 당했던 일이다. 엄마와 길을 떠난 어느 날 다리에 배낭끈을 묶고 대합실 의자에서 잠깐 잠이 든 사이 누군가 끈을 자르고 도시락 등이 든 배낭을 훔쳐간 것이다. 망연자실해 있는데 어떤 남자가 잃어버린 배낭을 메고 앞으로 왔다갔다 했다. 엄마와 함께 벌떡 일어나 배낭을 찾으러 가려는 찰나 옆에 앉아 있던 낯선 사람이 이들을 잡았다.
그 말을 듣고 관찰해보니 패거리로 보이는 일행 여럿이 힐끗힐끗 쳐다보고 있었다. 눈앞에서 자기 배낭을 보고도 찾지 못한 것이다.
열차가 도착해 좁은 개찰구로 나가며 아수라장이 됐을 때, 아까 배낭을 훔쳐간 일당들이 이번엔 이쪽으로 옮겨왔다. 강 씨 눈앞에 있는 한 여인의 배낭 바닥을 면도칼로 쫙 긋자 통강냉이가 쏟아져 내렸다. 다른 강도가 마대를 받쳐 들고 잽싸게 그걸 담았다. 강 씨가 놀라 여인에게 알려주려 소리치려는 순간 엄마의 손이 그의 입을 막았다. 도둑 무리는 이들 모자를 내려다보며 비웃었다. 이날의 기억은 강 씨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이게 내가 살아가야 하는 세상이구나.”
올해 초 서울에서 열린 한 행사에 참가했다가 인근 카페에서 사진을 남긴 강윤철 씨.
● 윤이상 특각 호위대원
출신 성분이 좋은 강 씨는 2002년 호위사령부에 입대했다. 2000년에 중학교를 졸업한 뒤 2년 군사전문학교를 더 다녔다. 군사전문학교는 군 입대 경력으로 쳐주기 때문에 힘 있는 집은 자식을 2년 더 끼고 있다가 군에 보낸다. 17살에 입대해 군에서 배를 곯는 것과 19살에 입대하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2년만 집에서 더 잘 먹여도 키가 쑥쑥 자란다.
엄마는 아들을 해군에 보내고 싶어 했다. 외삼촌이 해군학장으로 있으니 미래를 보장해줄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들은 평양에서 살고 싶어 호위사령부를 지망했다.
엄마는 아들이 떠날 때 “그래도 평양에 가면 나무를 하지 않아도 되겠구나”라며 안심했다. 양강도에 주둔하는 군인들은 나무를 하다가 다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그건 오산이었다. 강 씨는 신병훈련소에 입소한 첫 날 목이 가느다란 군인들이 큰 통나무를 메고 나르는 것을 보고 놀랐다. 평양의 호위사령부도 산에 올라가 나무를 베어 화목으로 썼다.
군사전문학교를 졸업한 덕분에 신병교육은 속성으로 마쳤다. 이후 호위사령부(963군부대) 642여단 2대대 소속으로 배치를 받았다.
그가 맡은 첫 임무는 평양 근교의 특각(초대소)들을 경비하는 일이었다. 그의 중대 경비 대상은 윤이상각과 노로돔 시하누크각이었다. 북한은 김일성과 친분을 가지고 북한을 수시로 드나든 한국 출신의 음악가 윤이상과 실각한 캄보디아 국왕 노로돔 시하누크를 위해 경치 좋은 곳에 전용별장을 특별히 지어줬다. 풍광 좋은 호수를 끼고 이런 특각들이 멀찍멀찍 자리 잡고 있었다. 관리인도 따로 있었고, 호위사령부에 뽑아온 수백 명의 젊은 청년들이 외부인이 접근하지 못하게 별장 경호를 했다.
가끔 오는 윤이상의 아내에게서 간식을 얻어먹었다는 구대원들의 경험담을 듣기도 했지만, 강 씨가 경비 설 때는 이 특각들은 텅텅 비어 있었다. 수백 명이 빈 집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이곳에는 몇 달 있지 못했다. 여단에 새로 창설한 경보대대로 옮겨갔던 것이다.
강윤철 씨는 강서구 의용소방대 대원으로도 4년째 활동하면서 각종 소화기 점검을 하고 있다.
● 군기 빠진 호위사령부
새 중대에 옮겨간 첫 날 아침 점검 시간부터 경악했다. 중대 병사 중 최고 직책인 사관장이 새 소대장이 왔다며 다 나오라고 소리쳤는데도 분대장들이 하나같이 아프다고 나오지 않았다. 한 병사를 보냈더니 좀 있다가 수염이 꺼먼 1분대장이 군복을 잘라 셀프로 만든 반바지에 슬리퍼처럼 변한 군화를 질질 끌고 나왔다. 화가 잔뜩 난 표정의 그의 손에는 권투 글러브 2개가 들려있었는데, 글러브 하나를 사관장 앞에 던지더니 “오늘 점검은 너랑 나랑 한판 해서 결판내자”고 소리쳤다.
나중에 알고 보니 분대장들은 입대 13년차였고, 사관장은 11년차였다. 고난의 행군 시기에 군 병력 충원이 제대로 되지 않자 김정일은 북한군 복무 기간을 10년에서 13년으로 올렸다. 복무 기간을 마치고도 3년을 더 근무하게 된 군인들의 분노 앞에선 어떤 군기도 먹히지 않았다. 아침 점검을 해도 분대장들은 침대에 누워 나오지 않았고, 훈련에도 불참했다. 김정일을 지키는 정예부대라는 호위사령부의 군기가 그랬다.
그런 속에서도 강 씨는 주기적으로 돌아오는 ‘천리 행군’, ‘2천리 행군’ 등을 거치며 군인으로 성장했다. 하지만 그의 군 복무는 5년 만에 중단됐다.
가을 농촌지원 때 감기 기운이 있어 아스피린을 먹었는데, 갑자기 배가 참을 수 없이 아파오더니 정신을 잃을 지경까지 됐다. 호위사령부 병원으로 옮겨 수술을 했다. 아스피린이 위궤양이 있는 자리에 붙었다며 위를 잘라냈다. 그리곤 이런 상태로는 군 복무를 더 할 수 없다며 감정제대(의가사제대)를 시켜 집으로 보냈다.
● 김정은 전용 전화선 관리원
집에 돌아와 얻은 직장은 ‘921호 관리소’ 산하 75호 중계소였다. 이곳은 김정일의 전용 전화선을 관리하는 것이 임무였다. 북한은 전국에 김정일을 위한 전화선을 따로 묻고 관리했다. 혜산의 75호 중계소에만 25명이 근무했다. 김 씨 일가의 전화선 하나를 위해 전국에서 수많은 인력이 낭비되는 것이다. 전화선뿐만 아니라 김 씨 일가만 다닐 수 있는 전용도로, 비행장 등도 전국에 만들어졌다. 강 씨가 제대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의 집도 강제 철거됐다. 김정일 전용 ‘1호 도로’를 건설해야 하는 구간에 있다는 이유였다.
921호는 좋은 직장이었다. 고난의 행군 시기에도 배급을 꼬박꼬박 줬고, 각종 사회동원에도 빠졌다.
그가 하는 일은 매일 8㎞ 담당 구간을 순찰하는 것이었다. 전화선은 땅속 1.5~3m 깊이에 묻혀 있었는데 누가 판 흔적은 없는지, 장마 때문에 흙이 유실된 것은 없는지 살펴보는 것이 그의 임무였다. 이 일은 너무 무료했고, 시간을 내기도 어려웠다.
강 씨는 2008년 혜산예술극장 보위대로 이직했다. 시내 깨끗한 곳에서 근무할 수 있고, 밤에 근무를 하기 때문에 낮에는 자기 시간을 낼 수 있다는 것이 장점이었다.
혜산예술극장은 1999년에 화재로 전소된 뒤 새로 지은 신축 건물이었다. 반동들이 노린다며 예술극장 하나에도 보위대 겸 소방대 명목으로 20여명이 근무했다. 온 나라에 인력이 남아도는 것 같았다.
보위대는 원래 총을 들고 경비를 서야 한다. 하지만 예술극장만은 무기를 메고 경비를 서지 않았다. 예술인들이 무기를 보면 공포를 느껴 기량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 이유였다.
군에 갔다 돌아오니 그새 혜산도 많이 변했다. 돈이 없으면 사람 취급을 받지 못했다. 학교 동창들도 돈 있고 권력 있는 친구들끼리만 어울려 다녔다. 돈을 벌어야 했다.
지난해 열린 자율방범대 연말 송년회에 참가한 강윤철 씨.
● 목숨 내건 동 장사
마침 그때 친구의 형이 동 장사를 하자고 제안했다. 동은 국가전략물자로 구분되기 때문에 밀수하다 걸리면 총살까지 당할 수 있는 위험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만큼 남는 돈이 많았다.
당시 함흥에서 적동은 1㎏에 6위안, 황동은 4위안에 거래됐는데 혜산까지 가져오면 적동은 12위안, 황동은 10위안을 받을 수 있었다.
친구 형은 아빠가 철도 경무부 간부였다. 철도 경무부는 여행하는 군인들을 단속하는 철도 헌병대라고 할 수 있다. 강 씨가 단속에 걸리지 않는 방법은 간단했다. 기차에 탈 때 군복을 갈아입는 것이었다. 철도 경무부가 군인 단속을 맡았기 때문에, 민간인들을 담당하는 안전원들은 군인을 단속할 수 없다. 뇌물을 미리 받은 경무원도 이들을 단속하지 않았으니 무사통과가 가능했다. 동을 가지고 혜산역에 내리면 경무원이 압수 물품이라며 기차에서 직접 내려 경무부 창고에 넣었다가 밤에 돌려주었다.
그렇다고 위험 부담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가장 무서운 사람들은 함흥의 거래처 동 장사꾼들이었다.
강 씨가 처음 함흥에 가서 만난 동 장사꾼은 이들을 자기 집 지하실로 데리고 갔다. 강 씨는 지하실에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각종 동이 5톤 가량 쌓여 있었다. 자세히 보니 동으로 만든 부품도 있고, 전화선도 있고, 그릇도 있었다. ‘충성의 꼬마계획’ 과제를 통째로 그 지하실에 옮겨온 듯 싶었다. 북한은 학생들에게 매년 1인당 폐동 몇 ㎏, 폐철 몇 ㎏, 토끼가족 몇 개 하는 식으로 과제를 준다. 이것을 충성의 꼬마계획이라고 부른다. 선생들이 학생들을 끊임없이 닦달질해 받아내면 간부들이 그걸 빼내서 동 장사꾼들에게 팔아먹는 것이다.
강 씨와 형 친구는 지하실에서 하루 종일 교대로 함마를 휘둘렀다. 모양이 다른 동 쪼가리들을 두드려 40~45㎏짜리 네모 모양으로 압착한 뒤 그걸 박스에 담았다. 둘이 보통 두 박스, 80~90㎏를 나른다.
한 번 거래한 집은 다시 가지 않는다는 것이 이들의 원칙이었다. 동 장사꾼은 동을 팔아먹은 뒤 뇌물을 준 안전원을 시켜 이들을 잡게 한다. 안전원은 뇌물 먹어 좋고, 불법 동 밀수꾼을 잡아 실적도 올려 좋다. 동 장사꾼은 동을 다시 돌려받아 다른 곳에 판다. 이런 사기 수법을 북한에선 ‘창 맞는다’고 한다.
강 씨도 위기를 넘기기도 했다. 이럴 경우를 대비해 똑같은 박스 4개를 준비한 뒤 작업을 마치자마자 미리 현지에서 섭외한 두 명에게 진짜 동 박스를 넘겨주었다. 그리고 자신들은 가짜 박스를 자전거에 싣고 출발했다. 아니나 다를까 안전원이 추격해 오더니 이들을 잡았다. 박스를 여니 다른 물건만 나왔다. 안전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2019년 노현송 당시 강서구청장으로부터 모범시민 표창을 받고 있는 강윤철 씨.
● 2만 위안짜리 철도 안전원
동을 날라 오는 일은 1년 정도밖에 하지 못했다. 그들의 뒤를 봐주던 경무원들이 다른 사건에 휘말려 하나둘 사법처리가 됐다. 1년을 날라보니 뇌물이 많이 들어 생각보다 남는 것도 없었다.
소속 기관이 각기 다른 단속원들의 통제도 점점 심해졌다. 당시엔 정복을 입는 자리도 돈만 주면 얼마든지 들어갈 수 있었다.
철도 안전원이 제일 비쌌다. 각종 불법 이송을 눈감아주고 뇌물을 많이 받을 수 있는 자리여서 2만 위안을 뇌물로 줘야 했다. 단점은 자주 중앙 검열에 적발돼 수명이 길진 않았다.
혜산 안전부 소속 기동타격대에 입대하려면 1만 위안을 뇌물로 줘야 했다. 기동타격대는 폭동에 대비해 만든 조직인데, 역전을 포위하고 물건을 뺏는 일도 했다. 이들에게 잡히면 물건의 절반을 내놓아야 했다.
안전원(경찰)은 5000위안이었고, 보위부는 가격이 제일 싼데 2000~3000위안만 뇌물을 주어도 입대가 가능했다. 정치범을 잡는 조직이다 보니 뇌물을 받기 어렵기 때문이다. 설령 정치범을 잡아도, 이런 죄는 뇌물을 받고 석방을 시킬 수도 없었다. 물론 보위부 반탐과는 밀수꾼을 잡기 때문에 이런 곳에 들어가면 엄청난 돈을 챙길 수 있지만, 이런 곳은 워낙 힘 센 사람들이 선점하고 있어 뇌물로 살 수 있는 자리는 아니었다.
이런 사람들이 입대할 때 들인 뇌물을 뽑으려고 쌍심지를 켜다보니 점점 동 운반도 위험부담이 너무 커졌다. 동을 날라와 밀수꾼들에게 넘기다보니 언제부턴가 밀수하는 사람들과도 친해졌다. 강 씨는 밀수로 방향을 바꾸었다. 그런데 혜산은 이미 그가 낄 데가 없을 정도로 정교하게 밀수망이 형성돼 있었다. 그는 혜산 아래에 붙은 김형직군으로 갔다.
● ‘종합 예술’ 밀수에 뛰어들다
김형직군에서 그는 물건을 받아 중국에 넘겼다. 북한에서 밀수는 종합 예술에 비유된다.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밀수를 위해선 물건을 날라 오는 철도 안전원, 기관사 등을 포섭해야 하고 단속 통제를 담당한 보위부, 안전부에도 연줄이 깊어야 한다. 또 국경경비대 장교들을 장악하는 것뿐만 아니라 중국의 대방들에게도 신뢰를 얻어야 한다. 물론 그의 포섭 대상인 직업도 살기가 만만치는 않다. 특히 신뢰할 수 있고 배신하지 않는 밀수선을 몇 개 아는냐에 따라 받는 뇌물 액수가 달라진다. 국경경비대 장교는 중국 대방 2~3개는 확보해야 밀수꾼들에게서 신뢰를 받을 수 있다.
강 씨가 처음 한 일은 기름개구리 등 농수산물을 받아 넘기고 쓰던 마대를 받아오는 일이었다. 이미 사용한 사료마대, 비료마대 등을 몇 만개씩 중국에서 받아왔다. 이걸 다 씻어서 북한 내륙으로 들여보내면 장마당에서 잘 팔렸다.
물건을 넘겨 보내는 양에 따라 중국 대방은 보너스도 주었다. 밤에 배로 1톤가량 넘기면 자전거 한 대 정도가 보너스로 왔다. 강 씨는 이 일을 2년 정도 했다. 돈도 많이 벌었다. 어느 날 중앙당에서 국경경비대에 집중 검열을 나왔는데, 그 시기엔 밀수를 할 수 없었다. 그걸 계기로 그는 혜산으로 다시 돌아왔다.
언제까지 직장을 다니지 않을 수가 없어 혜산광산 보위대로 옮겨가려고 생각했다. 혜산광산 보위대 입대는 2000~3000위안짜리였다. 당시 혜산광산에선 아연 등 희귀광물들이 생산됐는데 노동자들은 이걸 품에 차고 나온다. 비싼 것을 차고 나오면 50위안도 벌 수 있었다. 이걸 잡는 것이 보위대였다. 물론 뇌물을 받고 눈감아줄 때가 더 많다. 그런데 사람을 잡아내는 것도 할 짓은 아니었다. 그래서 보위대는 직접 광산 안에 들어가 싸게 희귀광물을 사서 밀수꾼들에게 비싸게 넘겼다. 자신들이 경비를 책임졌기 때문에 광산에서 갖고 나오다 단속될 염려는 없었다.
보위대도 총을 드는 직업인지라 신원조회가 필요하다. 북한에서 신원조회는 전산조회로 하지 않는다. 사람이 전국을 돌면서 서류에 기입된 8촌까지 직접 찾아가 행적을 파악해 갖고 온다. 그러다 보니 신원조회에만 보통 반년 이상 걸린다. 뇌물을 주지 않으면 신원조회 기간은 훨씬 더 길어진다.
자율방범대는 거동이 불편한 장애인들을 돕는 활동도 한다. 올해 봄에 열린 어느 장애인체육대회에서 도우미로 나선 강윤철 씨.
● 중국의 북한 벌목공들
보위대에 서류를 제출하고 집에서 쉬고 있는데, 친구가 중국에 돈벌러 가자고 제안했다. 중국에 넘어가 들쭉을 따도 되고, 통나무 한 대를 날라도 1위안씩 받는데 하루에 50위안 넘게 받는다고 했다.
2013년경에는 북한 사람들이 들쭉을 따러 중국에 우르르 넘어가던 때였다. 친구 2명을 따라 삼지연군에 가니 딴 세상이었다. 매일 밤 압록강 바로 옆 동네 주민 수십 명이 국경경비대에게 뇌물을 주고 강을 넘었다. 경비대 군인들이 와서 먹고 자는 집은 뇌물을 주지 않고 중국에 출퇴근하듯 넘어갔다 올 수 있었다. 그렇게 둘쭉철에 눈을 감아준 대가로 경비대원은 1년 내내 민가에 드나들며 배고프지 않게 살 수 있었다. 중국에 가는 일행들은 바케쯔(양동이)를 등에 거꾸로 메고 줄을 지어 강을 건넌다. 거꾸로 멘 이유는 강에서 넘어지면 양동이에 물이 차면서 손 쓸 틈이 없이 하류로 떠내려가기 때문이다.
건너간 사람들은 며칠 산에서 살면서 들쭉을 따서 도로에서 기다리는 중국 상인에게 판 뒤 다시 북한으로 넘어왔다. 들쭉 1㎏을 따면 5위안을 벌었다. 강 씨 일행 3명은 이틀 동안 들쭉을 따서 80위안을 벌었다. 하지만 그 정도의 벌이에 성이 차지 않아 주변 벌목장을 찾아갔다.
벌목장에 가니 또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가 간 작업장에는 한족 로반(사장) 1명에 북한 사람 17명이 있었다. 북한 사람 20~30명 규모의 그런 작업장이 백두산 기슭에 셀 수 없이 많다고 했다. 강 씨는 그렇게 많은 북한 사람들이 넘어와 일을 하는 줄 몰랐다.
움막에 합세하니 거긴 한국과 마찬가지였다. 한국 영화나 드라마 CD가 가득 쌓여 있었다. 다 돈을 주고 사온 것이라 했다. 벽에 붙여놓은 라디오에선 한국 방송이 24시간 나왔다. 북한에서 한국 드라마를 보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단속 공포 없이 편하게 누워 한국 영화를 보니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그가 갔을 때는 벌목일은 하지 않았다. 대신 산에 올라가 작은 나무를 베어내는 일을 했다. 하루 일당이 30위안쯤 됐다. 그런데 그게 다 자기 돈은 아니었다. 밥 한 끼에 5위안씩 공제했다. 비 오는 등 날씨가 험해 일을 나가지 못하면 식대만 하루에 15위안씩 깎였다. 작업복이나 장비도 자기 돈으로 사야 했고, 고기나 술을 먹으려면 돈을 모아 추가로 내야 했다. 먹을 것은 한족 로반이 날라 왔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산의 주인은 따로 있었고 로반은 관리를 위탁받은 사람이었다.
날씨가 추워진 뒤엔 벌목을 시작했다. 벌목을 하고, 말과 소, 트럭을 이용해 통나무를 산에서 끌어내려 온 뒤 4m 길이로 다듬고 자르는 작업이었다. 이때는 40위안을 받았다.
몇 달 지나고 보니 로반은 관리만 하면서도 일당은 200위안씩 받는 사실을 알게 됐다. 강 씨는 이것이 너무나 불공평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로반에게 두 가지 조건을 내걸었다. 첫째는 일당을 50위안으로 올릴 것. 둘째는 아파서 일 나가지 못하면 식대를 떼지 말 것을 요구했다.
“돈을 벌려고 온 사람이 식대가 깎이면서도 꾀병을 앓겠나. 정말 아프니까 못 나가는데, 식대까지 떼는 것은 너무하다. 요구 조건을 들어주지 않으면 갈 데도 많은데 딴 데 가서 일하겠다.”
결국 로반이 조건을 다 들어주었다. 강 씨는 주변 작업장에 자신들이 얻은 성과를 알려주었다. 그래서 300~400명이나 되는 그 지역 북한 노동자들이 다 일당을 높게 받았다. 사실상 노조가 생긴 것과 마찬가지 효과였다. 그런 리더십 덕분에 강 씨는 얼마쯤 지나 작업장 책임자로 추대됐다. 책임자는 로반과 만나 하루 과제를 받고 또 노동자들과 로반 사이 협상도 담당하는 자리였다. 물론 책임자라고 일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일당을 받으려면 그도 일을 해야 했다.
그가 책임자로 있을 때 가끔 공안 단속에 걸리는 작업장도 생겼다. 강 씨는 또 발 벗고 나섰다. “꺼내려면 수천 위안의 뇌물이 든다는데, 우리 모아서 도와줍시다. 우리가 잡히는 경우도 있을 것 아닙니까. 서로 도우며 살아가는 게 최선이죠.”
점점 그 구역 내에서 강 씨의 권위가 올라갔고 따르는 동생들도 생겼다.
지난해 열린 강서구 각 동별 직능단체장 워크샵에 참가한 강 씨가 인천의 한 섬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다.
● 돈으로 목숨을 사는 세상
강 씨는 어느 정도 돈이 모이자 친구들과 함께 다시 압록강을 넘었다. 번 돈을 집에 갖다 주기 위해서였다. 매달 평균 800~1000위안씩 모았으니 액수가 꽤 됐다.
집에서 시간을 좀 보내고 다시 중국에 넘어왔다. 벌목장의 생활은 너무 좋았다. 북한 사람들과 어울려 살다 보니 여기가 북한인지 중국인지 실감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고기도 먹을 수 있었고, 눈치 보지 않고 한국 영화도 보고, 마음 놓고 오락회도 열 수 있었다. 보위대에 가서 조직생활을 하기보단 중국이 훨씬 나은 것 같았다.
그렇게 몇 달 벌고, 오고를 반복하다가 끝내 보위부에 체포됐다. 누군가 그가 중국에서 일한다고 신고했다. 잡히니 “한국 사람은 만났나. 교회엔 갔나. 한국 방송을 들었나”를 꼬치꼬치 캐물었다. 아니라고 부인해도, 보위부는 이미 중국 작업장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알고 있었다.
감옥에서 한 달을 버틴 끝에 가족이 큰 뇌물을 주어 석방될 수 있었다. 감옥에 있는 기간 체포된 여러 사람들을 만났다. 한 젊은 남성은 일곱 가족, 수십 명을 한국까지 가도록 도와준 죄로 체포됐다. 이를 ‘유도안내죄’라고 했다. 한 명을 넘기는데 1만2000위안씩 받았는데, 경비대에 5000위안씩 뇌물을 주고 본인은 7000위안씩 받았다고 한다. 그 돈으로 6살 아들을 예술학원에 보내 영재로 키울 꿈을 꾸던 남성이었다.
“남들은 그렇게 많이 한국에 보내면서 왜 본인은 가지 않았냐”고 묻자 그는 “조국을 배반하진 않겠다”고 대답했다. 진심인지, 강 씨를 믿지 못해 그런지 알 수는 없었다. “몇 년 형을 받을 것 같냐”고 물으니 “20~30년 받지 않을까”라고 대답했다. 나중에 들으니 그는 정치범수용소에 끌려갔다고 한다.
다른 한 명은 얼음이라고 불리는 필로폰 2㎏과 사람 3명을 중국에 넘기려다 체포됐다. 마약 밀수는 중범죄이지만 그동안 벌어놓은 돈이 있었는지 보위부 고위직을 움직여 1년 형만 받고 교화소에 갔다고 했다. 돈만 있으면 죽지 않는 세상이었다.
감옥에서 나오니 보위원이 매일 찾아와 감시했다. 체포되는 바람에 보위대 입대도 무산됐다. 결국 그는 중국으로 다시 가서 돌아오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2015년 9월 그는 마지막으로 압록강을 넘었다.
코로나 전 어느 공원에서 휴식을 보내는 강 씨.
● 15명을 이끌고 탈북하다
벌목장 생활을 오래 하다 보니 한국에 대해 자연스럽게 알게 됐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상대하는 중국 로반들이 북한 노동자들을 통해 기회만 되면 말을 열심히 배우는 모습이었다.
한국에 가서 벌면 한 달에 1만 위안 이상 번다며 가족이 다 갔다고 자랑하는 사람도 있었다. 어떤 중국인들은 “너희들은 한국에 얼마든지 갈 수 있고, 국적도 주는데 왜 여기서 이러고 있냐”며 답답해하기도 했다. 한 달에 1000위안도 벌기 힘든 처지의 강 씨는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한국을 상상했다. 그런데 가족들 때문에 용단을 내리진 못했다.
다시 북한으로 가지 않겠다고 생각하고 강을 건넌 뒤엔 한국으로 못 갈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이때 마침 한국에서 전화가 왔다.
먼저 탈북해 중국 내륙 깊숙이 자리 잡고 있던 여인이었는데, 가끔 인력이 필요할 때마다 벌목장에 전화해서 좀 보내달라고 했던 인연이었다. 그런데 그녀가 1년쯤 소식이 끊겼다가 다시 전화가 온 것이다. 그녀는 자신이 한국에 왔다며 오는 선도 알려주겠다고 했다.
강 씨는 벌목장에서 한국에 먼저 간 탈북민이 출연하는 라디오를 많이 들었다. 그들의 북한 생활 이야기를 들으면서 “저 사람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을 보니 한국 생활에 대한 이야기도 믿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한국으로 가는 길까지 소개받으니 다른 사람들이 마음에 걸렸다. 그는 3년 동안 일하면서 친해졌던 동생들부터 찾아다녔다. 이런 이야기는 전화로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 번은 다른 작업장을 가다가 얼어 죽을 뻔하기도 했다. 반나절 넘게 아무리 가도 작업장을 찾을 수 없었는데 밤에 기온이 크게 떨어지며 몸이 움직이질 않았다. 이렇게 죽는가 싶었는데, 마침 그 작업장으로 들어가는 일행에게 발견돼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그렇게 작업장을 찾아다니며 모은 일행이 15명이나 됐다. 처음에는 그들에게 한국에 가자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내륙에 엄청 좋은 일자리가 있는데 가지 않겠나. 거기 가면 치료를 받을 수 있다.”
벌목장에서 치료를 받는다는 말은 엄청난 힘을 가진다. 그만큼 다치는 사람이 많았지만, 신분 때문에 중국 병원에서 치료를 받지 못하고 살아야 했다.
“정말 치료를 받을 수 있는 거 맞나? 그런데 형은 가나?”
“응, 나도 간다. 단 조건이 있다. 거긴 한번 가면 북한 고향으론 다신 못 간다.”
그가 속내를 터놓았던 15명 모두가 따라나섰다.
심양에 도착해서야 강 씨는 “사실 한국으로 가려고 한다”고 말했다. 절반 정도는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고 했고, 나머지도 놀란 눈치지만 계속 그를 따라가겠다고 했다.
심양에서 딱 한 명이 북으로 돌아가겠다고 했다. 북한에 가서 조카를 데리고 같이 가야지 혼자는 못 간다는 것이다. 나중에 들으니 그는 잡혀서 교화소에 갔다고 했다.
한국에 간 탈북 여성이 소개한 한국행 선은 교회가 주선하는 루트였다. 브로커 비용은 받지 않는 대신 중국에서 성경 공부를 3개월 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었다. 15명은 여러 처소에 나눠서 성경을 공부했다. 한국에 보내준다는데 못할 일이 없었다.
강윤철 씨(오른쪽)와 대원들이 한강근린공원을 순찰하고 있다.
● 꿈을 이뤄가는 삶
강 씨는 2016년 5월 마침내 일행과 함께 한국에 도착했다. 그는 한국행 비행기를 탈 때 스스로 자신과의 약속을 하나 만들었다.
“한국에 가면 절대 담배를 피우지 않겠다고 결심했습니다. 벌목장에선 담배가 없이 살 수가 없었지만, 담배 끊을 각오도 없이 한국에서 첫 시작을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는 지금까지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 그해 10월 그는 서울 강서구에 임대주택을 받고 하나원을 졸업했다. 서울에 가겠다는 희망자들이 많아 추첨을 해야 했는데 운 좋게도 그는 당첨됐다.
그는 북에 있을 때부터 수도에 가보고 싶어 외삼촌이 해군대학 총장으로 있었음에도 해군을 마다하고 호위사령부로 갔다. 서울에 와서도 꼭 수도에서 살고 싶었는데 마침내 그 꿈을 이뤘다. 뜨거운 물이 나오는 수도꼭지를 부여잡고 눈물을 흘렸다. 고향의 부모는 추운 겨울에 압록강에 물을 길으려 다니고 있을 것이란 생각에 울음을 참기 어려웠다. 뜨거운 난방을 틀어놓고는 찬 바람이 마구 스며드는 벌목장의 움막이 생각나 또 울었다. 세탁기를 돌리며 얼음을 깨고 옷을 빨던 과거가 생각나 또 눈시울을 적셔야 했다.
“어떻게 온 땅인데, 최선을 다해 살아야 겠다”고 굳게 결심했다. 그는 정착한 직후 다른 동생들과 함께 막노동 현장을 누비며 닥치는 대로 일했다.
그런데 몸이 편해져서인지, 아니면 긴장이 풀려서인지 얼마 안 가 여기저기 아프기 시작했다. 중국에서 통나무를 메고 나르던 몸이 눈에 띄게 여위어갔다.
강 씨는 1년 반이나 병원을 다녔다. 2018년에야 어느 정도 몸이 회복돼 광명에 있는 한 회사에 취직할 수 있었다. 월 150만 원을 받고 회사 출퇴근 차량 운전을 했는데 그 일을 하면서 운전 실력을 키웠다.
2020년 그는 그동안 모은 돈으로 1톤짜리 용달 트럭을 샀다. 개인 용달을 하는 게 더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일이 안정적이진 않았기 때문에 일을 하면서 틈틈이 안정적인 직장을 찾았다.
여러 곳에 지원서를 냈는데 올해 초에 마침내 강서구시설관리공단에 운전기사 겸 차량 담당 정규직으로 입사할 수 있었다. 월급은 200만 원으로 개인용달 때보다는 많이 적지만 공공기관에서 60세까지 일할 수 있다는 안정성과 저녁이 있는 삶을 살 수 있다는 조건을 더 높이 샀다.
서울에서 그는 고향 출신의 여성과 만나 결혼을 했다. 아이도 둘을 키우면서 북한에서 배인 가부장적인 습관을 내려놓고, 다정다감한 남편이자 아빠로 살기 위해 노력한다.
“한국에 가서 이루고자 했던 것들을 하나하나 이루고 있습니다. 서울에 살고 싶은 소원도 이뤘고, 가정을 꾸리고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소원도 이뤘습니다. 공공기관에 취직한 것도 돈보다는 행복에 더 가치를 두었기 때문입니다.”
행복에 더 가치를 두었다고 하지만, 사실 그의 저녁은 가족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퇴근 후 2~3시간씩 동네 순찰을 돈다.
강 씨가 2021년 탈북민 정착경험사례 발표대회에서 정인성 당시 남북하나재단 이사장으로부터 우수상을 받았다.
● 봉사로 기여하는 삶
그는 한국에서의 삶이 너무 좋다. 그가 경험한 한국은 본인이 노력한 것만큼 삶의 질이 결정되는 행복한 사회였다. 자신에게 이런 삶을 선물한 대한민국에 보답하고 싶었다. 그래서 각종 봉사활동에 적극적이다.
“저는 돈이 없습니다. 그래서 가진 것이 몸밖에 없으니, 몸으로 기여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서울에 자리를 잡은 지 3개월 뒤부터 동네 자율방범대에 가입해 활동하기 시작했다. 막노동을 하면서 주 3회씩 저녁마다 2~3시간 순찰을 도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강 씨는 지금까지 7년 동안 꼬박꼬박 자기 역할을 해왔다. 성실함을 인정받아 지난해부터는 가양3동 자율방범대 대장으로 추대됐다.
그뿐만 아니라 강서구 의용소방대에도 가입해 4년째 소화기 점검과 같은 일을 돕고 있고 동 주민자치회 회원으로도 활동한다. 이렇게 정신없이 살면서도 강 씨는 자신이 봉사한다고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도움을 받고 있다고 생각한다.
“저와 함께 봉사활동을 하시는 분들 중에는 정말 인품이 훌륭하신 분들이 많습니다. 저에게 많은 것들을 가르쳐 주십니다. 그래서 정착도 더 빨리 잘 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저처럼 한국 생활을 처음 시작하는 탈북민은 동네에서 봉사를 하면서 지역 사회에 녹아들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지역봉사 활동뿐만 아니라 그는 다른 탈북민들을 돕고 어울리기 위해서도 노력한다. 지난해 말까지 북한군 출신 탈북민 단체인 숭의동지회 부회장을 맡아 활동했고, 지금도 주말마다 강서구에서 탈북한 사람들끼리 모여 족구 동호회 활동을 하며 화합을 다지고 있다.
“통일이 언제 될지는 모릅니다. 저는 통일로 가는 과정에 주춧돌 역할을 하고 싶습니다. 좀 더 욕심을 내면 이 땅에 처음 온 탈북민들에게 열심히 사는 본보기가 되고 싶기도 하고요. 그렇게 열심히 살다가 어느 순간 통일이 오면 고향에 가서 남과 북의 화합을 위한 중재자 역할도 하고 싶습니다. 거창하게 살고 싶진 않지만, 열심히 사는 오늘이 모여 더 나은 내일이 되고, 계속 발전해가는 저라면 내일에는 더 큰 일을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남들은 평생 겪지 못할 수많은 고비를 넘기며 살아왔지만 강 씨는 이제 겨우 40세이다. 그의 인생 후반전은 어떤 삶의 스토리들로 채워지게 될까.
동아일보·남북하나재단 공동기획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