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년의 1위’ 인텔의 반격
구특교 산업1부 기자
《미국 반도체 기업 인텔이 ‘반도체 왕좌’ 탈환에 나서고 있다. 인텔은 수십 년간 지켜온 부동의 ‘반도체 1위’(매출액 기준) 자리를 2017년 삼성전자에 처음 내줬다. 2019년, 2020년 선두를 탈환했지만 2021년 삼성에 다시 역전당했다. 급기야 글로벌 매출액이 2021년 790억 달러(약 103조 원)에서 지난해 63억 달러로 급감하면서 순위는 3위까지 밀렸다. 같은 기간 30% 이상 성장(57억 달러→76억 달러)한 대만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업체 TSMC가 삼성에 이어 2위에 오른 것이다.
과거의 영광을 되찾으려는 인텔은 최근 잇달아 대규모 투자계획을 발표하고 있다. 게다가 미국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도 등에 업고 있다. 하지만 미세공정 분야에서 TSMC나 삼성의 기술력을 곧바로 따라집긴 힘들 것이란 평가도 있다.
인텔의 진격은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내부 파운드리 모델’을 적용해 파운드리 분야 세계 2위에 오르겠다.”
지난달 22일(현지 시간) 데이비드 진스너 인텔 최고재무책임자(CFO)는 이런 목표를 밝혔다. 투자자 등을 대상으로 한 웨비나(웹+세미나)에서였다. 현재 글로벌 파운드리 2위인 삼성전자를 향한 ‘선전포고’인 셈이다.
● 파운드리서 삼성 ‘정조준’
지금까지 인텔은 팹리스(반도체 설계)와 파운드리 분야가 묶여 있는 형태였다. 인텔이 설계한 제품을 내부에서 생산할 경우 파운드리 사업부 매출로 따로 집계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날 인텔이 공개한 ‘내부 파운드리 모델’에 따르면 내년 1분기(1∼3월) 사업 구조를 재편한 뒤 인텔의 중앙처리장치(CPU) 등 주력 제품 생산 실적은 파운드리 매출로 잡히게 된다. 독립적으로 파운드리 사업부를 운영하며 투명성과 경쟁력을 높이고, 외부 고객사도 적극 유치하겠다는 것이다. 삼성전자가 사업부별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 메모리, 파운드리, 시스템LSI로 사업부를 나눈 방식과 유사하다.인텔의 내부 생산 물량이 별도 매출로 집계되면 파운드리 업계에서 단숨에 3위까지 뛰어오르게 된다.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올 1분기 글로벌 파운드리 시장 점유율은 TSMC가 60.1%로 절반이 넘는다. 삼성전자가 12.4%로 뒤를 이었고, 중국 글로벌파운드리와 대만 UMC가 각각 6.6%, 6.4%를 차지하고 있다.
인텔은 현재 10위권 밖이다. 그러나 내년 내부 생산 제품에 대한 인텔의 매출 예상액 200억 달러를 따로 집계하면 얘기가 달라진다. 삼성전자는 파운드리 매출을 공개하지 않고 있다. 시장조사기관 옴디아가 추정한 삼성전자 파운드리의 지난해 연매출은 208억 달러. 인텔이 외부 고객사 유치까지 확대하면 삼성과의 파운드리 순위가 뒤바뀔 가능성이 충분히 있는 셈이다.
● 유럽에 잇달아 대규모 투자
실제 인텔의 투자 행보가 심상치 않다. 특히 반도체 유치에 적극적인 유럽을 중심으로 공격적인 투자를 이어가고 있다. 최근 반도체 확보가 국가 안보와 직결되며 유럽연합(EU)은 보조금 액수를 대폭 늘려 반도체 기업 모시기에 사활을 걸고 있다. EU는 반도체 공급망 확대에 430억 유로(약 61조5000억 원)를 투입하고 2030년까지 전 세계 반도체 생산 중 EU 비중을 9%에서 20%까지 끌어올릴 계획이다. 한국과 대만 등 동아시아 중심의 반도체 공급망에서 벗어나 공급망을 다변화한다는 계산도 깔려 있다.EU의 이러한 정책에 인텔이 적극 부응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해 인텔은 향후 10년간 최대 800억 유로(약 112조 원)를 투자하겠다는 계획을 밝힌 바 있다. 지난달에는 독일 마그데부르크 반도체 공장 증설에 300억 유로(약 42조8000억 원)를 투자하기로 협약을 맺었다. 독일 정부가 보조금을 늘린 데 힘입어 기존에 계획한 170억 유로에서 투자금을 늘렸다. 폴란드에는 46억 달러(약 6조 원)를 투자해 반도체 후공정 공장을 짓고, 이스라엘에도 250억 달러(약 32조6000억 원)를 들여 반도체 생산 시설을 짓는다. 아일랜드에는 120억 유로(약 17조1000억 원)를 들여 반도체 후공정 공장을 증설한다. 프랑스에는 파운드리 디자인센터를 지을 예정이다.
인텔이 ‘주 전공’이 아닌 파운드리 강화를 선택한 것은 새로운 변화 없이는 미래를 장담할 수 없다는 절박함에서 비롯됐다는 분석이 나온다.
● 인텔 성공 놓고 엇갈리는 시선들
팻 겔싱어 최고경영자. 인텔 제공
인텔은 7nm(나노미터·1nm는 10억분의 1m) 이하 초미세 공정에 어려움을 겪으며 2018년 파운드리 사업을 한 번 철수했던 적이 있다. 2021년 팻 겔싱어 최고경영자(CEO)가 취임하면서 시장 재진출을 선언했다.
업계 전문가들은 이번에 파운드리 사업을 독립시킨 것 역시 선언적 수준에 그친다고 지적한다. 한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파운드리를 놓고 보면 기존 업체들이 대형 고객사와 고부가가치 산업의 고객들을 이미 확보해 뒀기 때문에 당장 위협이 되지는 않는다”며 “CPU 외 경쟁력을 가진 제품군이 줄어들고, 대체재가 생겨나다 보니 투자자에게 어필하기 위한 보여주기식 측면이 크다”고 말했다.
승부는 역시 2나노 공정에서 판가름 날 것으로 보인다. 삼성전자와 TSMC는 지난해 3나노 양산에 성공했다. 인텔 파운드리 공정은 7나노 수준이지만 내년 상반기(1∼6월) 2나노급 20Å(옹스트롬), 하반기 1.8나노급 18A 공정을 양산하겠다는 야심 찬 계획을 내놨다. 실현 가능성이 낮다는 평가도 있지만, 일단 목표 시점은 TSMC와 삼성전자의 2025년보다 빠르다.
미중의 ‘반도체 전쟁’이 벌어지는 정치외교적 상황도 인텔이 사업구조 재편에 성공할 수 있는 적기의 타이밍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미 정부가 중국에 대항해 자국 반도체 공장 건설에 대한 보조금을 지원하며 반도체 산업 등 제조업 부흥에 나서고 있기 때문이다. 이종환 상명대 시스템반도체공학과 교수는 “인텔은 전통적으로 반도체 공정 기술이 강했고 마이크로프로세서 분야 파운드리 기술력도 있다”며 “미 정부가 자국 반도체 기업을 지원 사격하며 빼앗긴 주도권을 가져오려는 상황과 맞물려 삼성 등 한국 기업에도 위협이 될 수 있다”고 밝혔다.
구특교 산업1부 기자 koot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