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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윤종의 클래식感]미-레-도, 베토벤의 고별과 말러의 작별

입력 | 2023-07-10 23:36:00

9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곡 연주 시리즈를 마친 피아니스트 루돌프 부흐빈더. 사진 출처 루돌프 부흐빈더 홈페이지

유윤종 문화전문기자


쉬운 개념을 어려운 용어로 푸는 방법은 많다. 다음의 표현도 그렇다. ‘장음계의 가온음(mediant)에서 윗으뜸음(supertonic)을 거쳐 으뜸음(tonic)으로 향하는 진행.’ 골치 아프지만 ‘미-레-도’라는 단순한 음형을 설명했을 뿐이다. 나란히 붙은 세 음이니 흔히 들을 수 있는 ‘선율 조각’이다.

이 음형에 각별한 의미를 붙인 사람이 베토벤이다. 피아니스트 루돌프 부흐빈더는 베토벤 피아노 전곡 시리즈 사흘째인 이달 1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세 번째 곡으로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26번 ‘고별’을 연주했다.

지난달 28일 기자간담회에서 부흐빈더는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32곡 중 그가 직접 제목을 붙인 소나타는 8번 ‘비창’뿐”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26번 소나타가 ‘고별’로 불리는 데 베토벤은 반대하지 않을 듯싶다. 베토벤은 E플랫장조의 ‘미-레-도’로 시작하는 이 곡 1악장 첫머리 악보에 ‘안녕히(Lebewohl)’라고 적었다. 1809년 나폴레옹의 공격으로 빈을 떠나는 후원자 루돌프 대공에게 헌정하는 뜻이었다. 우연이지만 피아니스트 부흐빈더의 이름도 ‘루돌프’다.

악보 출판사가 프랑스어로 ‘les adieux(고별)’라는 제목을 붙이자 베토벤은 화를 냈다. 하지만 이는 ‘les adieux’에 ‘Lebewohl’과 다른 뜻이 있기 때문이었다. ‘Lebewohl’은 잘(wohl) 지내세요(lebe)라는 인사말이다. 재회를 기약한다. 프랑스어 아듀(adieu)는 신(dieu) 앞에서 만나자는, 이생에서의 마지막 만남을 시사한다.

100년이 지난 1909년, 작곡가 말러는 심근내막염으로 삶의 마지막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는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 교향곡 9번의 끝 악장을 차이콥스키 교향곡 6번 ‘비창’처럼 비통하게 시작해 고요하게 끝나는 느린 악장으로 꾸몄다. 이 악장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은 동기가 D플랫장조의 ‘미-레-도’다.

유명한 ‘서양음악사’의 저자 그라우트를 비롯해 많은 사람이 이 음형을 베토벤 ‘고별’의 인용으로 해석했다. 말러는 이 곡에 앞서 교향곡적 가곡집인 ‘대지의 노래’에서도 ‘미-레-도’ 음형을 사용했다. “사랑하는 대지 어디에나 봄이 오면 꽃이 피고 지평선에는 푸른빛이! 영원히, 영원히….” 여기서 ‘미-레-도’는 대지와 영원의 상징이 된다. 프랑스어의 ‘adieux’에 가깝다.

지난달 25일 최수열 지휘 부산시립교향악단은 서울 예술의전당 교향악축제에서 말러 교향곡 9번을 연주했다. 여러 관객이 이 곡을 이날 막을 내린 교향악축제에 대한 고별의 뜻으로 해석했다. 공연에서는 고요하게 끝나는 4악장에서 지휘자가 손을 내리기 전에 박수가 터져 나와 여러 관객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떠나고 싶은 주인공의 손을 잡아채고 흔들어대는 것 같은 일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9일 먼저 같은 프로그램과 출연자로 부산문화회관에서 열린 콘서트에서는 끝까지 침묵을 지켜낸 성숙한 관객이 감탄을 일으켰다.

베토벤의 고별은 영원하지 않았다. 그는 고별 소나타의 2악장에 ‘부재(不在)’, 3악장에 ‘재회’라는 메모를 붙였고 이듬해 전쟁이 멈추자 대공은 빈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말러는 미완성으로 끝난 교향곡 10번의 원고를 남겨둔 채 1911년 영원으로 떠났다.

어떤 사람들은 교향곡 9번에 나타난 말러의 ‘고별’을 개인적 차원을 넘어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으로 막을 내린 19세기 부르주아 문화의 아름다운 시대, ‘벨 에포크’의 몰락에 대한 예언으로 본다. 고별의 4악장에 앞서 들려오는 3악장의 광란은 전쟁 직전 시대의 광기를 반영한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말러에게 예언자와 같은 예지력이 있지는 않았겠지만 그의 민감한 예술적 감각은 붕괴 직전 유럽 사회의 아슬아슬한 기류를 읽어냈을지 모른다.

부흐빈더는 9일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곡 연주를 마쳤다. 마이크를 들고 “일곱 번 연속으로 무대에 오르니 한국 청중이 가족처럼 느껴진다”고 말한 뒤 그는 우리말로 “감사합니다”라고 했다. 그는 내년에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5곡을 지휘까지 겸해 연주하기 위해 다시 찾아올 예정이다. 그때까지 안녕히(wohl) 계시(lebe)길.



유윤종 문화전문기자 gustav@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