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 의료난 부추기는 규제]〈中〉 국고지원 제한에 장비 낙후 장비교체 국고지원비율 25%뿐 그나마 정부서 삭감당하기 일쑤 기부금 모금도 금지돼 구입 못해
4월 지방의 A국립대병원 권역응급의료센터. 40대 남성이 공장에서 일하다 폭발 사고로 심한 화상을 입고 병원에 실려 왔다. 환자의 몸에 고압 산소를 주입하지 않으면 뇌와 폐의 기능을 영영 잃을 수도 있는 응급 상황. 하지만 A국립대병원에는 이런 치료가 가능한 고압산소치료기가 없었다.
2000년대 초반에 1대 남아 있던 낡은 장비를 폐기한 뒤 새 장비를 구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권역 내에서 대형 화재나 일산화탄소 중독 사고가 발생하면 인근 다른 병원으로 환자들을 돌려보낸다. A국립대병원에는 권역 내에서 생긴 응급환자를 최종 치료하는 ‘권역응급의료센터’가 있다. 하지만 정작 환자를 돌볼 기본 장비조차 없는 것이다. 40대 남성이 실려온 이날은 하필 장비가 있는 다른 병원을 수소문하는 데도 실패했다. 결국 이 환자는 폐가 망가져 제 기능을 못 하게 됐다.
A국립대병원이 새 장비 구입 노력을 안 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국립대병원이다 보니 시설이나 장비를 교체, 구입할 때 국고 지원 비율은 25%에 불과했다. 정부가 제한된 예산을 기존 사업에 먼저 투입하면서 삭감되기 일쑤였다. 지역사회 기업이나 대학 동문에게 손을 벌리고 싶어도 불가능했다. 국립대병원은 기부금품법상 기부금 모집이 금지돼 있기 때문이다.
18년된 심혈관 조영기 툭하면 꺼지고… 27년된 신생아 치료기 사용
의료진 “심혈관 시술중 꺼질까 불안”
뇌혈관 MRI 찍으려면 한달 대기
의료장비 대여업체서 빌려쓰기도
“열악한 환경에 의사도 환자도 떠나”
뇌혈관 MRI 찍으려면 한달 대기
의료장비 대여업체서 빌려쓰기도
“열악한 환경에 의사도 환자도 떠나”
B국립대병원에 도입된 지 18년 된 심혈관 조영기는 시술 도중 멈추는 등 고장이 잦다. 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 낡은 장비들, 수술-시술 도중 ‘먹통’
국립대병원은 ‘기타 공공기관’으로 분류된다. 예산 확보 과정에서 준정부기관 수준의 각종 규제를 받기 때문에 노후 의료기기 및 시설 교체에 필요한 재원 마련이 어렵다. 사용 연한이 한참 넘은 의료기기를 그대로 쓰는 이유다. 대당 10억 원을 넘는 기기를 정부 보조나 기부금 모집 없이 국립대병원 재원으로만 구입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다.
같은 병원에 있는 자기공명영상(MRI) 촬영 장치는 총 3대인데, 뇌혈관 질환을 촬영할 수 있는 MRI는 2대뿐이다. 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B국립대병원에 설치된 ICS 8대 중 3대는 1996∼1998년 도입됐다. 27년 된 기기가 현장에서 사용되고 있는 셈이다. 낡은 기기는 체중계 기능이 없고 인공호흡 기능도 신제품에 비해 떨어진다. 고장이라도 나면 빠른 시간 내 수리가 불가능하다.
● 비 오면 줄줄 새는 병원… 환자도, 의사도 떠나
B국립대병원 건물에는 외벽 타일이 깨지거나 병실 벽에 균열이 가 있는 곳이 수두룩했다. 고층 타일이 떨어지면 보행자가 다칠 우려도 있었다. 환자가 입원하는 본관 55병상에는 천장부터 바닥까지 벽에 금이 가 있어 비가 오는 날에는 빗물이 들이친다고 한다. 병원 측은 “의료기기도 구입하기 어려운 실정에 건물 외벽이나 타일 보수는 신경을 쓸 여력이 없다”고 밝혔다. 자기공명영상(MRI) 촬영장비도 부족해 뇌혈관 사진을 찍으려면 1개월 이상 대기해야 한다. 현장에서 만난 환자들은 “차라리 서울에 가서 찍고 오는 게 빠르지 않겠냐”며 하소연했다. C국립대병원 소아중환자실에선 심정지 후 회복 환자를 위한 저체온요법기를 새로 들이지 못해 업체에서 빌려 쓰고 있다. 이마저도 부족하면 성인 중환자실에서 빌려온다. 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황종윤 강원대병원 산부인과 교수는 “다른 병원들은 로봇 수술 기기처럼 새로운 의료 기술을 도입해 양질의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는 데 반해, 국립대병원은 처지가 열악하다”며 “좌절감을 느끼고 병원을 떠나는 의사들도 있다”고 말했다.
● 국고 지원은 25%에 불과, 기부금 모금도 금지
국립대병원은 교육부의 관할이다. 새 의료기기를 도입하려면 교육부에 국고출연금 신청을 해야 한다. 신청이 통과돼도 국고 지원 비율은 25%에 불과하다. 한 국립대병원 관계자는 “다섯 건 신청해서 한 건 통과되면 많이 된 거다. 심지어는 국고 지원 없이 우리 돈으로 기기를 사겠다고 해도 불허되는 경우도 있다”며 “방만 경영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는데, 병원이 환자 위한 의료기기 구입하는 것이 어떻게 방만 경영이 되는지 납득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반면 지방자치단체의 관할인 지방의료원은 전액 국고 및 지자체 지원을 받아 새 의료기기를 구입한다. 인건비와 적자 보전에 쓰이는 운영비도 지원을 받는다.
지역의료 거점 역할을 하는 미국 존스홉킨스대병원, 메이오클리닉 등 해외 주요 대학병원들은 전체 수익의 10% 이상을 기부금으로 충당한다. 공공의료에 공헌하는 만큼 기부하려는 개인과 기업들이 적지 않다. 병원들도 적극적으로 기부금 유치에 나선다.
국내의 경우 기부금품법상 국립대병원의 기부금 ‘모금’이 불법이다. 기부자가 ‘자발적으로’ 기부하는 돈만 받을 수 있다. 병원이 나서서 기부금 모금 행사 등은 할 수 없다. 국립대병원들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 이후 의료수익 악화가 심해져 자발적인 기부금 접수만으로는 재정적으로 어려움이 많은 상황”이라고 토로한다.
국립대병원의 기부금 모금을 허용하는 기부금품법 개정안은 2011년 8월 국회에 발의됐지만, 당시 행정안전부가 반대해 법제화가 무산됐다. 기부금을 냈다는 이유로 공공기관인 국립대병원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우려였다. 이번 국회에서도 비슷한 개정안이 발의됐지만 여전히 상임위원회조차 통과하지 못하고 있다.
청주=이문수 기자 doorwater@donga.com
전주=김소영 기자 ksy@donga.com
조건희 기자 beco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