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르·K스포츠 재단 출연 큰돈 놔두고 동계스포츠영재센터 후원 작은 돈 검찰과 대법원이 걸고넘어진 결과가 기업사냥꾼 엘리엇 배상으로 돌아왔다
송평인 논설위원
윤석열 대통령, 한동훈 법무부 장관,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은 검사 시절 이른바 국정농단 사건을 수사할 때 미국계 사모펀드 엘리엇이 그들의 수사에 근거해 손해배상을 청구할 것을 모르지 않았다. 당시 언론들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의 투자자-국가 간 분쟁해결(ISDS) 조항에 따라 엘리엇이 소송을 제기할 것을 경고했다. 검찰은 엘리엇의 구미에 딱 맞게 수사했고 예상대로 엘리엇의 청구서가 날아왔다.
국정농단 사건은 최순실이 주도해 설립한 미르·K스포츠재단에 대기업들이 출연하도록 박근혜 정부가 압력을 넣었다는 혐의로부터 시작됐다. 정작 대법원에서 미르·K스포츠재단 출연금에 대해서는 무죄가 선고됐다. 국정농단 사건은 한마디로 하자면 출발점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다른 곳으로 표류해버린 사건이다.
다른 곳 중 하나가 삼성의 동계스포츠영재센터 후원 16억 원에 대한 제3자 뇌물죄다. 삼성이 최순실 딸 정유라에게 승마 지원을 해준 71억 원도 뇌물죄 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승마 지원 71억 원은 그냥 뇌물죄이고, 동계스포츠영재센터 후원 16억 원은 제3자 뇌물죄다. 제3자 뇌물죄는 그냥 뇌물죄와 달리 ‘부정한 청탁’을 요건으로 한다. 법원이 승마 지원 71억 원만 뇌물죄로 인정했다면 부정한 청탁이 있었는지 따질 필요가 없었고 엘리엇에 빌미를 주지 않을 수 있었다.
청탁에 따른 부정한 지시가 있었다는 증거도 없었다. 안종범 당시 경제수석비서관이 박 대통령의 지시를 받아 적은 수첩 61권은 본인도 다 없어진 줄 알았으나 검찰에 의해 극적으로 발견돼 박 대통령에게 불리한 방식으로 국정농단 수사에 큰 도움을 줬다. 그러나 안 수석 혼자 보기 위해 적은 그 많은 수첩에도 ‘삼성 합병’이란 말은 한마디도 나오지 않았다.
현안 없는 대기업은 없다. 현안이 있기만 하면 묵시적 청탁으로 볼 수 있다면 미르·K스포츠재단에 출연한 대기업들은 다 제3자 뇌물죄로 처벌해야 한다. 사실 그렇게 했어야 한다. 그래야 정부가 멋대로 기업에 돈을 내게 하는 걸 근절할 수 있다. 그렇게 하지 않았기 때문에 대기업이 이런저런 명목으로 계속 돈을 내고 있다.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 비율은 법에 따라 합병 결의 이사회 전날 시장 주가에 의해 결정됐다. 그러나 시가가 시장 참여자들의 합병 예상에 의해 영향을 받았다는 실질적 사정을 고려해 법원은 주식매수청구가격을 재산정했다. 그 민사판결로 일성신약 등이 보상받았고 그 후 엘리엇도 같은 기준에 따라 보상받았다. 엘리엇에 새로 배상해야 할 1400억 원은 이 민사보상금을 뺀 것으로 순전히 국정농단 형사판결 유죄, 그중에서도 삼성의 동계스포츠영재센터 후원 16억 원에 부정한 청탁이 인정된 데 따른 것이다.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 과정 자체에 불법이 있었는지는 재판 중이다. 삼성바이오로직스의 가치 평가 과정에서 분식회계가 있었는지가 쟁점이다. 합병 이후 삼성바이오로직스의 가치가 지속적으로 커져 주식매수청구권을 행사하지 않은 옛 삼성물산 주주들도 합병으로 손해를 보기는커녕 이득을 봤다. 국민연금이 이런 가치 상승을 예상했다면 정부 압력이 있었든 없었든 합병에 찬성할 이유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주장을 힘들게 만든 것이 바로 삼성 동계스포츠영재센터 16억 원 제3자 뇌물죄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