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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에서/박희창]서민가계 박탈감 키울 수 있는 증여세 공제 한도 확대 대책

입력 | 2023-07-12 23:36:00

박희창 경제부 차장


대기업을 다니다 퇴직한 50대 후반 A 씨는 “헛살았다”고 했다. 그의 큰아들은 내년 4월 결혼식을 올릴 예정이다. 5000만 원을 줄 테니 전셋값에 보태라고 말해놨다. 딸에게도 결혼할 때 같은 금액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현행법에 따르면 10년간 5000만 원까진 세금을 안 내고 자녀에게 증여할 수 있다. A 씨는 “다들 자식 한 명한테 1억 원이나 1억5000만 원씩 결혼자금으로 턱턱 주냐”며 “그래도 노후에 먹고살 돈이 있냐”고 물었다. 그는 노모의 생활비와 병원비도 본인 몫이라고 덧붙였다.

A 씨의 넋두리가 길게 이어진 건 결혼자금 증여세 공제 한도 확대 때문이었다. 기획재정부는 최근 발표한 ‘하반기 경제정책 방향’에서 결혼자금에 한해 증여세 공제 한도를 늘려 주기로 했다. 결혼하는 자녀에겐 5000만 원 넘게 쥐여 줘도 일정 금액까지 증여세를 매기지 않겠다는 것이다. 얼마까지 세금 없이 줄 수 있는 건지, 어디까지가 결혼자금에 해당하는지는 이달 말 발표될 예정이다. 1억 원이나 1억5000만 원으로 공제 한도가 확대될 것으로 관측된다.

기재부는 저출산 대책의 일환이라고 설명했다. 기재부 관계자는 “결혼과 출산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기 위한 정책”이라고 말했다. 또 현실을 짚어봐도 공제 한도 확대가 필요하다고 했다. 이미 결혼할 때 부모한테 5000만 원 넘는 돈을 지원받는 자녀들이 상당히 많지만 국세청에선 2억, 3억 원 이하의 자금은 출처 조사를 거의 하지 않아 단속이 사실상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해 한국의 연간 출생아 수가 사상 처음 25만 명 아래로 떨어진 만큼 저출산 대책은 필요하다. 그러나 기재부의 설명대로라면 지금도 5000만 원 넘게 부모로부터 도움을 받고 세금을 안 낸 신혼부부들이 많지만 태어나는 아기 수는 사상 최저인 셈이다. 부자 부모를 둔 자녀들에게 합법적으로 세금을 더 많이 아끼며 재산을 물려받을 수 있으니 결혼하라고 하면 출산율을 높이는 데 보탬이 될까. 돈이 모자라 결혼을 미루는 건 부모한테 손 벌리기 어려운 청년들이다.

자녀에게 1억 원 넘는 돈을 주고도 생활비 걱정 없이 노후를 보낼 수 있는 부모도 많지 않다. 지난해 가계금융복지조사 결과에 따르면 가구주가 50대인 가구의 평균 순자산은 5억3500만 원이었다. 여기엔 본인이 살고 있는 집값도 포함돼 있다. 가구주가 60대 이상인 경우에는 4억8300만 원에 그쳤다. 가구주가 은퇴한 가구 중 “생활비가 부족하다”고 답한 비율은 60%에 육박했다.

부모가 성인 자녀한테 세금 없이 증여할 수 있는 재산은 2014년 3000만 원에서 5000만 원으로 늘어났다. 1994년부터 바뀌지 않고 쭉 3000만 원이었다. 당시 기재부가 밝혔던 개정 이유는 “물가 상승률 등을 감안해 공제 수준을 현실화할 필요가 있다”였다. 정부가 결혼자금에 한해서라지만 10여 년 만에 다시 증여세 공제 한도 확대에 나서면서 저출산 대응을 내건 건 손부끄러운 일이다. 많은 자녀와 부모에게 상대적 박탈감만 준다. 차라리 결혼자금을 두고 일부 부자들의 탈세가 빈번하지만 국세청 인력을 마냥 늘리긴 어려우니 이참에 양성화하겠다는 게 더 설득력 있는 자세다.



박희창 경제부 차장 rambla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