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번 내가 자행한 ‘도발’에 대해 이종찬 광복회장이 이메일을 보내왔다. <이종찬의 ‘1919년 원년’vs 김영호의 ‘건국은 혁명’> 칼럼을 반박하는 내용이다. 나는 독자들의 험악한 댓글을 볼 때마다 ‘에고 나가 죽으란 소린가…’ 싶으면서도 내 월급 속엔 악플을 감수하는 값도 포함됐다고 믿고 산다(물론 배우는 점도 적지 않다). 이 회장의 글에 전부 공감하는 것은 아니지만 독자와 함께 사고의 폭을 넓힐 수 있는 좋은 기회인 듯 해 필자의 동의를 얻어 소개하기로 했다. 애정어린(?) 비판을 보내준 이 회장께 감사드린다.
(아래는 이종찬 광복회장이 보내온 글과 사진 전문입니다. 네모 속 내용은 지난 칼럼에서 인용한 부분입니다.)
존경하는 김순덕 대기자 선생
쓰신 글을 읽어보니 약간 오해가 있는 부분이 있어서 이글을 보냅니다.
적극 응원한다. 하지만 취임사 “국가정체성을 바로 세워야 한다” 바로 다음 이어진 문장은 난해하다. “대한민국의 원년은 1919년이다. 바로 그 독립정신으로, 대한민국은 원조받던 국가 중 유일하게 원조하는 국가로 성공했다”며 “이 사실을 우리는 당당하게 자랑해야 한다”고 썼다. 그럼 우리 국가 정체성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독립정신이라는 말씀?1919년은 대한민국임시정부만 수립된 사실을 원년으로 말한 것이 아니라 가장 중요한 기미년 독립선언과 전 민족이 들고일어나 독립의지를 세계 만방에 알린 사실입니다. 선생께서 앞질러 내가 ‘대한민국임시정부 독립정신’을 강조하신 것 같이 인식 하셨는데 너무 작게 보셨습니다. 그보다 ‘吾等은 자에 朝鮮이 독립국임과 朝鮮人이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로 시작된 자주독립정신이 오늘까지 우리 국민의 산업화, 민주화의 근본바탕을 이루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왜 제가 하지도 않은 말, 임시정부 독립정신으로 한정해서 해석하시는지요? 이건
내가 말한 자주독립정신의 일부분에 불과합니다. 아마 선생께서는 으레 내가 임정을 높이고 싶어서 그럴 것이라는 선입견을 갖고 말씀하신 것 같은데 아닙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임정의 독립정신에 한정하지 않고 기미년 독립선언에서 나온 자주독립정신 전반을 말했음을 알려 드립니다.
사실 미국의 독립선언도 1776년 7월4일 필라델피아에서 모인 13명이 선언한 독립선언, 이게 미국의 건국정신 아닙니까? 그때 U.S.A. 탄생되기 전이죠. 그런데 이 날을 미국의 국경일로 하고 있습니다. 독립선언 그 자체가 전 국민의 의지의 표현이고, 무언의 컨센서스가 이루어진 것이라 보고 있죠. 나는 기미년 독립선언한 해를 대한민국의 원년이라 말하고자 한 것도 이와 같은 취지입니다. 그런데 왜 이인호 선생은 굳이 나에게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을 건국이라 고집한다고 비판하나요? 그처럼 출발부터 그 분은 나를 오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김 선생께서도 비슷한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군요? 아마 내가 표현이 서툴러서 그런 오해 불러일으키게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종찬은 독립운동가 우당 이회영 선생(1867~1932)의 손자이고 초대 부통령을 지낸 이시영 선생(1869~1953)의 종손자다. 1919년 세운 임정을 높이 평가하는 것도 당연하다. 하지만 국가의 ‘가장 중요한 원로단체’를 자임한 광복회의 회장이 국가정체성의 원천으로 ‘대한민국 원년 1919년’을 드는 식은 고개를 갸웃하게 만든다. “우리는 1919년 임시정부 수립을 대한민국 건국으로 본다”던 문재인 전 대통령이 생각나서다.1919년 건국을 말하지 않았는데도 오해해서 말했다고 한 부분은 위에서 내가 이미 해명했으니 중복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나를 문재인과 한패걸이처럼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가 문재인 대통령의 요청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건립위원장을 맡아서 서대문 독립문 근방에 기념관을 세우기는 했지만 내가 더 존중한 것은 기미년 독립선언과 국내외를 막론하고 일어난 전민족적인 만세 시위를 말합니다. 이런 민족적 합의가 있어서 아마 국내외 여러 곳에서 임시정부 수립운동이 일어난 것 아닌가 생각합니다. 또 문재인 전 대통령도 대한민국임시정부를 강조한 것은 맞지만 현 대한민국을 부정하였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고 나는 해석합니다. (문재인 봐 주었다고 오해할까 걱정?)
오히려 좌파들은 “이승만 일당은 46년 이미 정읍에서 단독정부 수립을 강조했고, 1948년 8월15일 건국했다. 박헌영일당은 이런 남한의 단독정부가 수립되는 것을 보고 9월9일에 전 인민의 합의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건립했다” 고 선전하고 있는 사실을 아시는지요.
“‘대한민국 원년은 1919년’이라는 표현은 ‘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어받아’라는 현행 헌법 전문이나 마찬가지로 독립의지와 민주공화국의 이념적 기조가 그때부터 이어져 왔다고 해석되는 한에서는 무난할 수 있다”고 전제하긴 했다. 그럼에도 “임시정부는 어디까지나 임시정부이지 국민을 보호할 수 있는 권능을 국내외에서 인정받은 정식국가가 아니”라는 지적이다.이어서 김영호 통일부장관 후보의 글까지 인용하면서
“…..과거 왕조체제를 복원하지 않고 자유민주주의에 기초한 근대국민국가를 새롭게 세웠다는 점에서 대한민국 건국은 혁명적이었다는 것이다.
1919년 수립된 임정은 안타깝지만 영토와 주민에 통치권을 행사하지 못했다. 독립운동가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국제적 승인을 받지도 못했다(근대국제정치체제의 출발점이 된 베스트팔렌체제에 따르면 승인은 국가 존재의 중요한 구성요소다. 미국은 유럽의 망명정부들도 민주적 절차를 거쳐 주민의 자유로운 의사가 확인될 때까진 승인하지 않았다). 대한민국임정은 국민투표를 통해 수립된 것도 아니라는 점에서 말 그대로 ‘임시정부’였다고 김영호는 2015년 저서 ‘대한민국의 건국혁명’에 썼다. 유엔과 국제사회로부터 ‘국가’로서 인정을 받은 것은 1948년 건국된 대한민국이라는 의미다.‘임시정부는 국민을 보호할 수 있는 권능을 국내외서 인정받은 정부가 아닌 것’, 이것도 이론이 있지만 일단 인정하겠습니다. 1919년 당시, 일제가 침략하여 권능을 빼앗았기 때문에 이를 되찾기 위해 피나는 독립운동을 하는 것 아닙니까? 또 일제 강점으로 인하여 여러 부분에 정부로서 역할하기 불충분하니깐 ‘임시’라고 하는 것입니다. 만약 정부권능을 충분히 행사할 수 있다면 왜 ‘임시’라 하겠습니까? 결과와 원인을 거꾸로 말하고 있는 것 같아요. 또 1948년 정식 정부는 마치 하늘에서 갑자기 떨어진 것처럼 표현했는데 일제와 싸우기 위해 얼마나 많은 피를 흘리고 희생했는지 너무 가볍게 보신 것 같고 공짜로 얻어진 것같이 표현하여 불쾌했습니다. 카이로 선언도 연합국 수뇌가 갑자기 합의된 문서가 아닙니다.
지난 주 1948년 건국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광복회 정문 앞에서 시위를 하면서 위와 같은 현수막을 걸어놓았습니다. ‘임시정부는 잉태한 상태인 정부이고, 현 대한민국은 옥동자라고…..또 임시정부에 국가의 3대 요소인 국민, 국토, 주권이 있느냐?’ 그런 그림도 그려놓았습니다. 대한민국 원년은 1919년이라는 나의 주장에 대하여 알레르기 반응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데 나는 개탄했습니다. 기미년 독립선언을 내가 주장했는데 구태어 임시정부를 폄하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잘 납득이 안갑니다.
몽양은 1919년 3.1독립선언직후 북경에서 우당 이회영, 이시영 형제에게 임시정부 수립의 필요성을 역설하여 상해로 가서 초대 임정원의 일원으로 활동하자고 권고하신 분입니다. 그래서 초대 임정원 29명 중 형제가 참석한 것은 이회영, 이시영 형제와 여운형, 여운홍 형제가 있음은 우연한 사실이 아닙니다. 그랬던 몽양이 해방정국에선 임정 무실을 주장하여 정치권에서 당혹했던 사실이 있습니다.
다음 이승만 박사는 1948년 건국론을 주장했고, 김구는 1919년을 건국을 주장했다는 설도 잘못된 것입니다. 두 분을 포함하여 독립운동에 참여한 모든 선열들은 1919년 처음으로 국민의 마음속에 왕정은 끝났고 독립이 된다 하더라도 민주공화제로 간다는 점에 합의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대한민국의 원년은 1919년이라 하는 것입니다.
유식하게 베스트팔렌을 내세우면서 국가로 인정받으려면 국제적 승인을 조건으로 내세우셨지만 미국은 1776년 이미 독립이 된 나라로 역사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치 우리가 1919년 독립선언한 것을 원년이라 하듯이 말입니다. 나는 무식해서 국제적 승인도 중요하지만 그 지역에 국민의 의지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다음에 김 선생의 글에 인용된 1948년 8월15일 정부수립 기념일 사진을 봅시다. 그 식전에 나는 소학교 4학년시절 부통령 가족석에서 참석해서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 식장에 걸린 현수막을 보면 ‘대한민국정부수립 국민축하대회’라 써있습니다. 왜 당시 행사 준비한 분들이 ‘정부수립’이라 했을까요?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경축 행사. 동아일보DB
기념우표에도 ‘정부수립축하’, 도로에 설치된 아치에도 ‘정부수립축하’ 모두 통일되어 있었습니다. 어떻게 ‘건국’이란 말은 한마디도 없었을까요?
이종찬은 그러면서 “우리나라는 1919년을 기준으로 하면 4352년 전 이미 건국한 나라”라며 기미년 3.1독립선언서에 ‘조선건국 4252년 3월 1일 조선민족대표’라고써 있는 것을 근거로 들었다(당연하다. 그들은 조선사람이었으므로). “그런 취지에서 이인호 선생이 말한 1948년 건국은 더더욱 무리한 주장”이라고 했다. 심지어 그는 지난달 제74주기 백범 김구 선생 추모식에서 “대한민국의 원년이 1919년임을 부정하거나 왜곡하는 세력은 극좌파 친북이적집단 아니면 한국의 독립운동을 고의로 폄하하고 왜곡하는 소위 극우세력”이라고 못박은 데 이어 ‘회신’에선 “좌나 우나 할 것 없이 민족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은 저와 생각을 같이 하고 있다”고 썼다. 자신의 역사관에 동의하지 않으면 극좌 아니면 극우, 심지어 반민족이라는 발상은 그가 1980년대 활약했던 전두환 파쇼정권을 연상케 한다.이 부분은 내가 존경하는 김순덕 선생이 항상 지녔던 냉철한 지적 판단이 아니라 상당히 감정적인 솜씨로 나를 질타한 것처럼 느껴집니다. 대단히 유감스럽지만 제가 다시 정리하죠.
1. 애국선열들을 비롯하여 제헌국회의원, 이승만 초대내각 장관들은 일치하여 “나라는 이미 있었다. 그 나라는 고조선이 되든, 신라가 되든, 고려가 되든 조선이 되든 연면히 계속되어 왔다. 다만 대한제국 말기 일제가 군사적으로 강점하여 주권행사가 어려웠다. 1919년 당시까지 항일 투쟁은 왕정복고적이었다. 그러나 1919년 고종이 승하하고 독립선언을 한 이후로 민주공화정이 전국민의 일치된 생각이었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 항일 투쟁이 더 격렬
하게 전개되었고 그 과정에서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2. 임시정부는 망명정부가 아닙니다. 국내에 있던 정부가 해외로 망명한 것이 아니라 전세계 산재해 있던 국민들이 독립선언을 계기로 국내외에서 수립한 임시정부입니다. 이건 초유의 정부입니다. 프랑스의 드골은 자유 프랑스민족회의를 조직했을 뿐이고(드골은 1944년 프랑스가 나치로부터 해방된 다음 임시정부가 결성될 때 주석에 취임했다), 아일랜드 독립운동가는 신페인 당은 결성해도 정부를 수립하지 않았습니다.
3. 박근혜 전대통령 시절 국정 역사교과서 만든다고 할 당시 나는 황우려 의원과 논쟁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는 “북한은 1948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건립하고, 또 정부를 세웠는데 우리도 이에 대항하여 1948년 대한민국을 건국하고 정부를 세었다고 역사교과서에 기술해야 합니다” 라 했어요. 나는 반박했습니다. “왜 북한을 따라서 1948년 건국론을 말합니까? 우리 대한민국은 반만년 전에 나라가 이미 건국되었고 내내 왕정이었던 것이 1919년을 기하여 민주공화정으로 정체가 바뀌어진 것입니다. 우리는 반만년부터 내려온 역사의 적손(嫡孫)이고 북한은 1948년 나라를 세워 분가한 이단입니다. 우리의 공화정은 1919년 거국적인 3.1독립선언이라는 국민적 합의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민족사적 정통성은 우리에게 있습니다.”
4. 나의 이런 역사인식은 아마 국정 역사교과서를 반대하는 모든 분들이 공통된 생각일 것입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이런 공감대를 말하는 나에 대하여 김 선생께서는 전두환 팟쇼적인 주장이라 몰아 부쳤습니다. 국정 역사교과서 반대하는 내가 팟쇼적입니까?
5. 김순덕 선생은 이번 글을 쓰시는데 자신의 역사적 판단은 제쳐두었어요. 그리고 단순히 1919년으로 갈까? 1948년으로 갈까? 방황하다가 3분이 1쯤은 1919년, 또 3분의 1쯤은 그래도 미국 유학파가 옳겠지 하는 생각으로 그쪽으로 편향되었는데, 나머지 3분의 1을 어떤 쪽으로 갈까 머뭇했습니다. 그런 연후 아무래도 육사 졸업하고 한때 전두환이 만든 당에서 국회의원한 사람 편에 서기는 팟쇼편에 섰다는 오해받기 두려워 1948년 건국론쪽으로 기
울어진 것 같습니다(내가 과도하게 의심한건가요?). 김순덕 대기자님! 종래의 냉정한 필봉으로 돌아오시기 바랍니다. 이번에 얼버무린 태도는 당신의 것이 아닙니다. 정확하게 우리 독립운동 하신 선열들의 편에 서주시기를 간곡하게 권고합니다.
2023년, 대한민국 105년 7월 이종찬
김순덕 대기자 dobal@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