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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광장/김금희]모두가 모두에게 ‘판다’

입력 | 2023-07-18 23:45:00

동물원 판다 영상 보며 위로와 애정 느껴
‘산다’는 것만으로 가치를 획득하는 세계
생명들, 하루 보내는 매순간 기적 아닌가



김금희 객원논설위원·소설가


무언가에 한번 빠지면 헤어나오기 힘든 나는 되도록 ‘덕질’은 하지 않으려 노력하며 산다. 덕질은 어떤 대상을 좋아하면서 그와 관련된 것들을 모으거나 찾아보는 행위를 말한다. 그런데 최근 판다들의 세계에 빠지고 말았다. 아마 모두가 알고 있을 모 동물원의 판다 식구들, 아이바오, 푸바오, 러바오 때문이다. 동물원에 가지 않고 동물 쇼 등을 소비하지 않는 나로서는 난감하고 당혹스러운 일이었다. 시작은 푸바오와 사육사가 교감하는 장면을 우연히 인터넷에서 보면서였다. 푸바오는 느긋해 보였고 사육사는 다정해 보였다. 그날부터 콘텐츠들을 파고들었다. 2016년 중국에서 처음 건너와 낯선 환경에 잠 못 들던 어린 아이바오가 문득 잠에서 깨어 어둠 속을 서성일 때 그 곁에는 침낭 속에서 자며 며칠을 지키던 사육사가 있었고 그 둘은 유리창 하나를 두고 괜찮다며 손바닥을 마주 댔다. 그 오래전 영상이 왜 내게 그렇게 중요한지 알지도 못하면서 나는 몇 번이나 돌려 보았다.

뒤늦게 시작된 덕질의 장점은 콘텐츠가 무한히 쌓여 있다는 점이었다. 이미 칠팔 년 전부터 판다들의 모습이 영상으로 기록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최근에는 공식 계정뿐만 아니라 유튜버들이 직접 동물원에 가서 콘텐츠화하고 있기 때문에 정말 마르지 않는 샘처럼 새로운 영상들이 업로드됐다. 나는 어느덧 하루 두 시간쯤은 영상들을 찾아보고 있었고 때론 집에 가서 빨리 판다들을 보고 싶은 마음에 외출이 얼른 끝났으면 하고 초조해하기도 했다. 글을 쓰러 나가기 싫을 때면 쓰고 돌아와서 판다 영상을 더 보는 것으로 내 마음을 달래기도 하고, 때론 가만히 있을 때조차 판다들이 내는 대나무와 죽순 씹는 소리가 환청처럼 들리는 것 같았다.

“너, 보던 거 계속 보는 거지?”

저러다 말겠지 했던 덕질이 계속되자 남편이 약간 우려하듯 물었다. 나는 뭘 모르는구먼, 하는 표정으로 “아직 못 본 게 더 많아” 하고 대답했다. 하지만 그건 반만 진실이었다. 영상을 보다 보면 그전 콘텐츠를 재편집하거나 그다지 다르지 않은 포맷을 가진 것들도 많았으니까. 하지만 이상하게도 본 것을 또 봐도 지루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럴 때마다 이 ‘좋은 상태’는 더 뜨겁고 묵직해지는 기분이었다. 나는 용인에 가서 실제로 봐야겠다며 별렀다. 남편은 동물원을 소비하지 않겠다고 하던 내 결심을 상기시켰다.

“판다는 멸종취약종이잖아. 인간이 보살필 수밖에 없다고.”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나도 자신은 없었다. 자연에 대한 인간의 개입이 얼마나 타당성을 지니는가는 아직 내가 확정하지 못한 부분이니까. 곰의 초기 형태인 판다는 육식동물의 내장기관을 가진 채 초식동물의 습생으로 진화했는데, 거기에는 대나무라는 식물과의 공존이 기적적인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그러니 반대로 판다가 멸종 위기를 맞게 된 건 인간 문명에 의해 대나무 서식지가 줄어들고 있는 현실 때문일 것이다. 영상으로 만나는 판다들에게 위로와 애정을 느끼면서도 나는 좀 더 근원적인 차원에서는 이런 ‘덕질’마저도 이기적으로 느껴져 미안해지곤 했다.

며칠 전 평소에는 잘 먹지도 않던 ‘스낵 당근’을 사서 씹으며 영상을 보고 있는 내게 남편이 “판다들이 왜 그렇게 좋아?” 하고 물었다. 그 진지한 물음에 먼저 느껴진 건 좀 과장된 표현 같지만 어떤 회한이었다. 생각해보니 그건 그냥 좋은 것과는 달랐다. 귀엽다거나 재밌다거나 신기하다거나 하는 것과는 다른, 어떤 마음의 충족이었다.

생명을 지닌 존재들에게 하루를 보내는 것은 매 순간이 기적 아닌가. 먹고 자고 움직이고 소화시킨 것은 적절히 배출하고, 때가 되면 짝을 찾고 여건이 된다면 새 생명을 낳는 것, 이미 그것만으로도 그 생명은 그가 할 수 있는 최대의 기량을 이뤄내고 있는 셈이다. 영상 속 사육사는 매번 판다들의 바로 그 점을 평가하고 칭찬하며 그 사실만으로 사랑한다고 말해준다. 그렇듯 ‘산다’는 사실만으로 가치를 획득하는 세계, 그렇게 해서 내가 나로서 안전하고 사랑받는 세계. 그건 인간들이 늘 바라면서도 사실상 한 번도 이룬 적 없는 나날들이었다. 그러고 보니 나는 바로 그 점에서 빠져든 것이었다. 산다기보다는 ‘잘’ 사는 게 중요하다며 자꾸 뭔가를 더 요구하는 세상에 넌더리가 난 것이었다. 그 속에서 지치고 슬퍼진 인간들이 꿈꾸는 세상은 적어도 지금과는 많이 다를 것이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판다가 있다. 다른 세계를 지시해 주기에 더더욱 멸종되어서는 안 되는 판다와, 그들을 ‘덕질’하며 스스로의 가치에 대해 조금은 더 낙관해 보는 인간 ‘판다’들이 말이다.





김금희 객원논설위원·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