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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에서/유근형]정당 현수막 난립 방지법 외면하는 현역 의원들

입력 | 2023-07-19 23:42:00


여의도 정치권에 남아 있는 훈훈한(?) 문화가 있다. 현역 국회의원들의 ‘법안 발의 품앗이’다. 법안을 발의하려면 최소 10명의 공동발의자(의원)가 필요한데, 서로 이름을 빌려주는 것이다. 법안 취지에 공감하는 의원들이 이름을 올리는 게 기본이지만 인지상정으로 도와주는 경우도 적지 않다. 특히 당 대표 등 지도부가 발의할 땐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이름을 올리는 경우가 상당수다. 이 때문에 ‘법안 공동발의자 수가 곧 힘’이란 말도 나온다.

그런데 최근 공동발의자를 모으는 데 어려움을 겪는 의원이 있다. 정당 현수막 무제한 허용을 막는 ‘옥외광고물법 개정안’을 준비 중인 더불어민주당 최혜영 의원(비례대표)이다. 법안 발의 준비를 시작한 지 4개월째인데 공동발의자를 단 1명밖에 못 얻었다. 그나마 같은 당에선 찾지 못해 정의당 류호정 의원에게 부탁해 이름을 올렸다. 공동발의 요청을 받고 이름을 올렸다 내용을 확인한 후 빠진 의원도 있다.

최 의원은 동료 의원 십수 명에게 법안 취지를 설명하고 공동발의를 요청했지만 번번이 거절당했다고 한다. 지역구 의원들은 물론 지역구 입성을 노리는 비례대표들도 마찬가지였다. ‘현수막’이란 홍보 수단이 필요한 현역 의원들이 국민들의 피로감과 현장의 혼란을 외면한 것이다.

특히 정당 현수막은 현역 의원과 당협위원장(지역위원장)만 걸 수 있어 도전자를 차단하는 효과도 상당하다. 최 의원은 “평소 가까웠던 의원들이 ‘법안 취지에는 공감하지만 (총선 전인) 지금은 안 된다’고 하더라”며 안타까워했다.

의원들의 이 같은 행태는 정당 현수막 본연의 취지에 반하는 것이다. 행정안전부 지침에 따르면 정당 현수막은 정당의 비용(보조금)으로 만들어야 하고, 정책을 담아야 한다. 하지만 상대 당에 대한 원색적 비난과 낯 뜨거운 자기 홍보가 현수막의 대다수인 게 현실이다. 심지어 자신이 당내 원내수석부대표를 맡았다는 내용의 현수막을 단 의원도 있다. 개인 돈으로 현수막을 여기저기 거는 의원도 적지 않다. 현역 의원 눈치를 보는 지자체 공무원들은 편법이라는 걸 알면서도 외면하고 있다. 금지된 사전 선거운동이 곳곳에서 펼쳐지는 것이다.

현역 의원들이 정당 현수막 문제에 눈을 감은 사이 정치 혐오와 피로감은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최근 인천시가 전국 지방자치단체 중 처음으로 난립한 정당 현수막을 강제 철거하자 지켜보던 시민들은 “속이 시원하다”며 박수를 쳤다. 다른 지자체에선 “우리 동네 현수막도 치워 달라”는 민원이 몰리고 있다.

내년 총선을 노리는 현역 의원들은 정당 현수막이란 수단을 스스로 놓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국민들이 할 수 있는 건 ‘현수막이 오히려 역효과’라는 인식을 의원들에게 심어주는 것이다. 길을 걷다 불쾌감 또는 민망함을 안겨주는 현수막을 잘 기록해 두는 건 어떨까. 그리고 사무실에 항의 전화를 하거나 총선에서 찍어주지 않는 것이다. 후보들이 다 현수막을 걸었다면 그나마 덜 원색적인 현수막을 걸었던 후보에게 표를 주는 것도 방법이다. 이렇게 하면 아이들에게 보여주기 민망한 정당 현수막이 동네 거리에서 사라질 수 있을지 모른다.



유근형 사회부 차장 noel@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