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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한과 인해전술 이긴 장진호 철수작전(下)[정전 70년, 끝나지 않은 6·25]

입력 | 2023-07-21 13:44:00

[13회]




동아일보 산하 화정평화재단은 정전(停戰) 70주년을 맞아 6·25 전쟁 3년을 재조명하는 기획 ‘정전 70년, 끝나지 않은 6·25’를 연재합니다. 아픈 과거를 되풀이하지 말자는 취지로 회고록과 연구자료를 바탕으로 전쟁을 통해 각국이 추구했던 목표의 허실을 조망하고 아울러 전국에 산재한 6·25 격전 현장을 찾아 당시 격전 상황도 재구성합니다.




● 스미스 사단장의 ‘느림보 북진’

올리버 스미스 미 제1 해병사단장. 스미스의 신중하고 치밀한 작전 및 부대 운영이 ‘성공적인 장진호 후퇴 작전’을 만들어 냈다. 

장진호 전투는 미군과 국군의 ‘북진 과속’이 유인 매복 포위 전술을 구사하는 대규모 중공군과 부딪혀 전열이 붕괴되는 과정에서 발생했다. 하지만 비슷한 시기 서부전선에서 미 2군단이 군우리 전투에서 치욕적인 패배를 당한 것과는 크게 달랐다. 미 제1 해병사단 올리버 스미스 소장이 상부 명령을 거역하지 않으면서도 현장 지휘관으로서 발휘한 신중함과 치밀함이 ‘전략적 후퇴를 하면서도 패배가 아닌 전투’ ‘후방으로 진격하는 전투’로 만들 수 있었다.

스미스는 빨리 북진하라는 알몬드 10군단장의 명령에 자신의 재량권 안에서 최대한 시간을 끌었다. 산세도 험하고 지독하게 추운 장진호 동쪽에 엄청난 수의 중공군이 숨어 있을 거라는 강한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알몬드 군단장의 비현실적 요구사항에 진격속도를 거의 명령불복종에 가까울 정도로 지연시켰다.(러스, 105쪽)

동부전선의 3개 부대 중 스미스 사단의 북진 속도가 가장 느렸다. 11월 10일부터 26일까지 하루 평균 1.5 km였다. 스미스가 중공군이 덫을 놓고 있다고 확신한 경험적 증거 중 하나는 미군에 밀려 북으로 쫓겨가던 중공군이 황초령에서 다리를 폭파하지 않은 것이다. 그 다리를 건너오라고 손짓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느꼈다.

동부전선 부대의 북진 정점에서 흥남까지 거리
부대
북진 장소
흥남 후퇴
국군 1군단
청진
480km
미 7사단
혜산진
320km
미 제1해병사단
장진호
240km



● 전진하며 후방 대비한 신중함 
스미스는 진격 속도 조절과 함께 장진호 동쪽으로 보냈던 5연대를 다시 불러들여 부대 응집력이 떨어지는 것을 최대한 막았다. 스미스가 해병대가 아니라 육군이었다면 알몬드는 틀림없이 그를 해임했을 것이라고 했다.(핼버스탬, 653쪽)

스미스는 사단 병력을 한 방향으로 모아 전진하면서 부대간 간격을 유지해 적의 중간 침투를 막았다. 앞으로 나아가면서도 후방 주요 지점에는 작전과 보급을 위한 캠프를 설치했다. 특히 스미스는 해발 2천m의 고산지대 하갈우리에 쌍발수송기가 이착륙할 수 있는 임시 활주로를 건설했다.

12월 1일 공사가 절반도 안 끝난 야전활주로에 C-47 수송기 1대가 시험 착륙에 성공해 이튿날부터 본격적인 항공 수송이 시작됐다. 관제탑은 무전기를 탑재한 지프가 대신했고 활주로가 짧아 엔진을 역회전시키면서 착륙했다. 12월 10일까지 하갈우리와 고토리의 임시 활주로에서 총 240회에 걸쳐 4689명의 부상자를 후송했다. 함흥 흥남 원산 등에 있던 해병대 행정부대원과 부상에서 회복한 병력 500여명도 기꺼이 지옥의 한복판으로 돌아와 사기를 높였다. 스미스의 신중함으로 미군은 중공군에 엄청난 출혈을 강요하면서 포위망을 탈출했다.(나무위키)

장진호 전투에 참가한 미군들이 눈덮인 상중턱에 엎드려 전투를 하고 있다.  




● ‘다른 방향으로의 진격’
스미스 사단장은 하갈우리에서 많은 기자들의 질문을 받았는데 유담리에서 하갈우리로의 이동이 ‘후퇴하는 것이냐’는 질문이 이어졌다. 한 영국 기자는 ‘후퇴 작전’이냐고 물었다.
“후방이 없으면 후퇴가 아니다. 포위당해 있을 때는 후퇴도 철수도 할 수 없다. 유일한 방법은 돌파해 나가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공격해야 하는데 지금 우리가 하려는 것이다”
그의 이 말은 24시간도 안돼 미국 전역에서 발행되는 신문에서 “후퇴라니, 빌어먹을 우리는 다른 쪽으로 공격 중이라구!”이라는 말로 보도됐다.(러스, 502쪽). 5연대장 레이먼드 머레이 중령은 스미스 사단장의 이 말을 인용한 훈시에서 ‘후퇴가 아니다’는 의미를 더욱 분명히 했다. “우리가 향할 바다쪽 뒷길에 더 많은 중공군이 우리의 진로를 막고 있다. 우리는 다른 방향으로 공격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후퇴란 없다”. ‘다른 방향으로의 진격’이란 말은 미 해군의 장진호 후퇴 작전을 상징하는 한 마디가 됐다.(히긴스, 249쪽)





● 장진호 전투의 ‘나비 효과’ 
미 제1 해병사단과 7사단 31연대는 장진호 전투에서 후퇴하면서도 2주 가량 북한 10개 사단에 막대한 타격을 입히면서 묶어뒀다. 이로써 더 멀리 북으로 올라갔던 동부전선의 국군 1군단과 미 10군단 잔여 부대가 후방으로 내려오는 시간을 벌어줬다. ‘전반적인 전략적인 패배속에서 이루어 낸 일련의 전술적 승리’라는 말이 장진호 전투의 성격을 잘 표현했다.(러스, 611쪽) 중공군의 대규모 참전을 모르고 대비하지 못한데다 동서부 전선이 서로 보조를 맞추지도 않고 ‘무사안일’ 북진을 하다 퇴각하는 ‘전략적 패배’가 있었다. 그 와중에도 미 해병 1사단은 2주 가량에 걸쳐 흥남으로 철수하면서 포위한 중공군에게 큰 피해를 입혀 ‘전술적 승리’를 거둔 것이다.

중공군 9병단은 장진호 전투에서 입은 타격으로 병력 보충 등을 한 뒤 이듬해 3월에나 전선에 복귀했다. 3개월 이상 공백기가 생긴 것이다. 서부전선에서 유엔군이 파죽지세로 밀려 38선이 돌파되고 1월 4일 중공군이 서울을 재점령했지만 동부전선의 9병단 12개 사단은 12월 말부터 전개된 3차 대공세에 참여하지 못했다. 동부전선에서도 서부전선처럼 밀렸다면 이듬해 1월 중하순 중공군이 37도선에서 남진(南進)을 멈추지 않았을 수 있었다.(김철수, 200쪽)

장진호 전투 후 미 10군단은 해체됐다. 제1 해병사단은 8군 관할로 돌아간 뒤 1951년 2월 전선에 복귀했다. 그 만큼 양측 모두 혹한속 전투로 홍역을 치렀다.
중국은 장진호에서 미군을 밀어내리고 함흥 흥남 원산 등을 되찾았다는 이유로 장진호 전투를 6·25 전쟁에서 거둔 대표적인 승리로 꼽는다. 지원군사령부와 마오는 9병단에게 무공을 치하하는 축전을 보냈다.(훙쉐즈, 175쪽) 반면 미국은 후퇴하면서 중공군에게 몇 배의 인명 피해를 입혔다. 미군은 상대적으로 적은 피해만 입은 채 중공군 대부대를 3개월 가량 묶어둬 성공적인 ‘지연 작전’을 폈다고 평가한다. 서로가 ‘성공적’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 ‘혹한 속에 빛난 전우애’
장진호 전투는 전우애를 빛낸 많은 일화들을 남겼다. 현지 취재를 온 기자들이 많았고 후에 생존자들의 생생한 증언들을 통해 이런 사연들이 전해졌다.

미 제1 해병사단이 유담리에서 ‘죽음의 덕동고개’를 넘어올 때 900여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는데 600여명의 환자를 들것에 실어 철수했다. 전우의 시체를 실을 차량이 부족하면 자주포 포신에 매달고 오기도 했다.(한 병사의 증언)

11월 30일 알몬드 군단장은 하갈우리에서 미 해병 1사단장과 7사단장에게 “하갈우리에 병력이 집결한 뒤 사단 내 모든 편제화기와 장비는 파괴하고 수송기를 이용해 함흥으로 후퇴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스미스 사단장은 이를 거부하였다. 수송기로 후퇴하면 수송기가 이륙한 후 활주로를 지켜야 하는 최후의 병력은 포기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영화 ‘디보션’ 포스터


12월 4일 미 해군 최초의 흑인 비행사 제스 브라운이 피격당해 하갈우리 인근에서 불시착했다. 브라운의 동료 비행사 톰 허드너는 그를 구하기 위해 중공군의 기총 사격을 받으면서 비상 착륙해 브라운을 구하려했으나 여의치 않았다. 부서진 기체에 몸이 끼어 꺼내지 못했고 남겨진 브라운은 동사했다. 이들의 동료애를 다룬 영화 ‘디보션’이 2022년 개봉됐다. 미국 최초로 흑인 이름을 딴 녹스급 호위구축함 D-1089함 ‘제스 브라운’ 호가 명명됐다.


중국 단둥 항미원조기념관에 전시된 장진호 전투 장면.  중공군 27군(군단)이 미 육군 7사단 31연대 ‘북극곰 부대’를 격멸하고 연대장을 죽이고 연대기를 빼앗았다는 설명을 자세히 달아놨다.  단둥 = 홍진환 기자 






● ‘장진호 동쪽’의 비극과 희생 

제1 해병사단은 당초 장진호를 좌우에서 끼고 돌아 북진할 계획이었다. 사단 주력은 서쪽, 동쪽은 5연대가 배치됐다. 그런데 스미스 사단장이 사단 병력의 분산을 막기 위해 해병 사단은 모두 서쪽으로 가고 동쪽은 미 제7사단 31연대를 배치하기로 했다. 해병대는 사단이 뭉쳐 전진하고 일정 거리와 통신을 유지해 전진할 때나 후퇴할 때 피해를 줄였다.

하지만 급하게 동쪽을 맡게 된 31연대는 많은 착오와 작전 실패 등으로 피해 규모는 호수 서쪽의 사단 병력에 버금갈 정도로 컸다. 특히 31연대에 ‘뻐꾸기 대대’처럼 배속된 32연대 1대대인 ‘페이스 특수임무부대’는 대대장인 페이스 중령이 사망하는 등 가장 큰 피해를 입었다. 중공군의 공격으로 31연대가 철수할 때 ‘페이스 대대’에 통보도 없이 홀로 남겨두고 떠나버렸기 때문이다.


중국 단둥 항미원조기념관의 장진호 전투 소개 코너는 눈과 얼음으로 뒤덮인 혹설속 전투 상황을 재연해 놓았다.  단둥 = 홍진환 기자 




● 잇단 실책이 부른 비극
첫 실패는 제1 해병사단 5연대가 빠져나간 자리를 메운다며 서둘러 ‘페이스 임무부대’를 배치한 것이다. 연대 병력이 지키던 곳을 한 개 대대가 맡다보니 측후방 진지를 미처 다 점령하지 못해 구멍이 뚫렸다. 27일 밤 중공군이 호수 동서쪽에서 동시에 공격해 왔는데 U자형으로 침투해 공격했다. 한 개인호에서는 카투사 한 명이 머리가 없어진 채 앉아있었다. 27일 하루 밤에 전방 한 개 중대에서만 8명이 전사하고 20명이 부상했다.

이런 상황인데도 28일 알몬드 군단장이 페이스 임무부대 방어진지를 찾아 페이스 대대장에게 “중공군은 북쪽으로 도망치는 낙오병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다.(애플먼, 140쪽). 중공군 80사단이 포위 공격하고 있는 상황을 알지 못했다. 알몬드는 페이스 중령 등 3명에게 은성훈장을 주고 떠났다. 페이스 대대장은 그가 떠나자 훈장을 눈에 던져 버렸다고 한다.

31연대가 각 부대를 장진호 동쪽 길이 약 16km의 도로를 따라 7개의 각기 다른 장소에 분산 배치한 것도 큰 실책이었다. 적의 측후방 침투가 용이했기 때문이다. 29일 31연대장 매클린 대령이 ‘어이없이’ 실종된 것도 적이 후방으로 침투한 것을 몰랐기 때문이다. 매클린은 부대 남쪽 후방에서 접근하는 부대를 예하 2대대로 잘못 알았다. 상호 사격을 하다 홀로 사격중지를 요청하기 위해 접근하다 중공군에 붙잡혔다.

31연대는 철수하면서 원형 방어가 아닌 도로를 따라 길게 병력과 장비가 이동해 적의 분리 타격에 쉽게 노출됐다. 미 10군단은 사용할 수 있는 항공 자원의 절반 가량을 투입했지만 지상에서 저지르는 실수 때문에 피해를 줄일 수 없었다.

알몬드는 29일 31연대를 하갈우리로 후퇴하라고 지시한다. 그런데 최북단에 있던 페이스 임무 대대에는 철수 명령이 전달되지 않았다. 고립된 페이스 부대는 80시간 동안 중공군의 공격을 받아 ‘학살’을 당했다. 땅이 얼어 묻지 못한 얼어서 뻣뻣해진 시체는 제방 아래에 4단으로 열을 맞춰 눕혔다.(애플먼, 253쪽) 12월 1일 장진호 얼음판 위로 페이스 부대원 200여명이 탈출했는데 페이스 중령은 심장 위에 부상을 입고 남겨졌다가 적의 확인 사살로 숨졌다. 장진호 전투 현장에 묻혔던 페이스 중령의 유해는 2004년 북한이 찾아 8년간의 감식 끝에 신원을 확인했다.



● ‘장진호 동쪽’의 희생과 기여 
장진호 동쪽 31연대는 장교만도 맥클린 연대장, 페이스 대대장 등 40여명이 희생됐다. 4,5일간 중공군 80사단의 공세를 받아 막대한 피해를 입으면서도 80사단이 미 제1 해병사단의 본부가 있는 하갈우리를 공격하는데 참여하지 못하게 했다. 이들이 희생되면서 버티는 몇 일 동안 하갈우리를 방어하고 야전 활주로를 건설할 수 있는 시간을 벌어주었다.

장진호 전투에서 하갈우리 방어가 핵심이었다. 사단 지휘부가 있는데다 이곳이 넘어가면 유담리의 주력부대 후방이 차단되고, 각 부대의 연계도 끊기는 요충지였다. 중공군 80사단이 장진호 동안에서 맥클린 특수임무부대를 공격하느라 하갈우리 포위 작전에 참가할 수 없어 하갈우리 방어에 크게 기여했다는 것이다. 역사가 애플먼은 “육군 병력(31연대)은 어쩔 수 없이 희생양 노릇을 해야만 했고 그 희생양이 도살된 꼴이 되었다”고 했다.(러스, 475쪽)


장진호 전투에서 전사한 동료들의 시신 앞에서 한 미군 병사가 기도하고 있다. 




● ‘초신 퓨(Chosin Few)’  
장진호 전투에서 미 제1 해병사단의 인명피해는 전사 600여명, 부상 및 실종 3천여명, 동상환자 3700여명이었다. 여기에 ‘장진호 동쪽’의 31연대가 3000여명 병력 중 1900명 가량이 부상으로 후송됐고, 385명이 살아남았다. 나머지는 사망 실종 포로 등이었다. 미군은 생전 처음 겪어보는 인해전술에다가 밤에 피리를 불고 꽹과리를 치며 심리전을 벌이는 중공군에 전멸이 우려될 정도였다.

중공군은 사망 2만5천명, 부상 및 실종 1만2500여명, 동상환자 1만여명 등이었다. 중국 지원군사령관 펑더화이는 12월 8일 마오에게 보낸 전문에서 6만 명의 병력 보충을 요구했다. (‘1129일간의 전쟁’, 273쪽 , ‘나무위키’ 등).

미군은 중공군에 비해 인명 피해가 월등히 적지만 단일 전투에서 입은 피해로는 막대했다. 그래서 ‘초신 퓨’라는 말까지 생겼다. 초신은 ‘장진(長津)’의 일본어 발음이다. 미군이 사용한 지도가 일본어판이어서 이렇게 불렀다. ‘퓨’는 생존자가 적었다는 뜻이다. ‘초신퓨’는 ‘장진호 전투 생존자 전우회’라는 참전용사 모임의 이름이기도 하다. 기념공원은 장진호와 비슷한 분위기의 알래스카에 조성됐다.

장진호 전투의 미군과 중공군 병력과 피해


미군
중공군
부대
제 1해병 사단
9병단(3개 군단, 10개 사단)
제 7사단 31연대
영국 해병 41 코만도대대
병력수
약 3만명
12만명(중국측 계산)
인명 피해(사망)
1300여명
2만5천여명
‘1129일간의 전쟁’ ‘나무위키’. 인명 피해는 양측 주장에 차이가 있음





휴먼 드라마 흥남 철수 

미 제1 해병사단이 장진호에서 중공군 3개 군단 대병력을 2주 가량 저지하는 동안 북쪽까지 진격했던 국군 1군단(수도사단과 3사단)과 미 7사단은 비교적 안전하게 흥남 항구까지 철수했다. 미군은 항구 외곽에 3겹의 저항선을 구축해 해상 탈출 준비를 했다. 저항선 외부에서 접근하는 중공군은 해상에 포진한 항모 7척 등 함포와 공중포격으로 접근을 막았다. 중공군 9병단 5개 사단이 1차 반경 10km, 2,3차 방어선 외곽 2~3km의 3겹 저항선을 공격했으나 산악지대가 아닌 이곳에서는 미군의 막강한 화력이 위력을 발휘했다.

12월 14일부터 24일까지 거제도와 제주도로의 ‘흥남 철수 작전’은 많은 병력과 장비 그리고 피난민을 안전하게 후송했다. 흥남철수 작전은 군부대가 빠져나오기만 한 것이 아니라 작전이 진행된 10일간 적의 대부대를 항구 주위에 묶어두고 상당한 피해를 입힌 ‘철수 전투’이기도 했다. 중공군 9병단은 아군 철수 후에도 15일 가량 흥남에서 지체했다. 장진호 전투에서의 피해와 흥남에서 입은 타격으로 중공군 9병단은 서부전선에서 13병단이 유엔군을 38선 아래로 밀어내며 남진해 내려올 때 합류하지 못했다.(백선엽 3권, 135쪽)


경남 거제의 흥남철수 기념공원의 기념비 앞에 피란민들이 매러디스 빅토리호에 오르는 장면을 재연해 놓았다. 거제 = 구자룡 기자 




● ‘덩케르크’와는 달랐던 흥남 철수   
흥남 항구 외곽 방어선과 화력 지원 속에 미군은 장진호 전투로 큰 인명손실이 난 미 제1 해병사단을 제일 먼저 후방으로 뺐다. 이어 국군 1군단, 미 7사단 순으로 철수했다. 흥남 부두에는 소형 선박부터 미주리 전함, 세인트 폴 순양함 등 총 109척의 선박이 193회의 수송작전을 펼쳤다. 10만 5천명의 미군과 한국군, 1만 7천500대의 차량, 35만t에 달하는 보급품과 장비가 운반됐다.

흥남 부두에는 10만 명 이상의 피난민도 몰렸다. 미군은 당초 2만5천명 가량의 피난민을 수송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김백일 국군 1군단장의 강력한 요구를 미군이 받아들여 약 10만명이 배에 올랐다. 미 10군단 참모장 에드워드 포니 대령은 LST(상륙용 주정) 2척, 상선 3척을 보내 피난민 5만 여명을 배에 태웠다. 특히 상선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약 1만4천명을 태웠다.

원산에서 올라온 미 3사단이 마지막으로 배에 오른 뒤 해군 UDT 대원이 흥남 부두의 방파제를 포함한 주요 시설에 설치한 400t의 다이나마이트, 50만 파운드의 폭탄을 터뜨려 흥남 철수 작전은 종료됐다.

흥남 철수에서 미군이 많은 수의 피난민을 태울 수 있었던 것은 인도적인 고려도 있었지만 미국의 막대한 전쟁물자 조달 능력도 배경으로 꼽힌다. 당시 미국은 전세계 생산의 50% 가량을 차지했다. 함흥에서 피난민을 배에 태우기 위해 버리고 파괴한 장비와 물자를 보충할 수 있는 능력과 여유가 있었다.



경남 거제 흥남철수 기념공원에 세워진 기념비에는 보다 많은 피란민들을 배에 태우는데 기여한 6명의 사진과 이름을 새겨놓았다.  맥아더 장군, 알몬드 10군단장, 포니 대령, 현봉학 박사, 김백일 1군단장 장군, 박시창 대령.  거제 = 구자룡 기자 




● 현봉학 박사의 “피난민은 개종한 기독교인” 기지 

현봉학 박사

피난민은 많은데 할당된 선박이 제한되어 있는데다 피난민 속에는 농민 복장, 두루마기 차림의 첩자도 숨어 있었다. 의사 출신으로 알몬드 10군단장의 통역 겸 고문으로 일했던 현봉학 박사는 포니 대령에게 “대부분의 피난민은 신앙심이 투철한 선교사들에 의해 기독교로 개종된 독실한 신자”라고 설명했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던 때였다. 공산주의를 피해 떠나려는 기독교인들을 버리고 갈 수 없다는 점을 부각했다. 선박 몇 척이 더 피난민 철수용으로 전환하도록 맥아더 사령관의 승인을 얻었다.(웨인트라웁, 295쪽)

흥남에서 피난민 수송에 할당된 선박은 12척이었는데 마지막 수송선이 매러디스 빅토리호였다. 항공유 운반선인 빅토리호는 정원 60명으로 이미 선원 47명이 타고 있었다. 규정대로라면 13명밖에 더 탈수 없었다. 선장 레너드 라우는 포니 대령과 협의해 25만t의 군수물자를 내리고 피란민 1만 4천명을 태웠다. 24일 마지막으로 출항한 빅토리호는 25일 한 명의 사상자도 없이 거제 장승포항에 입항했다.

운항 중 4명의 산모에게서 5명의 아이가 태어나 ‘크리스마스 기적의 배’로 기네스북에 등재됐다.(최상진, 123쪽). 미국인 선원들은 5명 아이에게 태어난 순서대로 ‘김치 1~5호’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2023년 73세가 된 ‘김치 1호’ 손양영 씨는 언론 인터뷰에서 “모친은 평생 피란길에 북에 두고 온 형과 누나 등을 위해 기도했다”고 말했다.(연합뉴스 2023년 6월 27일)


경남 거제 흥남철수 작전 기념공원의 기념비 뒷벽에 새겨진 피란민이 선박에 오르는 장면 부조 벽화.  거제 = 구자룡 기자 






구자룡 화정평화재단 21세기평화연구소장 bonh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