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세식 화장실에 죽음을!”을 외치는 유쾌한 전시를 선보인 The Dry Collective(왼쪽부터): Barbara Motta, Eero Renell, Arja Renell, Janne Teräsvirta, Antero Jokinen, Emmi Keskisarja.사진: Pertti Nisonen / Archinfo
독자 여러분 안녕하세요?
오늘은 ‘영감 한 스푼’에 새로운 맛을 더해줄 게스트 필자를 모셨습니다. 큐레이터, 통번역자, 비평가로 활동하고 있는 박재용님께서 올해 베니스 건축 비엔날레의 유쾌한 전시들을 감상한 소감을 들려드립니다.
스탠드업 코미디언으로도 활동하고 있는 재용님이 ‘우리 한국의 전시들도 이렇게 농담도 하고 어깨에 힘을 뺐으면 좋겠다’며 나눈 이야기에서 이 뉴스레터는 시작되었습니다. 자세한 이야기를 아래에서 만나보세요 :)
(*게스트 필자의 견해는 본 뉴스레터의 편집 방향과 무관합니다)
많은 예술계 사람들에게 베니스 비엔날레는 일종의 도시 전설입니다. 여기저기서 소식을 듣긴 하지만 실제로 방문하는 사람은 드물고, 막상 방문을 하더라도 며칠 만에는 절대 다 볼 수 없는 규모거든요.
‘베니스 비엔날레’라고만 하면 큰 전시 하나만 열리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해 비엔날레 주제를 담은 (수백 명의 작가를 선보이는) ‘주제전’과 세계 각국이 저만의 전시를 선보이는 ‘국가관’, 거기에 수십여 개의 ‘병행전시’, 심지어 비엔날레 기간 동안 베니스 전역에서 열리는 또 다른 전시들까지…
이 모두를 합치면 비엔날레가 열리는 6개월 동안 족히 100개 이상의 전시가 동시에 열립니다. 그러니 ‘언젠가 한 번은 비엔날레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 봐야지’라는 다짐은 ‘올해는 꼭 다이어트에 성공해야지’라는 새해 다짐처럼 실현하기 쉽지 않고, ‘베니스 비엔날레를 봤다’는 말만으로는 도대체 그 많은 전시 중에 얼마만큼을 본 건지 알기 어렵습니다.
이렇게 무시무시한 규모를 자랑하는 예술 이벤트인 덕분에 베니스 비엔날레를 ‘올림픽’과 비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참, 우리가 아는 그 ‘올림픽’에 실제로 예술 부문이 존재한 적도 있었답니다. 이것에 관해서는 다음 기회에…)
주로 한국에서 비평가, 큐레이터로 일하고 있는 저는 작년부터 새해 다짐만 같았던 ‘베니스 비엔날레 전부 다 보기’를 실천하기 위해 주변 동료들과 함께 아예 팀을 꾸려 베니스에서 몇 주 동안 시간을 보냈습니다.
100여 개의 전시를 하나씩 다 보고 의견을 나누기 위해 만든 팀의 이름은 ‘베니스로 떠난다’는 뜻의 ‘오프투베니스’인데요, 정직한 이름으로 팀을 만든 덕분인지 작년과 올해 미술, 건축 비엔날레에서 200여 개의 전시를 빼놓지 않고 볼 수 있었습니다.
라트비아관에서 필자사진: 박재용
선발 과정을 거쳐 전시를 선보이는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뭐든 보여준다면 왠지 엄청나고 비장하고 진지하고 심각한 내용이어야만 할 것 같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비엔날레의 주제전이나 각 국가별 전시 등에 참여하는 작가나 큐레이터, 건축가가 되었다고 상상해봅시다. 베니스 비엔날레 참가는 그야말로 일생일대의 기회가 아닐 수 없습니다. 말하자면 처음이자 마지막일지 모르는, 6개월 동안 전 세계에서 찾아오는 수십만 명의 전문가와 일반 관람객에게 자신의 작업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인 것이지요.
많게는 2000명의 사람이 모여 일하고 회의했던 곳을 21세기의 미술가 한 명이 자신의 작품 한 점으로 가득 채우다니… 전시를 볼 때는 감탄사를 연발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너무 과했던 것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일시적으로 설치되어 폐기되는 작품이나 전시장 구조물은 대부분 재활용도 할 수 없는 소재로 만들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안젤름 키퍼의 거대한 회화 전시 전경. 사진: Andrea Avezzù, Courtesy Gagosian, Courtesy Fondazione Musei Civici Venezia
● 전시장 앞 등장한 ‘변기 살해 현장’(!)
핀란드 파빌리온 앞에 꾸며진 수세식 변기 살해 사건(?) 현장. 자세히 보면 사건 날짜가 2043년 5월 18일, 그러니까 올해 건축 비엔날레 프리뷰로부터 정확히 20년 뒤입니다. 사진: 박재용
그런데 이 ‘사건 현장’은 핀란드 파빌리온이 선보인 전시 <Huussi>(‘후우씨’라고 읽습니다)의 도입부였습니다. ‘후우씨’는 핀란드의 전통 퇴비 화장실(한국에서는 이를 ‘푸세식’이라고 부릅니다)을 부르는 명칭인데요, 핀란드는 올해 베니스 건축 비엔날레 예술 감독 레슬리 로스코가 제시한 “미래의 실험실”이라는 주제에 맞춰 전 세계의 수세식 화장실을 푸세식 퇴비 화장실로 교체하겠다는 진지하지만 농담 같은 내용으로 전시를 꾸몄습니다.
자르디니 공원에 독립적인 건물이 없는 대부분의 나라가 전시장으로 사용 중인 옛 해군 병기창 ‘아르세날레’ 건물에선 건축 전시 아이디어를 쇼핑할 수 있는 팝업 슈퍼마켓이 등장하기도 했습니다. 컴컴하고 길쭉한 건물을 칸칸이 나눠 각 나라의 전시가 이어지는 아르세날레 건물에서 도무지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전시의 행렬 가운데 목이 말랐던 저는 어두운 전시장 너머로 (한국의 편의점처럼) 익숙한 조도의 빛을 보고선 시원한 음료수를 기대하며 발걸음을 재촉했습니다. 찜통 더위 탓에 근처에 가기도 어려운 건물 밖 간이 매점을 대신해 쾌적한 실내 매점이 생긴 거라고 생각했던 거죠.
슈퍼마켓이나 편의점에서 들려올 법한 잔잔한 음악이 흐르던 라트비아 파빌리온. 사진 속 공간의 좌우로는 컴컴한 아르세날레 건물에 다른 나라의 전시가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사진: Andrea Avezzù, Courtesy La Biennale de Venezia
하지만 그곳은 다름 아닌 라트비아의 전시장이었습니다. 라트비아가 베니스 건축 비엔날레에 처음 참가한 2002년부터 2021년 비엔날레까지 참여한 나라들이 각자의 전시를 통해 제안한 506개를 장바구니에 담아 계산할 수 있는 ‘건축 전시 아이디어 슈퍼마켓’을 만든 거죠.
이곳에선 세계 각국이 비엔날레에 참여하며 주제로 삼았던 여러 아이디어를 담은 쇼핑 카탈로그도 한 부 얻을 수 있었는데요, 한국의 베니스 비엔날레 참여 역사상 최초로 황금사자상을 받았던 전시 <한반도 오감도>가 ‘2014년도의 핫픽’으로 실려 있기도 했습니다. (506가지 건축 전시 아이디어를 쇼핑할 수 있는 온라인 쇼핑몰도 마련되어 있으니, 한 번 들러보시길 추천드립니다.)
이외에도 “집”이라는 주제를 다루면서 정말로 집을 한 채 빌려 비엔날레 기간 동안 ‘퍼포머’들이 돌아가면서 그곳에서 전시장 지킴이 겸 세입자로 살아가는 전시를 선보인 에스토니아, 지난 미술 비엔날레의 폐 건축 자재를 모아 온오프라인에서 열람할 수 있게 만든 독일 등 “미래의 실험실”이라는 진지한 주제를 이보다 더 경쾌한 농담처럼 풀어낼 수 있을까 싶었던 나라가 많았습니다.
이런 전시를 기획한 큐레이터들은 분명 농담을 잘 하는 사람들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이 경쾌한 전시들은 결코 밝지 않은 지구의 미래를 건축을 통해 풀어내는 전시라면 어련히 심각한 그래프와 도면, 정교한 모형으로 가득하지 않을까 생각했던 저를 머쓱하게 만들어주었습니다.
비평가로서 또 큐레이터로서는 베니스에 우연히 만난 진지하되 가벼운 농담 같은 건축 전시를 한국에서도 더 많이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커지는 경험이었습니다. 저 스스로도 한 번쯤 그런 전시를 기획해보고 싶다는 마음을 갖게 되기도 했고요. 지금까지 베니스에서 만난 많은 전시, 특히 한국관을 장식했던 전시들을 생각해보면 왠지 “농담을 잘 못하는 사람들”이라는 표현부터 떠오르거든요.
◆ 박재용
큐레이터, 통번역가, 비평가로 활동합니다. 동시대 예술과 이론 서가 ‘서울리딩룸’을 운영하는 장서광이기도 합니다. 베니스 비엔날레의 모든 전시를 다 훑어 보기위해 팀 ‘오프투베니스’를 동료들과 만들었고, 리서치 밴드 ‘NHRB’에서는 프런트맨을 맡고 있습니다. 올해 건축 비엔날레를 보고 돌아오는 길에 내년 베니스 미술 비엔날레 방문을 위한 숙소 예약을 마쳤습니다.
※ ‘영감 한 스푼’은 예술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창의성의 사례를 중심으로 미술계 전반의 소식을 소개하는 뉴스레터입니다. 매주 금요일 아침 7시 발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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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기자 kimmi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