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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그룹과 소속사의 진흙탕 싸움… 벼랑끝 몰린 ‘기적의 중소돌’ [인사이드&인사이트]

입력 | 2023-07-23 23:45:00

피프티 피프티 사태 파장




‘중소돌의 기적’이라고 불리며 놀라운 성공을 이어갔던 걸그룹 ‘피프티 피프티’. 데뷔 7개월 만인 지난달 소속사를 상대로 전속계약 효력정지 가처분 신청을 제기했다. 어트랙트 제공

《K팝 역사상 이런 걸그룹은 없었다. 데뷔 4개월 만에 빌보드 메인 차트 진입, 이후 17주 연속 빌보드 핫100 랭크. 4인조 걸그룹 ‘피프티 피프티’가 그 주인공이다.

‘큐피드(Cupid)’라는 노래 하나로 세계적 인기를 끈 피프티 피프티가 지난달 놀라운 소식을 전했다. 데뷔 7개월 만에 소속사 ‘어트랙트’를 상대로 전속계약 효력정지를 위한 가처분 소송을 냈다. 이렇게 빨리 뜬 그룹이 이렇게 빨리 전속계약을 깨자고 하다니. 초유의 사태다. 이후 양측이 각자의 입장을 밝히면서 여론까지 들고일어났다.

피프티 피프티 사태는 K팝의 글로벌 위상이 높아지면서 생겨난 현상이다. 이번 사태로 드러난 K팝 산업의 단면을 들여다봤다.》






● 법정으로 간 기적의 중소돌

피프티 피프티의 공식 SNS에 올라온 ‘빌보드 핫 100’ 진입 기념 이미지.

걸그룹 피프티 피프티는 지난해 11월 데뷔했다. 데뷔곡은 인기를 끌지 못했지만 올해 2월 발매한 ‘큐피드’가 대박을 냈다. 쇼트폼 영상 중심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틱톡에서 큐피드 영어 버전에 맞춰 춤추는 영상이 인기를 끌면서 3월 ‘빌보드 핫100’에 진입했다. 데뷔 4개월 만으로, 역사상 모든 K팝 그룹을 통틀어 최단기 기록이었다.

한애란 경제부 기자

초스피드 성공보다 놀라웠던 건 ‘어트랙트’라는 중소 기획사 소속이란 점이다. 4대 대형 기획사(하이브, SM, JYP, YG)가 아닌 작은 회사가 이런 기록을 세우자 ‘중소돌(중소기획사 소속 아이돌)의 기적’으로 불렸다.

그런데 지난달 19일 피프티 피프티 멤버 4명이 돌연 서울중앙지방법원에 전속계약 효력정지 가처분 신청을 냈다. 소속사 어트랙트와 결별하기 위해서다. 사유는 크게 세 가지. 소속사가 정산 자료를 제대로 제공하지 않았고, 신체적·정신적 건강관리 의무를 위반했고, 역량(인적·물적자원 지원 능력)이 부족하다는 이유였다.

어트랙트는 곧바로 ‘외부 세력의 강탈 시도’라고 맞섰다. 외부 세력으로는 피프티 피프티의 총괄 프로듀서를 맡았던 안성일 프로듀서(외주용역업체 더기버스 대표)를 지목했다. 전홍준 어트랙트 대표는 그 근거로 워너뮤직코리아 측과 5월에 통화했던 내용을 이달 초 공개했다. 워너뮤직코리아 관계자가 “안성일 대표(프로듀서)한테 전에 바이아웃을 하는 걸로 200억 제안 드린 게 있다”고 하자 전 대표가 “못 들어봤다”면서 “바이아웃이 뭐죠?”라고 반문하는 내용이다. 여론은 급격히 소속사 편으로 돌아섰다.

이후 전 대표가 자신의 차와 시계를 팔고 노모의 돈까지 보태 총 80억 원을 피프티 피프티에 투자했다는 사연까지 알려지면서 여론은 격화됐다. ‘통수돌’, ‘배신돌’이라며 멤버들을 향한 비난이 쏟아졌다.

전 대표는 “하루빨리 멤버들이 소속사로 다시 돌아와야 한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양측은 아직 대화조차 해보지 못했다. 재판부는 26일까지 추가 자료를 받은 뒤 가처분 신청에 대한 결정을 내릴 예정이다.





● “노모 돈 보태 80억 원 들였는데”

아이돌 그룹 한 팀을 데뷔시키는 데 보통 수십억 원이 든다고 알려져 있다. 이번 사태로 ‘80억 원’이라는 구체적인 투자금액이 확인됐다. 왜 이렇게 많은 돈이 들까. 전 대표는 이렇게 설명한다.

“데뷔를 준비하는 2년 6개월간 레슨비·제작비·인건비·월세, 그리고 데뷔 이후 제작비와 인건비, 마케팅 비용까지. 거대 기획사는 자본력이 좋아서 중소 기획사보다 더 많이 쓴다. 우린 퀄리티를 내기 위해 중소 기획사치곤 좀 많이 투자금을 썼다.”

K팝 그룹은 철저히 소속사가 키워내는 구조다. 데뷔 몇 년 전부터 숙소에서 합숙하면서 각종 레슨으로 실력을 쌓는다. 피프티 피프티의 경우에도 보컬·댄스·연기·외국어·운동 레슨까지 받았다. 준비 기간이 길다 보니 그만큼 초기 투자비도 많이 든다. 그래서 그룹 활동 초기엔 당연히 투자금이 수익보다 훨씬 더 큰 마이너스 구조이다. 그룹마다 차이는 있지만 평균적으로 3년 차는 돼야 소속사가 투자금을 회수하고 이익을 낼 수 있다.

특히 어트랙트는 처음부터 해외시장을 노리고 기획과 마케팅에 공들였다. 국내 활동으로 먼저 인지도를 쌓은 뒤 글로벌 프로모션을 진행하는 기존 K팝 그룹과 달리, 해외 이용자가 많은 SNS 틱톡으로 직행했다. 틱톡 마케팅 비용도 상당히 들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재근 대중문화 평론가는 “소속사가 SNS를 주 타깃으로 해서 큐피드 영어 버전에 신경 썼다”며 “콘텐츠 힘도 있지만 소속사의 기획이 중요하게 작용한 성공 사례”라고 설명한다.





● K팝엔 없던 바이아웃 제안

엔터테인먼트 업계가 이번 사태에서 충격적으로 받아들인 건 워너뮤직코리아가 ‘200억 원 바이아웃(buy-out)’을 제안했다는 사실이다. 바이아웃은 프로축구에서 주로 쓰이는 용어. 일정 금액을 지불하면 선수와 소속 구단 사이의 계약을 해지할 수 있는 계약 조항을 뜻한다. 어트랙트가 공개한 녹취록에서 전 대표가 바이아웃이 뭐냐고 묻자 워너뮤직코리아 관계자는 “보통 표현으로 아이들을 다 인수하고, 이런 식으로 말씀을 드린 것”이라고 설명했다.

소속사와 전속계약 기간이 한참 남은 아이돌 그룹을 다른 기업이 거액을 주고 사가겠다고 하는 건 한국에선 매우 낯선 일이다. K팝이 글로벌화했다고 하지만, 국내 엔터테인먼트 업계는 아직 좁은 바닥이다. 서로 사정을 빤히 아는 상황에서 다른 회사가 애써 키워낸 그룹을 돈을 주고 빼오는 건 상도의에 어긋나는 일로 치부된다. 자칫하면 그룹 멤버들에 대해서도 ‘소속사가 고생해서 키웠더니 배신한다’는 프레임이 씌워질 수 있다. 한국 엔터업계 정서엔 맞지 않는다.

워너뮤직코리아의 바이아웃 제안은 달라진 K팝의 시장가치를 보여주기도 한다. 글로벌 시장에서 K팝 위상이 높아지면서, 마치 프로축구 시장처럼 한층 더 자본주의화하는 모습이다. 이남수 키움증권 애널리스트는 “향후 K팝 시장이 엄청나게 커진다면 그땐 프로스포츠 선수처럼 K팝 그룹의 바이아웃 사례가 나올 수도 있을지 모른다”면서 “하지만 아직은 그렇게 하기엔 국내 엔터업계가 너무 좁아서 시기상조”라고 설명했다.





● 제2의 피프티 피프티 사태 막으려면

연예인이 소속사를 상대로 낸 전속계약 효력정지 가처분 신청은 인용되는 비율이 높은 편이다. 최근에도 ‘BAE173’의 남도현과 ‘이달의소녀’ 멤버 12명 전원의 가처분 신청이 인용됐다.

엔터업계에선 이번 사건에서 법원이 어떤 결정을 내릴지에 주목한다.

하 평론가는 “수십억 들여서 기껏 (그룹을) 키워놨는데, 뜨자마자 바로 계약을 깨고 나가버린다면 앞으로 중소 기획사에서 어떻게 신인을 키울 수 있겠냐”면서 “중소 기획사를 운영하는 이들에겐 이 사건이 초미의 관심사”라고 말했다.

중소 기획사는 법적으로 대응할 능력이 약하다. 한 중소 기획사 관계자는 “아티스트가 스케줄이나 건강관리 소홀을 문제 삼아 계약 해지를 요구하면 우리처럼 법적 분쟁에 투입할 여력이 없는 작은 회사는 속수무책”이라고 말했다. 그는 “상황이 크게 달라졌는데도 여전히 기획사가 ‘갑’, 아티스트가 ‘을’이라는 인식이 남아 있다 보니 논란이 불거지면 회사만 비난받기 일쑤여서 아예 그냥 놓아주는 경우도 있다”고 덧붙였다.

과연 소속사는 갑, 아티스트는 을이기만 할까. 엔터업계에서는 이번 사태로 소속사와 아티스트가 예전 같은 갑을 관계이기만 한 게 아니라는 게 드러났다고 본다. 한 대형 기획사 관계자는 “요즘 소속사는 아티스트에게 음악방송이나 시상식에 출연하라고 지시하지 못한다”면서 “일일이 사전 브리핑을 해서 연예인 의사를 반영하지 않으면 피프티 피프티 사태처럼 ‘계약조건 위반’을 이유로 분쟁을 벌이게 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번 일을 계기로 기획사 권리를 더 보호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한국매니지먼트협회 이남경 사무국장은 “2009년 제정된 표준전속계약서는 뒤바뀐 소속사와 연예인 처지를 반영하지 못한다”며 “계약서의 불명확한 조항이 전속계약 파기에 악용되는데, 이를 수정해 기획사에 대한 보호장치도 마련돼야 한다”고 말했다.





한애란 경제부 기자 haru@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