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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설수설/이진영]“남들도 불행하게 만들고 싶었다”

입력 | 2023-07-23 23:54:00


동물은 이유 없이 죽이지 않는다. 인간의 살인에도 대개는 이유가 있다. 돈 때문에, 사랑에 눈이 멀어, 복수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현대 사회 들어 이득 없는 ‘쾌락으로서의 살인’ ‘살인을 위한 살인’ ‘동기 없는 살인’이 등장했다는 것이 살인의 역사를 탐구해 온 영국 문명비평가 콜린 윌슨의 진단이다. 서울 신림동 묻지 마 살인도 지극히 현대적인 살인이다.

▷신림동 사건의 피의자 조모 씨(33)는 21일 오후 2시경 신림역 일대를 돌아다니며 남자 4명에게 흉기를 휘둘렀다. 이 중 20대 남성이 숨졌는데 이 남성이 쓰러진 후로도 10차례 넘게 찔렀다고 한다. 피해자들은 조 씨와 모르는 사이였고, 범행 동기가 없으며, 수법이 잔인하다는 점 모두 묻지 마 범죄의 전형이다. 조 씨는 “분노에 차” 범행을 저질렀는데 분노를 표출할 장소로 “사람이 많은 곳”을 택한 점도 묻지 마 범죄의 특징으로 꼽힌다

▷한국형사정책연구원에 따르면 묻지 마 범죄의 유형은 세 가지다. 첫째 사회에 불만이 있거나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는 현실 불만형이다. 주로 여름에 거리에서 범죄를 저지르고 범행 후에도 현장을 떠나지 않는다. 둘째 정신과 치료 경험이 있고 대인 관계가 원만하지 못한 정신장애형이다. 셋째 만성 분노형은 다른 사람의 의도를 오해해서, 분풀이를 위해, 재미로 범죄를 저지르는 경우다. 세 유형 모두 부모와 불화하고, 경미한 폭행 사건 같은 전조를 보이며, 압도적 다수가 남성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5월 과외 중개 앱에서 만난 또래 여성을 살해한 정유정 사건은 묻지 마 살인이면서도 범죄의 전형에서 벗어나 있다. 피해자와 일면식도 없고, 흉기로 110회 넘게 찌르는 잔혹성을 보였으며,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 점은 다른 묻지 마 범죄자와 같지만, 여성이고 전과가 없으며 ‘광장’이 아니라 피해자의 집이라는 ‘밀실’을 범행 장소로 고른 점은 일반적 유형과 거리가 멀다. 전과자의 재범 방지 등 기존의 묻지 마 범죄 분석에 근거한 예방 정책은 한계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동기 없는 살인이 대두된 배경에 대해 전문가들은 개개인이 귀한 존재라는 자각이 생겨난 동시에 지나친 경쟁과 양극화로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한다는 분노감이 커졌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전통 가족제도 해체 후 헐거워진 인간관계도 분노의 압력을 줄여주지 못하고 있다. 조 씨는 “나는 불행하게 사는데 남들도 불행하게 만들고 싶었다”, 정유정은 “혼자 죽기 억울했다”고 했다. 그게 누구라도 상관없었다. 국적 불문 동기 없는 살인자들의 공통된 범행 동기다. 윌슨이 말한 ‘문명의 과부하에 짓눌린 인간이 내지르는 비명’에 귀 기울여 해법을 찾아야겠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