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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리에서 현리까지 물망(勿忘)의 전투들[정전 70년, 끝나지 않은 6·25]

입력 | 2023-07-26 11:00:00

[14회]




중공군이 보름달 뜨는 날까지 계산해 1950년의 마지막 날 3차 대공세(1950년 12월 31일〜1951년 1월 10일)에 나선 이후 4일만인 1월 4일 서울을 다시 점령했다. 1월 중순에는 평택〜원주〜삼척을 잇는 37도 선까지 밀고 내려왔다. 미군은 금강 방어선까지 밀리면 다시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하거나 한반도에서 철수할 구상까지 했다.

하지만 38선을 넘어온 후 중공군은 약점이 부각되는 반면 유엔군은 장점이 커졌다. 중공군이 북한 산악지대에서 수적 우세를 앞세워 유인 매복하던 수법은 한계가 있었다. 아군은 이제 포위돼도 고슴도치처럼 웅크린 ‘고립 방어’로 버티며 막강한 화력으로 제압했다. 아군은 중공군 개입 이후 38선 이북에서 잇따라 패배한 뒤 위축된 자신감을 되찾고 공세로 돌아섰다. 불의의 사고로 워커 장군이 사망한 뒤 후임으로 부임한 매슈 리지웨이의 ‘위력 수색’을 앞세운 반격이 주효했다.

국군과 유엔군의 북진과 초고속 후퇴
1950년
9월 28일
유엔군 서울 수복
10월 1일
국군 38선 돌파
10월 19일
유엔군 평양 탈환(같은 날 중공군은 압록강 도강 시작)
10월 26일
국군 초산 압록강 도달
↓(전세 역전)
12월 5일
중공군 평양 점령
12월 26일
중공군 38선 돌파
1951년
1월 4일
중공군 서울 점령
1월 10일
유엔군 37도선(평택~삼척) 후퇴

<북진과 후퇴 소요 기간 >
유엔군
중공군 38선 → 평양 : 19일 38선 → 압록강 : 26일압록강 → 38선 : 67일 38선 → 서울 : 9일

중국 단둥 항미원조기념관에 전시된 ‘3차 전역(공세)’ 지도. 서울 방면으로 주공을 잡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1월 8일  수원 원주까지 진격한 것으로 표시됐다.  단둥=홍진환 기자 



● ‘서울 후퇴’ 공성전(空城戰)과 원주 전투
1951년 ‘1·4 후퇴’는 다시 수도를 뺏기는 것이었지만 워커 사망 후 부임한 리지웨이 8군 사령관의 공성전략이기도 했다. 중공군은 12월 26일 38선을 돌파한 뒤 주공(主攻) 방향을 서울로 두고 철원 연천 쪽에서 4개군을 앞세워 압박해왔다. 리지웨이는 서울이 포격권에 들어 많은 피해가 발생하는 것을 막으면서 보다 방어가 유리한 곳에서 반격을 하기 위해 서울 남쪽 60km 지점의 오산〜삼척선까지 작전상 후퇴를 했다.

처음 한강 다리를 먼저 끊어 많은 납북자 피해를 낳았던 것과 달리 서울 시민에게는 1950년 12월 하순 피난령이 내려졌다. 후에 북한도 유엔군의 반격으로 밀려 올라갈 때 서울 사수나 방어 의지를 보이지 않고 3월 5일 군대를 철수시켰다. 서울은 공격과 방어 양측 모두 점령하고 있는 것이 이점도 되지만 부담도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중공군이 서울을 거쳐 남진하는 동안 중동부 전선의 원주가 중공군과 북한군에 의해 한때 점령당했다. 미 10군단 2사단이 원주를 탈환하고 지킨 ‘원주 전투(1월 5~13일)’ 승리는 크게 주목받지 못했지만 공산군이 37도선 이하로 내려가지 못하도록 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남도현, 283쪽). 군우리 전투에서 한 개 연대 규모가 섬멸되는 치욕적인 패배를 당했던 미 2사단으로서는 38선 남쪽에서 설욕하는 전투의 서막이었다. 2월 지평리와 5월 벙커 고지, 9월 단장의 능선전투 등에서 미 2사단은 연승을 기록했다. 무엇보다 원주전투 이후 피아간 접전은 37도선 이하로 내려가지 않았다.

경기 양평군 지평면 지평리지구 전투전적비. 중공군에게 포위당한 채 혈투를 벌였던 전투 현장의 한가운데에 전적비와 미군과 프랑스군 충혼비가 세워졌다. 양평=구자룡 기자 



● 지평리 전투, 전략 전술 리더십의 승리 
중공군 사령관 펑더화이(彭德懷)가 1월 8일 ‘남진 잠정 중단’ 명령을 내리고 원주 전투에서 제동이 걸린 이후 주춤했던 중공군이 2월 중순 경기 양평군 지평리에서 제39군 예하 3~5개 사단으로 공격해 왔다.

2개 군단이 만나는 이른바 전투지경선(戰鬪地境線)인 이곳에는 미 2사단의 23연대만이 주둔하고 있었다. 병력에서 10배가 넘는 중과부적의 상황. 23연대는 둘레 약 12km의 원형으로 진을 치고 부대 간 빈틈을 없애 방어에 나섰다가 중공군이 점차 포위망을 좁혀오자 방어망 둘레를 6km로 축소했다. 이곳은 사단 본진과 30km가량 떨어져 즉각적인 지원도 어려웠다.

경기 양평군 지평리 전투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는 중공군의 나팔.  양평=구자룡 기자 

지평리 전투에 참가한 프랑스 대대는 수동식 사이렌으로 중공군의 나팔 소리에 맞불을 놓아 혼란에 빠뜨린 뒤 돌격해 백병전을 펼쳤다. 지평리 전투기념관에 게시된 수동식 나팔을 돌리는 상황도.  양평 =  구자룡 기자 

지평리 전투에서 프랑스 대대가 사용했던 수동식 사이렌

전투 70여년이 지난 뒤 찾아간 지평리는 주변이 얕은 산으로 둘러싸여 평온하고 아늑한 느낌을 주었다. 전쟁 당시에는 원형으로 둘러싼 산 능선을 따라 촘촘히 방어망을 구축한 채 밤만 되면 물밀듯이 파고드는 중공군과 때로는 백병전까지 벌였던 곳이다. 방어진지 중심부쯤에 세워진 기념관에는 중공군이 불었던 나팔 실물과 프랑스 대대가 사용한 수동 사이렌 사진이 전시되어 있어 야간에 벌인 소음 전쟁이 생각나게 했다.

경기 양평군 지평리전투 기념관은 지평리가 을미의병의 발원지이기도 해서 의병과 전투 기념관이 함께 조성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양평=구자룡 기자 

1951년 2월 13일 어둠이 짙게 깔리자 사방에서 횃불을 들고 징과 꽹과리를 치는 중공군이 밀려들었다. 원형진지 안으로 포탄도 쏟아부어 연대 참모가 전사하고 연대장 폴 프리먼은 부상을 입었으나 후송을 거부하고 진지를 지켰다. 이튿날 날이 밝자 미 공군의 공중 폭격으로 공세는 주춤했으나 다시 밤이 되자 사전 정찰에서 철조망이 없었던 남쪽으로 중공군이 돌파를 시도해 산발적으로 백병전이 벌어졌다.

이틀 밤이 지난 뒤 원형 방어 진지 밖에 대한 미 공군의 맹폭 지원 속에 미 제5 기병 연대가 포위망을 뚫었다. 일본에서 발진한 C-119S 수송기 24대는 14일 3시간가량 보급품을 공중 투하했다. 2박 3일간의 전투에서 중공군은 5400여명이 전사한 반면 23연대는 전사 52명, 실종 42명이었다.

지평리 전투가 끝난 뒤 우그러진 철모와 옷가지 등이 널려 있다. 지평리 전투기념관 전시. 양평=구자룡 기자 



● ‘인해전술’ 극복한 반격의 전환점  

랄프 몽클라르 중장. 대대 병력을 지휘하기 위해 스스로 중령으로 계급을 낮춰 참전했다.  

지평리 전투에는 프랑스가 파병한 1개 대대가 참가했다. 대대장은 1차 대전에도 참전했다 전역한 랄프 몽클라르 중장(이는 레지스탕스 활동 당시 가명이고, 본명은 마그랭 베르느네)이다. 대대급 병력 파견으로 대대장을 맡기 위해 스스로 중령으로 계급을 낮췄다. 프랑스 대대는 중공군의 심리전 무기였던 나팔 소리에 대응해 휴대용 수동식 사이렌 소리를 내면서 중공군 나팔 소리를 삼켜버렸다. 병력 운용의 신호로도 사용했던 나팔 소리가 사이렌 소리 때문에 안 들리자 중공군이 우왕좌왕했다. 이때 프랑스 대대 병사들이 화력을 집중해 공격하고 진지를 박차고 나가 육박전을 벌여 성과를 거뒀다. 프랑스 대대에는 카투사 한국인 병사 101명도 포함됐다. (‘1129일간의 전쟁’, 312쪽)

지평리 전투기념관 전시된 105mm 포탄 탄피와 권총, 칼 등 무기와 장비. 양평=구자룡 기자    

중공군 부사령관 훙쉐즈는 지평리 전투에 대해 “제공권이 없어 고전했다. 미군 전투기가 벌떼처럼 달려들어 맹폭을 가하니 밤에만 공격할 수밖에 없었다. 상대는 지원 병력도 물밀듯이 몰려왔다. 미군은 이 전투 후 전술상 하나의 지점을 고수하면서 인근 부대의 지원이 도착하기를 기다리는 작전에 자신감을 갖게 됐다”고 평가했다.(훙쉐즈, 236쪽)

지평리 전투는 유엔군이 다시 반격의 터닝포인트를 이루게 하는 분기점이자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주눅 들지 않고 승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준 전투였다. 중공군이 수적 우세를 앞세워 매복과 기습, 포위 전술로 북부 산악지대에서 유엔군을 몰아내던 방식이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서로 확인한 전투였다. 비록 적에게 포위돼도 방어 전면을 좁혀 방어하면서 진지 밖 적에 대해 화력을 퍼부은 것이다.

경기 양평군 지평리 전투 기념관을 찾은 방문객들이 남긴 메시지. ‘전쟁은 반복되어서는 안 됩니다’는 문구가 보인다. 양평=구자룡 기자   

지평리 전투가 끝난 뒤 훈장을 받기 위해 서 있는 프랑스대대 부대원들. 지평리 전투기념관 전시. 양평=구자룡 기자 



● 사창리 전투, 국군의 공중증(恐中症)과 가평의 영연방 여단 
지평리 전투의 타격으로 움츠렸던 중공군이 2개월여간 재정비 끝에 무려 70여만 명의 대부대를 이끌고 5차 대공세를 벌였다.

국군 6사단(사단장 장도영)이 강원도 화천의 화악산과 사창리 일대에서 중공군 4개 사단에 포위된 상황은 지평리의 미 2사단 23연대와 비슷했으나 결과는 천지 차이였다. 험준한 산악지형에서 분산되어 있는 예하 연대가 서로 연결되지 못해 틈을 파고든 중공군에게 분리 포위되어 공격을 받았다. 꽹과리 피리 나팔 소리에 ‘초산의 악몽’이 다시 살아났다. ‘고립 방어’를 통해 화력 지원을 받기보다 포위당하는 두려움에 무질서한 후퇴와 도주에 나섰다. 화력 지원에 나섰던 미 포병대대도 포위 타격을 당했다. 사창리 전투(4월 22〜24일) 사흘간 6사단 1만3천여명 병력 중 가평으로 철수해서 남은 병력은 6300여명에 불과했다. 6·25 전쟁 기간 국군에 줄곧 나타났던 ‘공중증(恐中症·중공군을 두려워하는 심리)’이 그대로 드러났다.

경기도 가평읍에 1967년 세워진 영연방 참전 기념비. 영국 호주 캐나다 뉴질랜드 4개국의 국기가 태극기, 유엔기와 함께 게양되어 있다. 가평=구자룡 기자 

사창리에서 장비도 내팽개치고 도망친 국군 6사단의 구멍을 메우기 위해 긴급히 투입된 부대가 영연방 제27여단이었다. 27여단은 영국 미들섹스연대 1대대, 호주 왕립연대 3대대, 캐나다 프린세스 페트리샤 경보병 2대대, 뉴질랜드 왕립 제16 포병연대 등 4개국 연합부대였다. 국군 6사단 패잔병들이 무질서하게 내려오는 것을 보면서 북으로 향하던 영연방 여단은 23일 가평에서 중공군 제20군과 만났다.

영연방 여단은 3일 동안의 가평 전투(4월 23〜25일)에서 부대원의 40% 이상이 사상당하는 피해를 입으면서도 경춘가도를 지켰다. 이를 통해 후퇴하는 국군과 유엔군의 퇴로를 확보하고 수도권 방어를 위한 시간을 벌어줬다. 가평 전투는 수적으로 크게 밀리는 상황에서 ‘버티기 승리’를 통해 중공군의 5차 대공세라는 또 하나의 고비를 넘는 데 기여했다.

가평지구 전투기념비. 출처 국가보훈부 

경기도 가평의 영연방 참전비 옆에 영국 미들섹스 연대 장병을 추모하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가평=구자룡 기자  



● ‘고립 방어’의 성공 사례 설마리 전투
경기 파주군 적성면 설마리 감악산 일대에서 영국군 제29여단을 중공군 제63군 3개 사단이 포위했다. 지평리나 가평 전투와 마찬가지로 ‘고립 방어’ 의지만 있으면 더 이상 문제 되지 않았다. 방어선을 최대한 줄이고 밤을 버틴 뒤 낮에는 막강한 화력 지원으로 방어선 외곽의 중공군에게 타격을 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온창일 등, 210쪽)

경기 파주군 적성면의 설마리 전투 기념공원에 영국 글로스터 대대원들 동상이 세워져 있다. 파주=구자룡 기자  

영국 제29여단은 병력에 비해 넓은 정면을 담당한 데다 각 대대 및 중대가 서로 떨어져 상호 지원할 수 없는 약점을 가진 상황에서 1951년 4월 22일 밤 중공군 제63군 3개 사단이 일제히 임진강을 건너와 공격했다. 글로스터 대대원 652명의 10배도 넘는 규모였다. 235 고지로 철수한 좌측 담당의 글로스터 대대는 후방으로 침투한 중공군에 포위 고립됐다. 이 전투에서 탈출한 영국군은 67명에 불과하고 나머지 59명 전사, 장교 21명을 포함한 526명은 포로가 됐다. 사흘간 피로 버틴 설마리 전투는 중공군의 서울 진입을 결정적으로 지연시켰다.

강원도 인제의 오미재 고개 정상에 해발 500m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주변이 모두 깊은 산속이어서 이곳이 전략적 요충지인 것을 느끼게 한다. 인제=구자룡 기자 



● 국군과 미군의 관할권 다툼으로 생긴 구멍, 오마치(오미재) 고개
1951년 5월 태백산맥 서쪽 산악지대는 6·25 전쟁이 터진 후 새로 창설된 9사단과 11사단을 중심으로 한 국군 제3군단이 맡았다. 미군 주축의 유엔군이 주로 담당한 서부전선에 비해 열세였다. 조중(朝中) 연합군사령관 펑더화이는 막강한 화력의 미군이 주력인 서부보다 이곳이 약한 곳으로 보고 돌파하기로 했다. 당시 중동부 전선의 국군은 6개 사단인 반면 중공군은 18개 사단을 투입했다.

현리 전투의 참패는 이런 수적 열세 때문만은 아니었다. 발단은 국군과 미군 간 관할권 공백과 다툼이었다. 자연 지형에 대한 고려 없이 관할지역을 구분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인제군 31번 국도의 오마치고개는 미 10군단 관할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오마치 고개의 위아래 보급로는 국군 3군단에 속했다. 상체와 하체는 국군이 맡고 허리는 미군에 속하는 기현상이 발생했다. ‘주요 지형지물은 분할하지 않는다’는 전술 교리에 맞지 않았다. 더욱이 이곳은 ‘차단되면 끝이다’고 생각될 만큼 요충지였다.

3군단은 미군 관할 지역에 29연대를 배치했다. 이게 화근이 됐다. 미10군단이 왜 남의 관할 지역에 병력을 배치하느냐며 철수하라고 했다. 결국 29연대를 빼면서 1개 대대만 남겨놓았는데 이번에는 더 상위인 미 8군에서 철수를 요구했다. 4월 11일 오마치에서 대대 병력마저 철수시켰다. 문제는 국군이 병력을 모두 빼낸 뒤 미군이 즉각 배치되지 않은 것이다. 인제 홍천 횡성 정선을 이어주는 교통과 전략의 요충지를 비워둔 것이다.

강원도 인제 오미재 고개에 세워진 현리지구전투 전적비. 인제=구자룡 기자 



● 방어, 초기 대응, 후퇴 총체적 실패 
중공군 선발대 1개 중대가 17일 오전 7시30분경 오마치 고개를 장악했다. 그들은 30km가량 떨어진 곳에서 출발해 야간 12시간 동안 산악지대를 시간당 평균 2.5km씩 행군했다. 선발대 도착에 이어 곧 제60사단 전체가 밀물처럼 쏟아져 올라왔다.

오마치 고개가 적에게 넘어가자 퇴로가 차단돼 포위당할 것을 우려한 3사단의 김종오 사단장이 진지 사수를 포기하고 철수를 명령한 것이 대 실책이었다. 미군이 우세한 화력과 공군력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포위당하는 것이 곧 전멸은 아니었다. 지평리 전투나 바로 옆 벙커고지 전투가 이를 증명했다.

그런데 3사단은 철수를 위해 현리에 집결한 뒤 적이 장악하고 있는 오마치 고개 돌파를 시도했다. 고개를 점령하고 있는 부대 규모를 오판했을 수도 있다.

고개를 장악한 중공군의 공격을 받자 부대원들은 무거운 공용화기는 물론 개인화기까지 버리고 무질서하게 주위 방대산 등을 타고 도주했다. 일부 간부는 계급장도 떼고 철수했다고 한다. 퇴로가 차단됐다는 이유만으로 전투를 포기하고 사단장부터 말단 사병까지 줄행랑을 쳤다. 70km가량 남으로 내려왔을 때 3사단은 34%, 9사단은 40%가량만이 수습됐다.(남도현 324쪽)

강원도 인제의 현리전투 위령비. 3군단은 ‘전투에서 희생된 선배 장병들의 시신을 화장했던 곳에 위령비를 세운다’며 ‘부끄러웠던 현리전투를 숨기려 하기보다 와신상담의 계기로 삼겠다’는 다짐을 담은 위령비 건립 취지문을 새겨놓았다. 인제=구자룡 기자  

유재흥 당시 3군단장은 “솔직히 하룻밤 사이에 아군 전선을 뚫고 산악지대를 30km나 주파하리라고는 미처 예상치 못했다”고 회고했다. 그는 관할권이 겹쳐 오마치에서 부대를 철수하더라도 고개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소규모라도 부대를 배치하지 않은 것이 천려일실이었다고 했다. 부대가 후퇴하면서 전혀 보조를 맞추지 못해 미 10군단과의 사이에 30km에 달하는 틈이 발생했다. 적은 무인지경인 상태에서 침투할 수 있었다. 현리전투 인근 희생된 많은 장병을 화장한 곳에 ‘위령비’가 세워졌다. (유재흥, 270쪽)

현리전투(5월 16〜22일) 패배로 3군단은 해체되고 유재흥 군단장은 보직을 잃었다. 그는 개전 초기 가장 먼저 붕괴된 전방의 7사단장으로 7사단이 해체됐다. 이어 1·4 후퇴 후 그가 군단장이던 2군단도 대전에서 해체된 바 있다.

경기 양평군의 ‘용문산지구 전적비’. 누워있는 동상은 어려운 여건에서도 굳건히 나라를 지키려는 의지와 영령들의 안식처임을 나타내는 것이라는 설명이다. 양평=구자룡 기자



● 벙커고지와 용문산의 설욕
군우리 전투 참패 후 지평리 전투에서 되갚았던 미 2사단은 중공군의 6차 대공세(5월 16일~20일)에서도 선전했다. 벙커고지 전투(5월 17∼19일)에서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고지를 사수해 중공군의 홍천 진격을 막았다. 지평리 전투의 주역이 23연대였다면 벙커고지 전투는 38연대였다. 국군 3군단이 현리에서 치욕적인 패배를 당하고 있던 때 38연대도 홍천 북방 778고지 일대에서 포위됐다. 38연대는 적과 근접전을 벌이는 상황에서 전 병력이 참호를 깊이 파고 벙커에 엄폐한 뒤 피아가 섞인 진지 내에 포화를 퍼붓도록 하는 위험한 작전을 벌이면서까지 진지를 지켰다.

용문산 전투(5월 18~20일)도 현리, 벙커고지 전투와 같은 시기에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진 전투 중 하나였다. 국군이 사창리와 현리 전투에서 잇따라 패퇴해 국군에 대한 신뢰가 떨어진 상황에서 이를 만회한 쾌거였다. 당시 사단장은 사창리 패전 때와 같은 28세 약관의 장도영 소장으로 그의 설욕전이기도 했다. 6사단 2연대 장병들은 철모에 ‘결사(決死)’를 새기고 전투에 임했다.

파로호 전적비 

용문산 일대에서 쫓긴 중공군은 화천호까지 밀려가 배수의 진을 치고 저항하다 저수지에 뛰어들거나 아군의 포화에 목숨을 잃었다. 사살된 적군이 1만7100여명, 살아서 돌아간 병사는 1000여명에 불과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화천호에 오랑캐를 섬멸한 곳이란 뜻으로 파로호(破虜湖)라는 전적비를 세웠다.


중공군의 ‘지하 만리장성’ 땅굴

따발총을 든 중공군이 땅굴에서 나오고 있다.  중국 단둥 항미원조기념관 전시. 단둥=홍진환 기자 

중공군의 땅굴은 미군의 전투기 공습을 견디며 지구전을 벌이기 위해서 등장했다. 중공군은 1951년 가을 산기슭에 소규모로 팠던 땅굴을 서로 이어 붙이면서 말발굽 모양의 땅굴로 발전했다. 그해 10월 중공군사령부 차원에서 전군에 땅굴 공사를 지시했다. 땅굴은 단순히 상대의 화력으로부터 지키는 방어 목적뿐 아니라 기습공격에도 활용될 수 있도록 했다. 사령부는 땅굴 공사의 규격 기준을 만들어 전군에 내려보냈다. 7가지 방어는 기본적인 조건이었다. 즉 공습(防空) 포격(防砲) 독가스(防毒) 비(防雨) 습기(防濕) 불(防火) 추위(防寒)다. 땅굴 파기 지침이 내려간 뒤 전선에는 땅굴 파기 열풍이 불어닥쳤다.

중공군 땅굴 속의 작전 회의실. ‘영웅적이고 용감하게 적을 죽이자’는 섬뜩한 문구가 안에 걸려 있다. 중국 단둥 항미원조기념관에 땅굴을 재현해 놓았다. 단둥=홍진환 기자

중공군 제12군은 8개월간 40여곳에 대장간을 만들어 1만6천여 점 땅굴 도구를 만들었다. 땅굴 파기 확대로 수요가 늘면서 후방 랴오닝(遼寧)성 선양(沈陽)에 ‘기재처’를 만들어 땅굴 파기 기자재의 구입 생산 분배를 맡겼다. 평양 삼등 양덕에도 땅굴 기재 공급기지를 세웠다.

1952년 5월 말까지 제1선 방어진지 땅굴 공사가 기본적으로 완성됐다. 8월 말에는 동, 서해안에서도 집중적으로 땅굴을 파기 시작했다. 6개 군단이 땅굴 약 2백km, 참호와 교통호 약 6백50km, 각종 화기엄폐물 1만여 개를 건설했다. 한반도를 가로지르는 250km 길이의 모든 전선에 구축된 폭 20~30km의 방어선에 땅굴을 핵심으로 한 거점식 진지 방어체계를 구축했다. 난공불락의 ‘지하 만리장성’을 형성했다.(훙쉐즈, 390쪽).

중국이 한국 전쟁 참전 후 가장 큰 승리로 꼽는 상감령 전투도 바로 이 ‘지하 만리장성’이 큰 역할을 했기 때문으로 알려져 있다. 중공군이 총길이 250km의 전선에 구축한 갱도 길이는 287km에 달했다고 한다.

중국 단둥 항미원조기념관에 재현해 놓은 땅굴 속 도서관.  단둥=홍진환 기자 

‘지하 창고형 땅굴’은 물자 보존 창구 역할도 했다. 1952년 5~6월 중공군 후근사령부는 차량 1200대 분량의 물자를 저장할 창고를 구축했다. 마오쩌둥(毛澤東) 주석은 1952년 8월 “어떤 사단도 3개월의 식량을 보관할 지하창고가 있었으며, 강당도 있어 생활은 대단히 좋았다”면서 “2층으로 굴을 파면 상대가 공격해올 경우 우린 지하 2층으로 들어간다. 상대가 위층을 점령해도 아래층은 우리에게 속해있다”라고 자랑했다고 한다.

단점도 적지 않았다. 땅굴 생활을 하려다 보니 콩기름이든 등유든 기름이 많이 소모됐다. 병사들은 산소가 부족해 기관지염에 걸리고 식수가 부족해 혀가 갈라지는 일도 잦았다고 한다.



참고문헌남도현 지금, 『6·25, 끝나지 않은 전쟁』, 플래닛 미디어, 2010.
온창일 등 지음, 『6·25 전쟁 60대 전투』, 황금알, 2010.
유재흥 지음, 『격동의 세월』, 을유문화사, 1994.
훙쉐즈(洪學智) 지음, 홍인표 옮김, 『중국이 본 한국전쟁』, 한국학술정보, 2008.
『1129일간의 전쟁 6·25』, 육군본부 육군군사연구소, 2014.
구자룡 화정평화재단 21세기평화연구소장 bonh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