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매체 시대, 결국 핵심은 콘텐츠 경쟁력 공영방송 자체가 시장 가치인 세상은 지나가 사회에 필요한 주제가 무엇인지 직접 찾을 때다
노동렬 성신여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
공허하다. 명분 약한 정치 논리로 인식해서 그런지, 본질에서 벗어난 비논리적 논쟁이라서 그런지, 아니면 어려운 방송 환경만큼 치열하지 않아서 그런지, 수신료 분리 징수 이슈는 ‘초라한 시청률’로 일단락되었다. 애초부터 수신료 분리 징수는 문제의 본질이 아니었다. 이제 예고편이 끝났고 휘몰아칠 본편이 준비되고 있다. 진짜 주인공이 등장해 본격 갈등의 막을 올릴 것이다.
현재 방송시장은 ‘위기’라는 단어가 호사스럽게 느껴질 만큼 빈곤해졌다. 하지만 그 심각성을 인식하고 해결해야 한다고 높이는 목소리가 없다. 방탄소년단(BTS)과 ‘오징어 게임’이 일으킨 착시 현상으로 방송 전문가들조차 방송시장 위기에 내포된 함의를 오독하고 있다. 수신료와 공영방송 문제뿐 아니라, 방송산업 전체가 위기에 빠진 이유는 명확하다.
첫째, 방송의 기능 상실. 매체 환경 변화로 방송이 담당하던 기능을 대체하는 다양한 매체가 등장했다. 필자는 방송의 공적 기능을 교양·정보, 교육, 다양성, 지역성, 재난방송, 다섯 가지라 주장한다. 그런데 이미 교양·정보 기능은 포털과 유튜브에 압도당했고, 이제 교육과 다양성 기능마저도 유튜브와 인공지능 검색 서비스가 대체하고 있다. 재난 ‘중계’ 방송도 공영방송의 배타적 기능이 아니고, 다른 방송사들과 경쟁하고 있다. 결국 방송의 차별적·독보적 기능은 사라졌고, 핵심은 콘텐츠 경쟁력으로 변화했다. 이렇게 방송산업이 자연도태 되는 과정에 소비자들이 수신료 분리 징수 이슈에 무관심한 것은 당연하다. 이게 바로 현실이다.
위의 두 가지 원인으로 수신료 분리 징수 논란 과정에서 표출된 소비자의 반응은 “볼 게 없다”와 “편파적이다”로 축약된다. 이는 정치·정파적 관점에서가 아니라 콘텐츠 경쟁력 측면에서 주목해야 한다. 레거시 미디어가 주도하던 이념시장은 이제 유튜브로 옮겨갔다. 원래 이념시장은 진영 논리를 강화하는 것이 콘텐츠 경쟁력을 높이는 최선의 전략이다. 따라서 유튜브로 옮겨간 이념시장은 양극단의 콘텐츠만 살아남는 게 논리적이다. 이러한 환경일수록 공영방송의 시사보도 콘텐츠의 경쟁력은 공정 가치인데, 불행하게도 우리 공영방송은 편파 시비에 함몰되어 있다. 교양·오락 콘텐츠도 경쟁력을 상실했다. 유능한 연출자일수록 빠르게 프리랜서 시장으로 이동시키는 것이 매체 환경 변화로 나타난 결과이다. 이미 방송사의 많은 인재가 외부로 이동했다. 따라서 방송사는 제작 기능을 상실한 채, 편성사업자로 기능이 축소되는 추세에 있다. 드라마 광고가 완판되면 회당 4억 원 정도의 매출이 발생하는데, 현재 드라마 한 회 제작비는 10억 원가량이 소요된다. 하지만 OTT는 회당 25억 원 수준으로 제작한 드라마를 서비스한다. 공영방송이 볼만한 콘텐츠를 만들 수 없는 환경이다.
“그래도 공영방송은 필요하다”는 주장이 있다. 구체성이 없어 공허하지만, 공영방송이 필요하다면 그 필요성은 이제는 공영방송 스스로 제시해야 한다. 현재 매체 환경에서는 아무도 보지 않는 방송은 무의미하다. 어떤 매체의 콘텐츠도 모든 매체의 콘텐츠와 경쟁한다. 공영방송의 공적 콘텐츠라도 그렇다. 공영방송은 시장 가치를 스스로 증명해야 하고, 시장 가치로 평가받아야만 하는 매체 환경이다. 그래서 끊임없이 국민에게 필요한 것을 찾아내고 변신해야 한다. 공영방송 콘텐츠는 타 매체의 것에 비해 품위가 있어야 하고, 품질이 좋아야 한다. 계몽과 계도 기능의 시대를 지나, 교양·정보, 교육, 다양성 기능의 시대를 마감하면서, 다음에 우리 사회에 필요한 주제가 무엇인지를 스스로 찾아내야 한다. 필자는 선진화와 통합이라는 주제를 강조한다. 경제 선진국을 넘어 문화 선진국을 지향하며 글로벌 교양 시민으로서의 소양을 제공하는 콘텐츠가 공영방송의 새로운 시장 가치 아닐까. 공영방송은 화석이 아니다. 세계 유명 공영방송들이 스스로 변신하고 있다. 공영방송의 존재 자체가 시장 가치인 세상은 다시 오지 않는다.
노동렬 성신여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