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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평인 칼럼]불편한 대통령

입력 | 2023-07-26 00:06:00

육참총장 공관 수염 날리며 다녀간 사람
천공은 아니었지만 관상쟁이 풍수가
손바닥 王자에서 관저 吉凶 보기까지
왕조 때도 드문 일이 공화국에서 벌어져



송평인 논설위원


윤석열 대통령이 후보 시절 손바닥에 왕(王)자를 새기고 토론회에 나왔을 때만 해도 예상치 못한 이질적인 행태에 께름칙한 느낌이 없지 않았지만 ‘열심히 하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 하고 지나갔다. 그러나 청와대 이전에 이어 대통령 관저 선택에까지 주술이 개입한 증거가 나왔다. 조선 왕조에서도 보기 힘들었던, 주술에 사로잡힌 국가 지도자를 근대 공화국에서 보고 있다.

구한말의 민비는 국(國)무당을 세우고 내외치(內外治)의 만사를 의논한다고 해서 지탄을 받았다. 민비 이전에도 주술에 빠진 왕비와 후궁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세자 시절부터 경연 등을 통해 유교 교육을 받은 왕들은 왕비나 후궁이 무속에 빠지면 별궁에 가둬 버릇을 고치고, 심하면 폐하여 사가(私家)로 내쫓고, 더 심하면 사약을 내리기도 했다.

김건희 여사의 한 녹취록에는 스스로를 비범한 무속인으로 자처하면서 청와대는 터가 좋지 않아 들어가지 않을 거라는 취지로 단호히 말하는 대목이 나온다. 윤 대통령은 당선된 뒤 대통령 집무실이 채 마련되지 않았음에도 임시로라도 청와대에 들어가지 않았다. 터가 나쁜 곳에서는 불안해서 하루도 살 수 없는 심리가 상궤를 벗어난 고집으로 드러났다.

대통령 관저는 본래 예정된 육군참모 총장 공관에서 외교부 장관 공관으로 바뀌었다. 남산 하얏트 호텔 쪽에서 외교부 장관 공관이 들여다보여 차단 공사를 해야 함에도 그렇게 바뀌었다. 수염을 날리며 육참 총장 공관을 찾은 사람은 천공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수염을 날리며 누군가 다녀갔고 그 사람이 백재권이라는 관상·풍수가로 드러났다.

대통령의 사람들은 천공을 무속인 대신 역술인이라 부르더니 백 씨에 대해서는 관상은 빼버리고 풍수전문가라고 지칭했다. 주역에 담긴 지혜, 풍수에 담긴 지혜를 논리적 용어로 설득력 있게 풀어내는 학자들이 없지 않다. 그러나 그런 학자들은 관상 따위는 보지 않고 길흉(吉凶)을 점치지도 않는다. 주술적인 역술인이나 풍수가가 관상도 보고 점도 친다.

공간이 의식을 지배한다는 뜬구름 잡는 소리나 하면서 청와대 터는 왜 흉하고 용산은 왜 길한지 설득력 있는 설명은 없다. 풍수로 따져도 애매하다. 주술의 눈에만 길흉이 명확하다. 외교부 장관 공관이 육참 총장 공관보다 왜 적합한지도 알 수 없다. 육참 총장 공관이 낡아서라면 왜 관상쟁이 풍수가가 등장하는지 해명해야 한다. 해명할 수 없으니 숨기려 한 것이다.

사회학자 막스 베버는 근대(modern)를 ‘주술로부터의 해방’이라고 정의했다. 그러나 근대는 공적(公的) 영역과 사적(私的) 영역의 구별 위에 서 있기도 하다. 여의도 정치인들, 정부 고위 관료들, 대기업 임원들, 전문직 종사자들이나 그 부인들이 점을 보러 다니는 게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사적 영역에서야 뭘 하든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개인이 알아서 할 일이다. 점을 통해 마음의 안정을 얻고 일을 더 잘할 수 있다는데 뭐라 하겠는가. 그러나 주술이 대통령 집무실 이전이나 대통령 관저의 선택 같은 공적 영역에까지 영향을 미친다면 그것은 국민이 낸 세금이 주술적 결정을 이행하는 데 쓰이는 것으로 근대 국가에서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집무실과 관저를 옮기는 것은 왕이라도 함부로 할 수 없었다. 주술에 집착해 궁을 이곳저곳으로 옮기다 쫓겨난 왕이 광해군이다.

언론에 공개적으로 등장한 이름만 천공, 건진, 무정에 이어 백재권이다. 처음에는 김 여사만 주술에 진심이고 윤 대통령은 마지못해 끌려다니는 줄 알았으나 그게 아니었다. 그가 주술로부터 얻는 심리적 안정은 공사의 구분을 뛰어넘게 만드는 정도인 듯하다. 누구나 주술에 빠지면 공사의 구분을 반드시 뛰어넘게 돼 있다.

지난해 지리산 둘레길을 돌다 산속 무속기도원 앞을 지나는데 건물이 현대식으로 말끔히 지어졌음에도 기분이 으스스해져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정신분석학자 지크문트 프로이트는 그런 느낌을 ‘언캐니(uncanny·독일어로는 unheimlich)’라고 불렀다. 낯익은 대상에서 이질적인 것을 접했을 때 그것이 호기심을 갖게 만드는 이질감이 아니라 기분이 으스스해져서 피하고 싶은 이질감일 때의 느낌이다. 우리 대부분은 어쩔 수 없는 근대인이라 점집 앞을 지날 때 그런 느낌을 갖는다. 대통령이 지금 그런 느낌을 주고 있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