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회] 시력 잃어가는 작곡가 임채섭 씨 중2 때 교사 체벌로 왼쪽 눈 실명 피아노 배우며 ‘음악의 길’ 새 인생 오른쪽 시력도 악화 ‘전맹’ 대비 중 “동료들 응원이 큰 힘 포기 안 할 것”
작곡가 임채섭 씨(41)는 과거 교사의 체벌로 왼쪽 눈을 실명했다. 권투선수들이 시합 중 눈을 정통으로 맞았을 때 종종 발생하는 망막 박리가 심하게 왔다. 채섭은 남은 한 쪽 눈에만 의지하다보니 오른쪽 시력도 서서히 악화됐다. 사고 후 27년이 지난 지금, 그는 진행성 시각장애인으로 살고 있다. 어제까지 보이던 게 오늘은 보이지 않고, 어제는 할 수 있었던 일이 오늘은 어려워지기도 한다.
안내견과 전철역 가는 길
“진행성 시각장애가 있다보니 횡단보도 건너는 게 갈수록 조심스러워져요. 호연이에게 50%는 의지하지만 저 역시 안내견의 안전을 지켜줘야 하니까 횡단보도 앞에 서서 귀를 최대한 기울입니다. 차 소리가 완전히 안 들리고 사람들 건너는 소리가 들리면 그 때 움직이죠.”
호연이는 다음 열차가 올 때까지 수시로 고개를 들어 반짝이는 눈동자로 ‘형아(채섭)’를 살폈다. ‘앉아’ ‘일어서’ 같은 구령을 듣기 위해 귀도 쫑긋 세웠다. 채섭과 호연이가 열차에 오르자 승객들의 시선이 이 래브라도 리트리버 안내견에게 온통 쏠렸다.
장애인마다 ‘장애 MBTI’가 있다
채섭이 이런 일상을 갖게 되기까진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다. 교사의 폭력으로 시력을 잃고 집에서만 채섭은 방 유리창 너머로 친구들의 목소리가 들려와도 인사를 건네지 못했다. “낙오자가 된 것처럼 너무 위축이 되고 중2병까지 겹쳐서 그랬던 거 같아요. 마음의 블랙홀이 쉽게 메워지진 않더라고요.”그는 가해 교사에 대한 원망과 분노로 사춘기를 보냈다. 하지만 결국 현실을 받아들이는 쪽을 택했다. “드라마 ‘더글로리’ 보셨나요. 복수를 하고나면 결국엔 허무해지지 않던가요. 저는 이미 너무 큰 것을 잃어버렸는데 남은 삶마저 미움과 분노로 채우면서 더 슬프게 만들고 싶진 않았어요.”
“당시 라디오로 음악을 들으며 하루하루 보내곤 했는데 음악이 마음속 빈 공간으로 들어오더라고요. 이 곡을 만들었던 사람과 소통하는 것 같아서 혼자 남겨진 기분도 덜 느껴지고, 나 역시 누군가를 위해 이런 걸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채섭의 할머니는 음악을 통해 세상으로 나오려는 손자에게 전자피아노를 마련해줬다. 할머니는 “너한테 가장 필요한 것을 사라”며 매달 몇 만원씩 십수 년간 모아온 쌈짓돈을 내준 것이었다. 채섭은 그 전자피아노로 독학을 해 부산대 음대에 입학했다.
그는 “장애인도 성향이 사람마다 다 다르다. 일종의 ‘장애 MBTI’가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자신의 상황에 대한 분노가 커 공격적인 사람이 있는가 하면, 주변과 협조적으로 살아가려는 부류도 있다는 뜻이었다.
“앞이 안 보이는 건 매일 매순간 의식하게 돼요.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장애와 친해지긴 어렵죠. 그렇다고 장애라는 거대한 돌덩이를 어디로 보내버릴 순 없어요. 보낼 때마다 기어이 반송돼서 오더라고요. 어차피 같이 가야할 존재라면 예쁘게 포장하고 부피를 최소화해서 마음 속 ‘냉장고’ 깊숙이 넣어두는 수밖에요.”
시력의 빈틈을 메워준 기술들
재윤이 기본 멜로디에 작사, 보컬을 담당하고 영훈은 여러 악기로 선율에 살을 붙인다. 채섭은 신디사이저 등을 이용해 믹싱과 편곡을 하며 완성도 높은 곡으로 버무려낸다. 한 때 음악을 포기하려던 채섭을 잡아준 게 바로 그 두 사람이었다.
채섭을 일으켜 세운 건 사람이지만 그가 힘겹게 되살린 용기를 실현하도록 해준 건 기술이었다. 그의 작업실에는 시력의 한계를 메워주는 여러 기술이 모여 있다. 그는 아이맥(iMac) PC 앞에 앉아 능숙하게 작곡 프로그램을 다뤘다. 커서의 위치 등 모니터 화면을 설명해주는 ‘보이스 오버’와 화면을 크게 확대해주는 기능을 자주 썼다. 악보를 집중적으로 봐야 할 땐 ‘조디’라는 특수 확대기기를 머리에 쓴다. 이걸 쓰면 눈앞의 사물이 30배 정도 확대돼 보인다.
채섭이 PC에 아이패드를 연결하자 태블릿 화면이 전자 피아노 건반으로 바뀌었다. 그가 믹싱을 할 때 즐겨 쓰는 로직 리모트(Logic Remote)라는 애플리케이션(앱) 덕분이었다. “이 앱은 음악을 만드는 일종의 스케치북이에요. 10년 넘게 써와서 익숙하고, 화면도 크지 않아 웬만한 버튼이 어디 있는지 제 손이 다 알죠. 그래서 섬세한 정밀 작업도 가능해요.” 그는 눈을 뜰 수 없을 만큼 피곤할 날에는 점자 단말기를 PC에 연결해 작업한다. 이런 첨단기기들은 사회복지법인 ‘따뜻한동행’ 등에서 지원을 받았다.
시력을 잃고 마음의 시야를 넓히다
“호연이는 제가 평소 식탁에 혼자 있으면 적적할까봐 제 옆에 착 붙어 앉아요. 제가 밥을 다 먹거나 일을 마치면 호연이도 그제야 같이 일어나죠. 오늘은 비도 오는 와중에 ‘형아’랑 멀리 다녀오느라 피곤했을 거예요.”
평소에는 호연이가 길가에서 대변을 볼 땐 엉덩이 쪽에 비닐봉지를 고정시켜 처리한다. 하지만 비 오는 날에는 호연이에게 입혔던 비옷을 벗기고 하네스(반려동물의 몸을 고정하는 벨트)를 해체한 뒤 엉덩이 쪽에 비닐을 걸어야 한다.
“안내견의 변이 아예 땅에 떨어지지 않도록 교육을 받았어요. 변이 땅에 떨어지면 시각장애인들은 어디에 어떻게 떨어졌는지 안 보여서 줍기가 어렵거든요. 그래서 엉덩이에 비닐을 잘 채워야 하는데 비 오는 날에는 좀더 난이도가 높죠.”
그는 요즘 점자 공부에 어느 때보다 열심이다. 언젠가는 찾아올 ‘전맹(완전히 보이지 않는 상태)’의 삶을 지금부터 대비하려는 것이다. 14살에 실명해 ‘장애 나이’로 치면 올해 27세인 그는 “시력을 잃어가며 오히려 마음의 시야가 넓어지는 것 같다”고 했다.
동아일보는 장애의 빈틈을 기술과 디자인으로 채우며 다시 일어선 ‘다른 몸의 직업인’ 5명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로봇팔을 한 사이클 선수, 시력을 잃어가는 작곡가, 손을 못 쓰는 치과의사, 휠체어를 타는 ‘걷는 로봇’ 연구원과 스웨덴에서 활동하는 가구 디자이너…. 부서진 몸으로 다시 일어선 이들은 말합니다. 삶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고.
<특별취재팀>▽기획·취재: 신광영 neo@donga.com 홍정수 이채완 기자
▽사진: 송은석 기자
▽디자인: 김수진 기자※아래 주소에서 [장애, 테크로 채우다] 주인공들의 이야기를 디지털로 구현한 인터랙티브 기사를 볼 수 있습니다.
https://original.donga.com/2023/techable-cs
▶임채섭 작곡가가 속한 뮤직프로듀싱 팀 ‘티스푼’ 유튜브 채널
https://www.youtube.com/@teaspoonstudio
신광영 기자 neo@donga.com
홍정수 기자 hong@donga.com
이채완 기자 chaewan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