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영웅 고(故) 백선엽 장군의 국립현충원 안장 기록에서 ‘친일반민족행위자(친일파)’라는 문구가 삭제됐다. 정전협정 70주년을 앞두고 이뤄진, 늦었지만 당연한, 기구한 역사가 불러온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경북 칠곡군 다부동전적기념관에 있는 고 백선엽 장군 동상. 동아일보DB
보통사람에게 협상이라 함은, 서로 소통해 좋은 결과를 만들어내는 윈-윈 게임이다. 공산당은 다르다. 총성 없는 전쟁일 뿐이다. 오죽 애간장이 탔으면 유엔대표단 협상 단장 터너 조이 제독(1895~1956)이 유언 같은 저서 ‘공산주의자는 어떻게 협상하는가?’를 내놓고 1년 만에 세상을 떠났겠나.
● 공산당과의 협상에선 ‘힘’만이 해결책
백선엽도 회고록 ‘조국이 없으면 나도 없다’(2010년)에서 그때의 경험을 언급했다. 1951년 7월 회담 전만 해도 우리가 속한 유엔대표단 분위기는 열흘이면 끝내고 고향 갈 듯 낙관적이었다. 백선엽은 착잡했다. 우리는 휴전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 휴전하는 건 국토를 분단하는 일이니 나는 절대 반대야. 우리 목표는 통일이야!” 이승만 대통령은 인사차 부산 경무대로 찾아간 그에게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었다.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에서 6·25전쟁 당시 더글러스 맥아더 유엔군 최고사령관과 대화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을 가리키는 백선엽 장군. 동아일보DB
공산군 측은 군사분계선을 38선으로 하자고 지리한 주장을 폈다. 전쟁이 시작된 곳에서 다시 끝내자니! 그러자고 우리가 목숨 바쳐 나라를 지켰단 말인가?? 했던 주장 또 하기, 끝없는 지연전술, 모욕과 무례함은 그들의 전매특허였다. “저들이 하는 꼴을 보면 회담이고 뭐고 차라리 어서 전쟁을 하는 편이 낫겠다. 공산당과의 협상에서는 ‘힘’만이 모든 것을 해결한다”고 백선엽이 비망록에 썼을 정도다.
● 협상학의 대가도 북한은 모른다
협상학의 대가로 유명한 스튜어트 다이아몬드라는 사람이 있다. 미국 펜실베이니아 대학 와튼 스쿨 교수로 그 학교 학생들이 만든 연극 대사 “다이아몬드의 강의는 다이아몬드보다 더 비싸다”로도 유명하다. 그가 자신의 책 ‘어떻게 원하는 것을 얻는가’가 한국서 출간된 2010년, 국내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북한과 협상하는 법에 대해 이런 말을 했다.“가장 바보 같은 것은 아무 대화도 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고 군사력으로 위협하는 것도 좋지 않은 방법이다. 시간을 충분히 투자해야 한다. 북한은 돈과 식량 지원을, 한국은 북의 핵무기 포기와 정치적 협력을 원한다고 해보자. 그럼 첫 단계는 양국 대표가 점심을 같이 먹는 것이다. 정치 이슈는 피하고 월드컵 축구에 대한 이야기만 한다. 이렇게 스무 번쯤 만나며 서로 알게 된 뒤 본격적인 대화를 시작해도 늦지 않다.”
2018년 4월 27일 판문점에서 열린 남북 정상회담 당시 나란히 앉아 북한 옥류관 냉면을 먹고 있는 문재인 전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동아일보DB
● 어디서든 회담? 장소가 관건이다
‘공산주의자는 어떻게 협상하는가?’에서 조이 제독이 가장 강조한 것이 ‘무대 설정’이다. 점심을 먹어도 어디에서 먹느냐가 가장 중요하다는 거다. 스탈린이 2차 세계대전 후 세계질서를 논의하는 테헤란 회담(1943년 12월) 얄타 회담(1945년)을 이란과 크림반도에서 하자고 괜히 주장했겠나. 소련 영향력이 강한 곳이어서, 자신들이 통제할 수 있는 곳이어서다. 자유세계는 공산주의자의 사악한 본질을 몰랐던 거다.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열린 휴전협정 조인식에서 윌리엄 해리슨 2세 유엔군 수석대표(미육군 중장)과 남일 조선인민군 및 중국인민지원군 대표단 수석대표(조선인민군 대장)가 서명하는 모습. 사진 제공 국사편찬위원회
그러나 공산주의자들이 제안한 개성은 중공 측 통제 지역이었고, 워싱턴은 덜컥 양보했다. 한번 양보하면 그걸 ‘선의’가 아닌 무력(無力)의 증거로 보는 게 공산주의자들이다. 회담장이 선전선동의 장으로 이용되는 건 물론이다. 북측은 땅딸막한 북한 대표 남일을 4인치나 높은 의자에 앉힌 반면, 조이 제독에게는 푹 꺼진 의자를 주어 왜소해 보이게 연출했다. 신변안전이라는 명목으로 유엔군 차량에 백기를 달아 항복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유치한 짓도 서슴지 않았다.
1951년 11월 판문점으로 장소를 옮겨 진행된 휴전회담에서 유엔군과 북한군 장교가 새 휴전선 설정을 논의하기 전 지도에 기존 38선을 긋고 있는 모습. 동아일보DB
● 평양 남북정상회담, 이유가 뭔가
이 책을 봤는지 안 봤는지…. 진보를 자처했던 좌파 정권의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 대통령은 재임 시절 굳이 평양까지 쫓아가 남북정상회담을 했다. 2000년 북측 낮은 단계의 연방제와 남측 연합제가 공통점이 있다는, 참으로 납득하기 힘든 6·15공동선언이 어떻게 나왔는지, 노무현-문재인의 평양 퍼포먼스가 어떻게 벌어질 수 있었는지 능히 이해되지 않는가. 그 쇼가 벌어진 곳이 바로 평양이었기 때문이다(다행히도 윤석열 대통령은 4월 로이터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쇼를 위한 남북 정상회담은 열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들이 주장하는 의제를 조심하라. 결론이 숨겨져 있다. ‘38도선을 군사분계선으로’ 같은 식이다.
△ 사건을 만들어낸다. 우리 측의 해결 조급증과 인도주의를 악용하려는 지연전술이다.
△ 비본질적 ‘가짜 쟁점’을 끼워 넣어 진짜 쟁점과 거래한다.
△ 진실은 소용 없다. 부인하거나 왜곡할 뿐. 진실에 부력(浮力)이 있어 언젠가 떠오르면 일부만 짜 맞춰 정반대의 결론도 만들어낸다.
△ 불리한 합의는 멋대로 해석하면 그만이다.
△ 감시나 검증은 거부한다.
△ 그럼에도 그들은 평판, 계급,직책보다 지적 능력을 우선해 협상단을 구성한다.
그래서 1955년 뉴욕타임스는 이 책의 서평에서 이렇게 썼다. “모든 문제를 대화로 풀 수 있고, 조용한 외교로 해결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조이 제독의 조언은 현실적이지만 위안을 주지 못한다”고. 심지어 후임으로 회담에 참여했던 윌리엄 해리슨 미 육군 중장은 공산주의자들과 어떻게 협상해야 하느냐는 질문에 딱 한 마디로 답했다. “하지 마시오!(Don’t!).
● 좌파 능가하는 지적 능력 갖춰야
2018년 11월 강원도 철원 중부전선의 감시초소(GP)를 철거하는 모습. 문재인 정부 당시 열렸던 남북 정상회담 논의 결과로 만들어진 ‘9.19 군사분야 합의서’에 따른 조치였다. 동아일보DB
국민은 현명했다. 정권을 갈아치웠다. 그럼에도 정전협정 70주년을 맞은 27일, 더불어민주당은 “국민은 휴전이 아니라 종전을 원한다”며 6·15공동선언과 4·27 판문점선언 이행을 촉구했다. 북쪽은 멋대로 합의를 (하는 척)하고는 깨버리는데 이 땅의 좌파세력만 애간장이 타는 모양이다.
어디 북한뿐인가. 역사의 정의가 왼편에 있다고 믿는 자들은 선전선동으로 위기를 만들어내고, ‘윤석열 퇴진!’ 같은 터무니없는 주장을 외치면서, 가짜 쟁점과 진실 왜곡과 검증 거부로 혼란을 부추기는 일이 허다하다. 이런 자들과 협상하는 법을 꼭 써야 한다면, 해리슨 중장의 조언을 꼽고 싶다(“하지 마시오!”). 그게 안 된다면, 평판, 계급, 직책보다는 제발 지적 능력이 뛰어난 협상단이 나서길 바란다. 한미동맹 같은 강력한 힘의 뒷받침이 있어야 하는 건 물론이다.
김순덕 대기자 dobal@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