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관계에 대한 고찰 ‘SF적 사실주의’로 풍자 ◇아직 살아 있습니다/나푸름 지음/283쪽·1만5000원·다산책방
정보라 소설가
박 대리가 죽었다. 화자는 박 대리의 장례식에도 다녀왔다. 그런데 박 대리는 장례식을 치른 뒤에도 계속 출근한다. 죽기 전에 회사 시스템에서 로그아웃하는 것을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귀신 얘기가 아니다. 이 회사는 직원에게 업무용 로봇을 지급한다. 사무실에 출퇴근하고 실제로 자리에 앉아 컴퓨터를 켜고 자료를 출력하는 활동은 로봇이 한다. 그 로봇을 조종해서 업무를 보는 주체는 원격 근무하는 사람 직원이다. 박 대리는 죽었지만 로그아웃을 안 했기 때문에 박 대리의 로봇은 계속 출근해서 근무한다. 표제작인 단편소설 ‘아직 살아 있습니다’는 읽다 보면 제목의 의미를 여러모로 다시 생각해 보게 하는 작품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직장생활을 통렬하게 풍자하는 블랙코미디이기도 하다.
작가의 작품세계에서, 관계가 변화하는 경험들은 드라마틱하지도 격렬하지도 않다. 어떤 사건이 일어나든, 그 배경에 어떤 세계가 있든, 등장인물들의 삶은 그냥저냥 이어진다. 사실적인 단편들도, 환상적이거나 SF적인 설정의 단편들도 마찬가지다. 설정이나 소재와 관계없이, 인간은 어쨌든 음식을 먹고 잠을 자고 어제를 기억하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살아 있는 한 일상은 그냥 계속 이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등장인물들은 시간 속에서 천천히 조금씩 부서져 간다. 이것이 작품집에서 묘사되는 인간의 가장 근본적으로 사실적인 측면일 것이다.
장르 소설 작가 입장에서 순문학 작품들에 SF적인 소재가 사용되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현실 세계에는 이미 기술과 과학이 깊숙이 침투해 있다. 그러므로 문학에도 ‘SF적 사실주의’가 나타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직 살아 있습니다’는 인간을 차분히 바라보는 작가의 철학적 시선과 존재의 실존적, 물리적 한계를 뛰어넘는 상상력이 교차하는 인상적인 작품집이다.
정보라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