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여자사이클 새 역사 써나가는 베테랑 국가대표 나아름 두 살 터울 언니 이어 초6부터 ‘페달’… 농사짓는 부모님영향 ‘악바리 근성’ “모두가 숨가쁜 순간 더 힘차게 밟아… 이젠 어떻게 하면 즐겁게 탈까 고민”
한국 여자 사이클 간판 나아름이 13일 국가대표팀 훈련장인 강원 양양종합스포츠타운 사이클경기장에서 페달을 힘차게 밟고 있다. 나아름은 9월 개막하는 항저우 아시안게임에서 한국 여자 사이클 선수 최초로 대회 3연속 금메달에 도전한다. 양양=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2002년 전남 나주시의 한 초등학교 6학년이던 소녀는 수업 중 받은 종이를 보며 한참을 망설였다. 부모 직업을 반 친구들에게 소개하는 과제였다. 부모 직업을 몰라서가 아니었다. ‘농부’라고 쓰기가 싫었다. 궁리 끝에 소녀는 ‘농업 종사’라고 적었다.
어릴 때 소녀의 집안은 가난했다. 부모는 가을걷이로 얻은 수입 중 일부를 땅주인에게 주고, 남는 돈으로 1년을 살아야 했다. 외식은 꿈도 꿀 수 없었다. 한국 여자 사이클의 간판으로 성장한 국가대표 나아름(33·삼양사)의 어린 시절 얘기다.
어린 시절 나아름은 부모 직업을 친구들에게 알리고 싶어 하지 않았지만 부모는 딸의 직업을 온 동네에 자랑하고 다닌다. 나아름이 한국 사이클 역사를 새로 써 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대표팀 내에서 나아름은 ‘악바리’로 통한다. 나아름은 키 163cm, 체중 55kg으로 사이클 선수 치고는 왜소한 편이다. 하지만 체력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 나아름의 체력은 대표팀 내에서도 독보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모두가 힘들어하는 구간에서도 끊임없이 발을 구르는 나아름을 보며 대표팀 동료들은 “미친 체력”이라고 입을 모은다.
여자 국가대표팀 훈련장인 강원 양양종합스포츠타운 사이클경기장에서 13일 만난 나아름은 “내가 작은 체격에 비해 체력이 강한 건 맞지만 중요한 건 정신력인 것 같다”고 했다. 그러면서 “‘사이클의 마라톤’이라 불리는 개인도로 종목은 142km를 쉬지 않고 달려야 하는데 70km를 넘어서면 나도 숨이 차고 힘이 든다”며 “하지만 이때 나는 ‘참아야 한다’고 되뇌며 페달을 더 힘차게 밟는다”고 했다.
나아름이 근성 있는 선수로 성장할 수 있었던 데는 부모의 영향이 컸다. 나아름은 “매일 새벽 6시면 밭에 나가 하루 12시간 이상 농사일을 도왔는데 부모님은 항상 2, 3시간 먼저 일어나시곤 했다”며 “사이클을 시작한 이후로도 ‘노동이 운동보다 고되다’는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고생하는 부모님을 생각하니 숨이 턱밑까지 차오르는 순간에도 페달을 계속 밟게 되더라”고 말했다.
부모의 자랑이 된 나아름은 이제 자신을 위해 페달을 밟고 있다. 나아름은 “과거엔 성공해서 돈을 많이 벌어 부모님 고생을 덜어드려야겠다는 생각이 컸다. 그렇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사이클 타는 걸 온전히 즐기지 못하게 됐다”며 “이제는 내가 행복해야 부모님도 정말 기뻐하신다는 걸 알게 됐다. 그래서 요즘은 어떻게 하면 사이클을 더 즐겁게 탈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다”고 했다.
나아름은 “이번 아시안게임 개최국인 중국을 비롯해 일본, 베트남, 태국 등 여러 나라 선수들 수준이 상당히 높아졌다”면서도 “우선은 아시안게임 여섯 번째 금메달을 따는 것에 집중하겠다”고 했다.
양양=강동웅 기자 leper@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