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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전 용산 서부이촌동에 대형 홍수 발생 [청계천 옆 사진관]

입력 | 2023-07-29 11:00:00

백년사진 No. 29




▶ 100년 전 신문에 실린 사진을 통해 오늘의 사진을 생각해보는 [백년사진]입니다. 우리 속담에 뽕나무 밭이 바다가 된다는 말이 있듯이 오늘 소개해 드리는 사진이 딱 맞는 사례 같습니다. 100년 전 이번 주에 서울 용산 한강변에 모여 살던 사람들이 홍수 피해를 입고 대피한 모습이 신문에 실렸습니다. 우선 1923년 7월 23자 동아일보에 실린 사진입니다.


연안 가옥은 다소 침수 – 이촌동민 31인 부령 출장소에 피난이번 비에 한강물이 늘어서 연안 각지에는 침수 가옥이 약간 있었는데 그 상보를 들으면, 고양군 룡강면 토정리에 4채, 창전리에 7채는 마루 밑까지 물이 들었으며 시내 마포동에는 마루밑까지 25호 마루 위까지… 원정에 한집이 침수 되었으나 그것도 마라밑까지 이었으며 이촌동에는 강가에 공령을 짓고 지내던 로동자의 헛간이 물에 잠겨서 삼십일인이 갈 곳이 없음으로 이십일밤부터 경성 부룡산 출장소에 피난케하였으나 그것도 금 이십삼일 중에는 돌려보내게 되리라더라/ 동아일보 1923년 7월 23일. 




▼ 지금은 아마 국민 대다수가 알고 있고 게다가 기회가 된다면 살고 싶어 하는 서울 용산구 한강변의 이촌동 지역이 100년 전에는 노동자들의 임시 숙소 정도로만 이용되었었군요. 기사에서 언급된 룡강면이라는 곳은 지금의 서울 용산과 서강대교 근처이고, 마포와 이촌동 일대가 물에 잠겼다는 것으로 보아, 이 해에 내린 홍수로 한강 근처에 있던 마을들이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역사를 검색해보면, 이 지역은 1920년대 이전과 그 이후에도 끊임없이 물난리와 수재민이 발생한 지역입니다. 서울 시내와 가까운 한강변은 일자리를 보고 전국에서 모여 든 육체 노동자들이 저렴한 주거비를 감당하면서 서울에서 버틸 수 있는 가성비 높은 주거지였을 겁니다. 위험해서 돈 있는 사람들은 욕심내지 않는 땅이었을 테니까요.


이촌동 주민들이 관청 임시 대피소에 모여있다. 1923년 7월 23일 사진의 아래 부분.

▼ 사진을 보면, 100년 전에도 수해 피해를 입은 마을 사람들은 안전한 관청으로 피신을 할 수 있었었군요. 7월 20일부터 벌써 3일째 부룡산 출장소라는 곳에 대피해 있는데 오늘날과는 달리, 국가가 수재민들이 원할 때까지 보호하는 게 아니라 23일에는 관청의 수용시설에서 나가야 하는 가슴 아픈 환경이었었습니다. 물이 휩쓸고 간 터전으로 돌아가, 다시 집을 일으켜야했을 사람들의 모습은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기자들에게 중요한 취재 대상이었습니다. 동아일보는 이촌동 수해 이재민 모습을 보도한 이틀 후인 25일에는 좀 더 강한 사진을 보도합니다. 신문을 만드는 사람들은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슈나 인물의 사진의 크기를 키우는 방식으로 세상에 말을 겁니다. 세상 사람들은 모르지만, 한강의 철교 왼쪽 아래 강변에 사람이 살고 있고, 300 가구나 되는 많은 사람들이 홍수 때면 힘든 시간을 보낸다는 걸 사진으로 보도했네요.


세상을 등지고 물에 우는 이촌동 – 세상 사람은 어데 있는 것도 알지 못하지만 철교 서편 한강가에는 이러한 촌락이 있다. 이것을 서부 이촌동이라하여 삼백호나 된다. 1923년 7월 25일.



세상을 등지고 물에 우는 이촌동 ( 1923년 7월 25일) 사진의 가운데 부분을 확대해보면 한강변에 살고 있는, 흰 옷을 입은 주민들 모습이 보인다.


▼ 높은 사람들에게만 향하지 않는 카메라의 포커스는 100년 전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정보 검색이 쉬워진 것은 여러분을 비롯한 인류 전체에게 이롭지만, 사진기자들의 일에는 큰 변화를 주었습니다. 100년 전 수재민 사진에서 출발한 저의 호기심은 용산 서부이촌동의 수해에 대한 역사를 인터넷 검색을 통해 찾아보게 만들었습니다.
100년 전 용산과 마포 일대 한강변 홍수 피해를 동아일보가 보도했다고 해서 이 지역이 곧바로 살기 좋은 곳으로 변하지는 않았더군요. 그 이후에도 더 큰 수해가 나기도 했고, 반복된 수해로 인해 반체제 세력이 결집한 곳이라고 인식이 생겨 일제가 강제 이주를 시킨 마을도 있었더군요.


▼ 이 사진들은 당시 권력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아주 불편한 내용이고 사진의 크기도 너무 커서 뭔가 의도가 있는 보도라고 느낄 만도 했을 겁니다. 뭔가를 보여준다는 건 뭔가를 알려준다는 건데 언론이 시민들에게 우리 사회의 어둡고 근본적인 문제를 알려주는 건 권력 입장에서는 불편할 수 있습니다. 비가 오면 치수가 잘 안된 지역에서 피해가 나고, 권력은 나름의 해법으로 해결해보려 하는데 언론이 끼어듭니다. 공사 현장이 부실해 인명 피해가 나면, 담당자들은 보수공사를 해서 재발 방지 장치가 마련되었다고 주장하며 사태를 마무리하고 싶어 하는데 언론이 또 끼어들어 제 3자들에게 그걸 알려줍니다.

▼ 곁가지 말씀을 하나 더 드리자면, 사진기자로 마주 치는 여러 가지 재난 현장 중에서 수해 취재 현장이 가장 참혹하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산불 취재 현장에서 도깨비불은 화재 진압을 하고 있는 소방대원들의 머리 위를 날아 반대편 산으로 날아갑니다. 산불 진화가 시간이 걸리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물 취재는 불 취재와 달리 현장이 광범위합니다. 불은 대형 산불이라도 시작과 끝 지점이 그나마 분명한 편입니다. 물은 넓은 지역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지나갑니다. 그리고 물이 지나가고 난 곳에서 꺼낸 가제도구나 농사 흔적들은 참혹합니다.

▼ 오늘은 100년 전 척박한 환경이었던 서울 한강변 사진을 소개해드렸습니다. 지금과 다를 바 없어보였지만, 사진의 맥락을 찾아보니 평범하지 않은, 이야기를 사진이 들려주고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뭐가 보이시나요? 댓글에서 여러분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