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을 일컬어 녹취공화국이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권 다툼이나 갑질, 성희롱, 폭언 등의 피해에 휘말렸을 때 녹음 파일이 결정적 증거가 되는 경우가 워낙 많아 나오는 말입니다. ‘억울한 일을 안 당하려면 녹음은 필수’라는 인식이 사회 전반에 퍼져있습니다. 세태가 이렇다 보니 녹음기를 내장한 사원증 같은 아이디어 상품도 등장합니다.
지난달 이슈가 됐던 아이돌 피프티피프티 소속사와 용역사 간의 분쟁에서도 소속사 측에 유리한 정황이 담긴 통화 녹음이 공개되면서 여론이 기운 바 있습니다. 이에 소속사 대표가 ‘갤럭시를 써서 다행’이라는 취지의 발언을 하고 SNS 아이디도 ‘galaxy_s23’로 바꾸기도 했죠. 삼성전자 스마트폰의 경쟁력 중 하나가 아이폰에는 없는 통화 녹음 기능이라는 애기가 진지하게 나오는 이유입니다.
출처=셔터스톡
그런데 녹음이 법적으로 문제가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비슷하게 최근 이슈가 된 모 유명 웹툰 작가의 특수교사 고발 사건의 경우입니다. 이 사건에서 작가는 아이 가방에 녹음기를 넣어 등교시킨 뒤 여기에 녹음된 특수교사의 발언을 근거로 교사를 아동학대로 고소했습니다. 앞선 사례와 달리 이 사태에서는 이 행위가 통신비밀보호법 위반이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이 가방에 녹음기를 넣어둔다거나, 사무실이나 승용차 등에 녹음기를 설치해 두고 타인 간의 대화를 녹음했다면 통신비밀보호법을 위반한 게 됩니다. 실제로 배우자의 불륜 증거를 잡겠다고 승용차 등에 몰래 녹음기를 설치했다 통신비밀보호법 위반 혐의로 처벌받는 일은 심심치 않게 벌어지곤 합니다. 처벌 수준도 1년 이상 10년 이하 징역형으로 가볍지 않습니다.
게다가 통상적인 경우라면 제3자 녹음은 형사재판에서는 증거로 인정되지 않습니다. 위법하게 수집한 증거는 증거 능력을 인정하지 않는 위법수집증거 배제 법칙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제3자 녹음이라도 무조건 위법이거나 증거 능력을 상실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우선 형사재판이 아닌 민사재판에서 증거 채택 여부는 재판부가 재량으로 정합니다. 또한 형사재판이라도 아동학대 사건처럼 부모가 녹음기라도 넣어 두지 않는 이상 증거를 확보하는 게 어려운 사건이라면, 진실을 밝히기 위한 공익적 가치가 제3자 녹음으로 인해 침해되는 가치보다 크다고 보아 이를 인정한 판례가 존재합니다. 결국 재판부가 여러 상황을 종합해 그 불가피성과 정당성 등이 사회 통념상 인정될 만하다고 보면 제3자 녹음도 처벌받지 않거나, 증거로 채택될 수 있는 거죠.
출처=셔터스톡
물론 이러한 예외 조항이 통신비밀보호법상에 명시된 게 아니라 어디까지 재판부의 재량이기에 법조계 안팎에서 논란이 되기도 합니다. 일부 교사들도 이러한 녹음 행위가 교권 침해 행위일 수 있다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 왔고요. 이번 사건에서 한국교원단체총엽합회가 해당 작가를 엄벌해달라며 무단 녹음 행위에 대한 엄격한 사법적 판단을 요청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교총은 “녹취 내용이 증거자료로 채택된다면 학교 현장은 무단 녹음(녹취)이 합법적으로 용인되는 게 아닌지 우려하고 있다”는 입장을 법원에 전달했습니다.
국내에서도 사생활권이나, 목소리에 대해 갖는 권리인 음성권 등을 침해할 소지가 있다는 이유로 상대방 동의 없는 녹음을 금지해야 한다는 의견이 있긴 합니다. 하지만 반대 여론이 더 강한 편입니다. 갑질, 폭언 사건이나 공익 폭로 등의 증거로 녹음 파일이 활용되는 사례가 많다 보니 녹음이 이에 대항할 수 있는 ‘약자의 무기’로 여기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해 국내에서도 상대방 동의 없는 녹음을 금지하는 통신비밀보호법 개정안이 발의된 바 있지만 여론 반발에 부딪힌 후 결국 철회됐다 / 출처=국회 의안정보시스템
이 때문에 실제로 지난해 국민의힘 윤상현 의원이 대화 참여자 전원의 동의 없이 대화를 녹음하는 걸 금지하는 통신비밀보호법 일부개정법률안을 발의한 사실이 알려지자 거센 반발 여론이 불거지기도 했죠. 여론이 악화하자 윤상현 의원은 "사회적 공감대를 충분히 얻지 못했다"며 해당 법안을 철회했습니다.
그만큼 국내에서는 아직 ‘녹음을 통한 자기방어’의 필요성이 더 중요하게 여겨지는 분위기입니다. 어찌보면 상대방에 대한 신의보다는 녹음이라는 무기에 의존해 관계를 유지하는 저신뢰 사회의 슬픈 일면이 아닐까 합니다.
동아닷컴 IT전문권택경 기자 tk@i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