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회]
경북 영덕 장사해수욕장 앞바다에 있는 ‘선박 전승기념관’ 문산호. 영덕 = 구자룡 기자
경북 영덕 장사상륙작전 전승기념공원의 학생 모자 조형물. 영덕 = 구자룡 기자
경북 영덕 장사상륙작전 전승기념공원에 조성된 상륙작전을 펴는 학도의용병 동상. 뒤로 문산호가 보인다. 영덕 = 구자룡 기자
경북 영덕 장사해수욕장 앞바다에 있는 전승기념관 문산호의 입구. 영덕 = 구자룡 기자
장사전승기념관에 전시된 장사 해변에 좌초되어 있는 상륙정 문산호의 실제 사진.
장사상륙작전에 투입된 학도병은 밧줄을 이용해 상륙하고 철수할 수밖에 없어 많은 희생이 따랐다. 장사전승기념관에 당시 상황을 재현해 놓았다. 영덕 = 구자룡 기자
‘명부대’ 대원 772명을 실은 문산호가 하루 전 부산항을 출발한 뒤 9월 15일 오후 2시경 장사해안에 도착했을 때 한반도로 접근하던 태풍 케지아는 동해로 올라오고 있었다. 태풍으로 출항 및 해안 도착이 계획보다 하루 늦어졌다. 서해에서 인천상륙을 준비하던 맥아더는 태풍이 동해로 비껴가 한숨을 돌렸으나 명작전 주함이었던 2700t급 문산호는 좌초됐다.
태풍으로 상륙지점을 찾지 못해 표류하던 문산호가 상륙지점 해안에서 300m 떨어진 해역에서 좌초되자 특공대는 문산호와 해안에 밧줄을 연결해 상륙을 시도했다. ‘밧줄 상륙’ 과정에서 학도병들은 적의 총격에 일개 중대가 거의 몰살됐다고 한다.(최상진, 60쪽) ‘72시간 임무 수행 후 전원 철수’라는 상륙작전은 문산호 좌초와 함께 시작부터 난관에 부딪혔다.
장사전승기념관에는 경북 영덕에 상륙한 대원들이 외부와 연락이 단절된 채 고군분투하는 장면을 재연해 놓았다. 영덕 = 구자룡 기자
장사상륙작전 일지
출처 : ‘장사상륙작전 전승기념관’8월 27일 ‘독립 제1 유격 대대’ 편성(772명) 9월 12일 ‘작전 명령 174호’ 전달 9월 14일 LST 문산호 승선, 부산항 출발9월 15일 장사 앞바다 도착, 태풍으로 좌초9월 15일 ‘밧줄’ 상륙, 200고지 점령9월 16〜8일 북한군과 교전. 적 2군단 후방 보급로 차단 작전 9월 19일 구조선 LST 조치원호로 ‘밧줄’ 귀환 아군 피해 : 139명 전사, 92명 부상, 39명 미승선 포로 북한군 피해 : 270명 사살
경북 포항 현 포항여고 앞의 ‘학도의용군 전적비’ 포항 = 구자룡 기자
1950년 8월 11일 학도의용군 71명은 낙동강 방어선을 지키던 국군 3사단 지휘소로 사용되던 포항여중(현 포항여고)에서 적에게 포위된 채 전투를 벌였다. 나이는 16〜21세로 서울 등 전국 각지에서 피란 왔다 참가한 고등학생과 일부 대학생들이었다. 북한군 5사단과 766 유격부대는 이날 새벽 3시 반부터 4차례에 걸쳐 파상적인 공격을 해왔다. 학도병들은 M1 소총과 각자 250여발의 실탄, 수류탄이 가진 무기의 전부였으나 북한군은 장갑차까지 동원됐다. 실탄이 떨어진 뒤에는 육박전까지 벌이는 혈투로 11시간 반을 버티다 48명이 전사하고 13명은 포로가 됐다. 부상자 6명은 초반에 후송되고 4명은 행방불명이었다.
이들이 피로 버티며 적의 진격을 지연시켜 많은 시민들이 피난 갈 수 있었고 사단 지휘소의 주요 서류와 물자도 후방으로 운반할 수 있었다.(‘1129일간의 전쟁 6·25’, 602〜7쪽)
이우근 학생의 편지. 포항 = 구자룡 기자
낙동강 방어선의 동쪽 끝인 형산강 강가에 최후의 방어선 ‘워커 라인’ 표지적이 세워져 있다. 포항 = 구자룡 기자
학도의용군의 활약을 기리는 기념탑은 여러 곳에 있지만 전승기념관은 포항이 유일하다. 포항 = 구자룡 기자
포항여고 앞의 ‘학도의용군 6·25 전적비’를 출발해 포항시 충혼탑〜전몰학도 충혼탑〜학도의용군 전승기념관〜전몰학도 기계 안강지구 전투전적비〜기계 안강지구 전투격전지 조망대로 이어지는 ‘호국 문화의 길’은 학도병의 전투를 기리는 것이 대부분이다.
‘학도의용군 전승기념관’ 건물 앞의 학도병과 어머니 동상. 포항 = 구자룡 기자
낙동강 방어선의 포항 형산강 전투 등을 기념하는 경북 포항의 포항지구전적비. 포항 = 구자룡 기자
학도의용군 전승기념관에 전시된 학도의용군 신분증.
‘의용군’이라는 용어는 북한 인민군이 남침 후 양민을 동원하면서 사용해 용어의 혼란을 피해 ‘학도의용병’으로 고쳐 부르고 있다. 학도병은 학생으로 군번을 부여받지 않은 사람만 해당된다. 군번이 있으면 정규군으로 신분이 바뀐다. 자발적으로 지원한 학생 중 군번을 받지 않았으면 복귀령 이후 학교로 돌아갈 수 있었으나 군번을 받은 경우 현역으로 복무해야 했다.
경북 포항 형산강 도하작전의 호국 영웅 연제근 상사 특공결사대상. 낙동강 최후의 방어선의 한 축인 형산강에서 1950년 8월 11일부터 9월 22일까지의 형산강 전투에서 형산강을 지켜내는데 특공대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포항 = 구자룡 기자
전남 순천시의 호남호국기념관. 호남지역에서는 대규모 전투는 벌어지지 않았으나 1951년 1월 제18전투경찰대대가 전북 정읍의 칠보발전소를 지켜냈고, 호남지역 학도병들이 화개전투에 참여하는 등 호남의 호국 활동을 소개하고 있다. 순천=구자룡 기자
전남 여수시의 6·25 참전 학도병 기념비. 여수=구자룡 기자
6·25 전쟁은 개전 초부터 많은 전사자가 발생해 병력 보충이 시급한 과제였다. 따라서 치열한 공방전을 벌인 낙동강 방어선뿐 아니라 다양한 전투에서 소년병과 함께 긴급 투입됐다.
인천상륙작전에서 미 제1해병사단에 배속된 국군 해병 1연대에도 제주도에서 급히 모집해 배에서 소총 작동법만 배우고 투입된 학도의용병이 포함됐다.
전남 여수 순천 광양 등 호남 동부지역 학생 180여명은 7월 초 혈서를 쓰고 학도병에 자원입대한 뒤 7월 25일 섬진강 화개전투에 참가했다. 이들은 전차를 앞세운 북한군 1천여명과 전투를 벌이다 70여명이 전사하거나 실종됐다. 이는 6·25 전쟁에서 학도병이 치른 첫 번째 전투라고 한다.(순천 ‘호남호국기념관’)
정부는 병력 충원이 원활히 이뤄지면서 1951년 3월 학도병은 학교로 돌아가도록 했다. 정부의 학교 복귀 지시나 대통령의 담화가 제대로 전파되지 않았던 곳에서는 학도병 활동이 중단되지 않고 휴전 때까지 계속된 곳도 있었다.(‘학도의용군 연구’, 73쪽)
재일학도의용군들이 태극기에 참전 결의를 가득 적었다. 일본에선 태극기를 구할 수 없었던 탓에 6·25 당시 일본 동경에 거주하던 한인 학생들이 일장기에 파란 물감을 덧칠하고 4괘를 그려 만들었다.’
제1진 69명은 1950년 9월 11일 일본 요코하마에서 출발한 유엔군과 함께 배를 타고 인천상륙작전에 투입됐다. 인천상륙작전에 3차례, 원산과 부산에 각각 한 차례씩 5차례에 걸쳐 653명이 참전했다.(‘1129일간의 전쟁’, 608쪽)
경기 연천 최전방 태풍전망대에 ‘소년전차병’ 기념비가 있다. 중학생 120여명이 소년전차하사관으로 M36 전차를 운용하는 57전차중대에 편입돼 폭풍전망대 인근 전투 등에 투입됐다는 설명이다. 연천 = 구자룡 기자
‘소년병’은 징집 연령인 18세 미만으로 주로 12~17세 청소년들인데 이들에게는 군번이 부여됐다. 군번이 부여되지 않은 학도병은 정부의 학교 복귀령에 따라 돌아갔다. 그런데 더 어린 소년병은 군번이 부여돼 정식 군인 신분으로 편입됐기 때문에 군 생활을 계속했다. 1953년 7월 27일 휴전이 된 뒤에도 전역하지 못해 5~7년간 더 군 생활을 하기도 했다. 전쟁 기간 소년병은 2만7천여명이 참전해 2570여명이 사망했다. 이들은 국가유공자로서 보상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는 지적이 많다.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의 ‘형제의 상’ 전투에서 국군과 북한군으로 만난 형제를 형상화했다. 구자룡 기자
훈련 중인 카투사 부대원들. 출처 영문위키
초기에는 피난민들이 몰려있던 대구와 부산 등에서 불심검문을 통한 강제징집이 실시되었다. 피난민 숙소를 급습해 자고 있던 장정들을 골라내는 이른바 ‘토끼몰이’ 방식도 있었다. 미리 준비한 M1 개런드 소총을 어깨에 메고 섰을 때 소총 개머리판이 땅에 닿지 않을 정도의 키만 되면 징집대상으로 분류되었다고 한다.
일본으로 처음 출발한 카투사 313명 중에는 부인을 위해 약을 구하러 나섰다 끌려온 유부남부터 책가방을 든 15세 중학생도 있었다. 이들은 배 위에서 입영명령서를 스스로 작성했다. 일본 요코하마항에 도착해 후지산 기슭 미 7사단 훈련소로 갔다.(문관현, 182쪽)
한국전쟁 기간 전체 카투사 4만3660명 중 6415명이 전사해 전사율 14.7%로 미군의 전사율 2.2%보다 7배 가까이 높았다. 북한군은 카투사를 붙잡으면 ‘미제의 앞잡이’라며 더 가혹한 대우를 서슴지 않았다. 2012년 62년 만에 북한에서 돌아온 용사들의 유해 12구는 미 제7사단 제31연대 전투단에 배속돼 장진호 전투에서 싸웠던 약 800명의 카투사 중 일부였다.(애플먼, 역자 서문)
‘장진호 동쪽’에 투입된 미 7사단 31연대에 ‘뻐꾸기 대대’로 편입된 32연대 1대대는 캠프 맥네르에서 500명의 카투사를 받았다. 대대가 장진호에 도착했을 때는 약 300명으로 줄어 있었다. 카투사는 3개 소총 중대에 각각 45명에서 50명이 할당되었다. 이들은 중대병력 숫자의 약 4분의 1을 구성했다. 그런데 미군 분대장들이 한국군 분대원과 만족스럽게 소통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고 한다. 장진호 동쪽 전투 시 이같은 소통부족은 큰 장애가 되었다.(애플먼, 84쪽)
무초 주한 미 대사는 일찍이 한국군 정규 병력을 미군 부대에 배속할 것을 제의하였다. 한국군을 주일미군 기지에서 훈련시킨뒤 미군과 한국군 1명씩 짝을 지어 작전을 수행하는 이른바 ‘버디 시스템’(Buddy System)까지 구체적으로 제안하였다. 1950년 6월 29일 맥아더 사령관이 한국을 방문하였을 때 미군부대 한국군 배속 방안을 건의한 것이었다. 그러다 ‘카투사 제도’로 공식화되었다. 카투사 제도는 정전협정 이후에도 부족한 미군 병력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존속하고 있다.
워리어 베이스의 임진스카웃 대원들. 출처 영문 위키
임진스카웃은 1965년 9월 경기 파주에서 처음 결성됐다. 임진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군 침투 등 충돌이 많을 때는 미 2사단의 첨병으로 활동한 ‘전투 보병의 꽃’이었다고 한다. 임진스카웃과 북한군 특수8군단은 창과 방패처럼 맞대결 구도를 형성했다.
임진스카웃은 1991년 10월 한국군 1사단에 비무장지대 서부전선 경계 임무를 넘겨주고 26년만에 사라진 뒤 잊혀진 존재가 됐다. 그러다 2002년 6월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경비대대가 임진스카웃 배지 착용과 인증서 수여 등 일부 임진스카웃 제도를 부활시켰다.(문관현, 11쪽)
<참고 문헌>김철수 지음, 『그 때는 전쟁, 지금은 휴전 6·25』, 플래닛 미디어, 2017.
문관현 지음, 『임진스카웃』, 정음서원, 2022.
로이 E. 애플먼 지음, 허빈 옮김, 『장진호 동쪽-4일 낮 5일 밤의 비록』, 다트앤, 2013.
『6·25전쟁 학도의용군 연구』,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12.
『1129일간의 전쟁 6·25』, 육군본부 육군군사연구소, 2014.
『포항전투사 – 끝나지 않은 전쟁 6·25』, 학도의용군 포항지회.
구자룡 화정평화재단 21세기평화연구소장 bonh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