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랜더쿠’는 한 가지 분야에 몰입해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 가는 ‘덕후’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자신이 가장 깊게 빠진 영역에서 나만의 브랜드를 만들어 내고, 커뮤니티를 형성해 자신과 비슷한 덕후들을 모으고, 돈 이상의 가치를 찾아 헤매는 이들의 이야기에 많은 관심 부탁합니다.
브랜더쿠에서 수제맥주 덕후들을 위한 시리즈 <수제맥주의 비하인드 씬>을 준비했어요. 필자는 국내 최초 논알콜 수제맥주 전문 양조장 '부족한녀석들'을 설립한 황지혜 대표입니다. 수제맥주 추천을 비롯해 양조사의 역할, 세계 맥주 대회 관련 상식 등 수제맥주 한 캔에 얽힌 이면의 이야기를 전해드릴게요.
이번 프롤로그편에서는 맥주 양조장을 차리는 과정이 얼마나 어려운지 이야기합니다. 시행착오를 겪으면서도 포기하지 않은 맥주 덕후의 이야기를 들려드릴게요.맥주 양조장을 차렸다. 맥주 덕후의 종착역에 다다른 것이다. 그야말로 취미가 업이 됐다.
창고 건물을 임차하고 양조장 공사를 시작했다. 공사가 진행되는 동안 브루하우스 시스템, 각종 탱크들, 보일러, 컴프레셔 등을 거침없이 발주한다. 트렌치(배수구)를 설치하고 냉장창고, 상온창고를 짓는다. 무슨 연유에선지 공사비는 계속 늘어난다. 사실 이유는 분명히 있다. 식품안전관리인증기준(HACCP) 인증을 준비하다 보니 컨설팅 비용부터 생산 동선에 맞춘 가벽 설치, 위생전실 공사, 에어커튼 설치에 이르기까지 추가 비용이 만만치 않아서다. 온수기, 냉온풍기도 공사하면서 설치하는 게 비용을 절감하는 길이란다. 돈이 돈 같지 않다. 이미 초반에 잡아놓은 예산을 초과한 지 오래다.
하지만 머릿속은 행복한 상상으로 가득하다. 한적한 양조장에서 우아하게 맥주를 테이스팅하는 내 모습. 새로운 맥주가 세상에 나올 때마다 환호하는 소비자들. 양조장 주변으로 맥주를 사가려는 긴 줄이 만들어지고, 어렵게 우리 맥주를 구해 마셔본 사람들은 뜨거운 찬사를 보낸다.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거의 모든 것이 계획대로 되지 않았다. 빠듯한 자금으로 시작한 수제맥주 양조장에 맥주 장비의 국적 선택권은 없다. 모두가 중국 업체에 맡긴다. 중국 양조 장비 업체들도 등급이 나뉘지만 중국산이 아니면 들여올 만한 기계가 없다. 독일, 이탈리아 장비로 양조하고 포장하며, 프랑스 분석기로 과학적인 측정을 하면 공수를 줄이면서 맥주 품질을 높일 수 있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안다. 하지만 인력, 재무상황, 작업장 크기 그 어느 것도 이를 허락하지 않는다.우리 역시 여타 국내 수제맥주 양조장들과 마찬가지로 중국 업체에 장비를 발주했다. 때는 코로나19 시국이었다. 우려가 컸지만 코로나19가 곧 종식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바이러스는 쉽게 물러가지 않았고 중국에 오가려면 한 달에 걸친 자가격리를 해야 했다.
경기도 남양주시에 위치한 부족한녀석들 양조장_출처 : 부족한녀석들
맥주 장비는 각 양조장에 맞게 맞춤 생산을 하기 때문에 평소 같으면 2~3회 중국을 오가며 장비 제작 상황을 체크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영상통화뿐이었다. 중국 칭다오에 있는 업체에서 생산해 상하이항에서 출발해야 하는 캔필러 장비는 상하이가 완전히 봉쇄되면서 발이 묶였다. 첫 시련은 기약 없는 기다림이었다. 또 각종 장비와 함께 양조장에 와서 설치를 도와줘야 할 중국의 엔지니어는 끝내 한국 땅을 밟지 못했다.
또 논알콜 수제맥주라는 새로운 제품 카테고리를 열다 보니 국내에 벤치마킹할 제품이 없었다. 결국 식품유형 신고를 잘못했다. 내 자식 같은 캔맥주들을 폐기할 수밖에 없었다.
부족한녀석들 양조장 준비 과정_출처 : 부족한녀석들
벌면 사야 한다
의도치 않게 중국 엔지니어의 인건비와 체재비를 아끼게 됐다. 하지만 이런 소소한 절약이 노동의 시작이었음을 깨닫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2022년 여름, 제대로 더위와 맞서게 된다.분해돼 들어온 설비를 조립하는 게 첫 번째 과제였다. 탱크의 위치를 잡고 조립하고 배관을 하나하나 맞춰 끼는 데만 몇 날 며칠이 걸렸다. 배관을 잘못 끼워 다시 분해하고 재조립하는 것도 부지기수였다. 양조장 인근의 용접 기술자들과 친분을 쌓는 일이 계속 일어났다. 봄부터 시작한 공사는 여름의 한가운데 와서야 마무리됐다. 양조장에서는 또 습기와 더위와의 전쟁이 벌어졌다. 아무리 깨끗하게 청소를 하고 소독을 해도 어디서 날아온 곰팡이 포자가 스물스물 퍼졌다. 냉각탱크 앞에는 탱크 안팎의 온도차로 인해 습기가 응결돼 떨어져 물이 흥건하다. 캔 라벨러와 제조일자 인쇄기를 사지 않은 나는 캔 생산을 앞둔 날 사촌언니를 비롯한 지인들을 불러 모아 몇 천 캔에 라벨을 붙이고 제조일자 도장을 찍었다.
부족한녀석들의 논알콜 수제맥주 어프리데이 시리즈_출처 : 부족한녀석들
조금씩 입소문이 퍼져 매출이 나기 시작한다. 법인통장에도 돈이 쌓인다. 이게 내 주머니로 들어오면 좋겠지만 역시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사도 사도, 살 게 끝이 없다. 소소하게는 배풍기부터 지게차, 냉장트럭에 이르기까지... 여유가 생기면 생기는 대로 살 것이 늘어나는 게 신기할 뿐이다.
원부재료의 경우 구매 수량에 따른 단가에 큰 차이가 있기 때문에 최대한 많은 수량을 발주하려고 하다 보니 매번 목돈이 필요하다. 이렇게 1년여 간 끊임없이 구매를 했지만 아직도 갖춰야 할 게 너무나 많이 남았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하다.
그래도...
하길 잘했다. 순간순간 해결해야 할 일들에 매몰되다 보면 이게 나의 꿈이었다는 사실을 가끔 잊게 된다. 하지만 결국은 내 운명이었음을 깨닫는 순간이 온다.퇴근 후 그날의 분위기와 날씨에 맞는 맥주 한 캔을 잔에 따르고 우리 브랜드에 대한 온라인의 각종 언급을 살펴보는 때가 하루의 하이라이트다. “잘 만든 진짜 맥주보다 더 맛있다” “생활에 생기를 불어넣어준다”는 리뷰를 읽으면서 혼자 미소를 짓는다. 내 맥주를 마시는 사람들이 다른 데서 느끼지 못했던 즐거움을 경험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이뤄졌다. 진심은 어떻게든 전달된다. 여러 기업과 유통 플랫폼에서 OEM과 콜라보, 제품 공급 제안이 온다. 그래도 맛과 품질이라는 수제맥주의 본질에 충실하려고 했던 내 의도가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한다. 오늘도 상상 못했던 문제에 직면하지만 또 그것을 어떻게든 풀어나가는 우리 팀이 자랑스럽다. 앞으로 다가올 어떤 위기도 잘 헤쳐 나갈 것이다.
수제맥주 제조는 맥주에 대한 진지한 애정과 열정이 없이는 하기 어려운 비즈니스다. 트렌드라고, MZ세대가 좋아한다고 마냥 돈벌이로만 접근한다면 쉽게 지치고 말 것이다. 아니면 일부 양조장들처럼 맛없고 의미 없는 콜라보 맥주를 만들고 주정과 인공향료를 활용한 하이볼을 만들어 편의점에 저가 납품해야 공장을 돌릴 수 있다.
아무 이유 없이 무엇인가에 빠져들었던, 순수하고 열정적인 덕질의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런 비즈니스적 선택을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황지혜 부족한녀석들 대표 jhhwanggo@gmail.com
정리=이한규 기자 hanq@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