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든 우월의식 가득…대접 못 받으면 ‘폭발’ 내면의 열등감 건드려지면 공격성 드러내
정신 건강, 정서 문제 등 마음(心) 깊은 곳(深)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다룹니다. 일상 속 심리적 궁금증이나 고민이 있다면 이메일(best@donga.com)로 알려주세요. 기사로 알기 쉽게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갑질하는 사람들의 심리
갑질하는 사람들은 남의 집 자식 귀한 줄 모르고, ‘나만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남을 무시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근거 없는 우월의식과 이기심은 어디서부터 나오는 걸까. 채널A 화면 캡처
“나 ○○대학 나온 사람인데 제가 틀렸다는 건가요? 내 아이가 우선이지, 내가 선생님 인권 보호해주는 사람은 아니잖아요?”(학부모가 유치원 교사에게)
“더러우니까 가져가. 개밥 못 먹겠다…평생 배달 열심히 하시길 바랍니다. 분수에 그것도 과분한 직종 같은데”(자칭 ‘변호사 집안’ 고객이 배달 식당 사장에게)
“내 남편이 강력반 형사거든, 내가 네 밥그릇 끊어줄게…그러니까 택배기사나 하고 있지”(고객이 택배기사에게)
‘갑질’이라는 단어로 기사를 검색하면 학교뿐 아니라 기업, 공공기관, 군대, 식당, 백화점, 아파트 등 관련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 장소를 찾기가 더 힘들다. 특히 최근 서울 강남의 한 초등학교 교사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건을 계기로, 그동안 일부 학부모의 악성 민원에 시달려온 교사들의 폭로가 끊이지 않고 있다.
갑질이란 표현은 원래 불평등한 지위 관계에서 일어나는 일을 주로 의미했다. 요즘은 상식을 벗어나 자신의 권리를 과도하게 주장하는 사례에도 넓게 사용된다. 갑질하는 이들의 상당수는 누가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집안이나 학벌, 직업을 먼저 들먹이며 ‘내가 누군지 아느냐’ ‘감히 어디서’ 같은 표현을 주로 쓴다. 자신이 우주의 중심인 양 ‘나만 특별하다’고 여기며 갑질을 권리로 여기는 사람들. 도대체 왜 이러는 걸까.
“나는 특별한 대접을 받을 만한 사람”
자기 집안에 변호사가 있다며, 음식을 배달하러 온 식당 사장에게 문자 메시지로 막말하는 손님. 온라인 커뮤니티 캡처
갑질의 핵심에는 본질적으로 ‘자격 의식(Sense of entitlement)’의 과잉이 작용한다. 심리학 연구에서 자격 의식이란 자신이 특별 대우를 받을 만한 충분한 권리를 가졌다고 생각하는 지나친 자기애를 가진 경우를 일컫는다. 과한 자격 의식을 가진 이들은 심지어 세상 사람들이 자신에게 호의를 ‘빚졌다’고까지 생각한다. 나는 마땅히 대접받을 자격을 가졌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타인이 내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해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면, 마치 빚을 받아내듯 ‘당장 내놓으라’는 뻔뻔한 태도가 나오는 것이다. 자격 의식이 사회에서 용인받을 만한 수준을 넘어서면, 시도 때도 없이 “내가 누군지 알아!”를 외치는 트러블 메이커가 되기 쉽다.
●자격 의식이 높은 사람들의 사고 특징“나는 솔직히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자격이 있다고 느낀다”
“나에게 위대한 일이 벌어질 것이다”
“내가 타이타닉호에 있었다면 첫 번째 구명정에 탈 자격이 있었을 것이다”
“나는 그럴 자격이 있기 때문에 최고의 대우를 요구한다”
“나는 인생에서 더 많은 것을 받을 자격이 있다”
“나 같은 사람들은 남들보다 추가로 휴식을 누릴 자격이 있다”
“모든 것이 내 방식대로 진행되어야 한다”
※심리적 자격 척도(The Psychological Entitlement Scale·PES) 문항의 일부
병든 자기애 속 감춰진 ‘열등감’
갑질하는 사람들이 그냥 ‘성격이 더러워서’ 그렇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자기애성 성격장애 등 심리적 문제가 있을 수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자기 자신을 과도하게 부풀려 평가하고 지나치게 특별한 존재로 여긴다면, ‘자기애성 성격장애’와 같이 다양한 부적응을 일으킬 수 있다. 자기애성 성격장애는 자기중심적이며, 남을 위할 줄 모르고, 우월적이며, 권력이나 지위를 과시하는 것을 좋아한다. 모든 갑질의 원인을 병적인 자기애로 해석할 순 없겠지만, 갑질하는 이들의 행동 특징을 상당 부분 설명할 수 있다.
그러다가 타인에게 조금이라도 무시당하거나 대접받지 못했다는 느낌을 받으면 열등감이 자극되면서 상대에게 비상식적으로 분노를 쏟아낸다. 더구나 그 상대가 자기 생각에 ‘을’이라면? 상황에 비해 과도한 분노가 일면서 더욱 가차 없이 응징에 나선다. 고객이 서비스가 마음에 안 든다고 직원을 무릎 꿇고 빌게 하거나, 때리고 욕하고 물건을 던지는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넌 내게 모욕감을 줬어” 공격성·분노 표출
서울의 한 패스트푸드 매장에서 중년 남성 손님이 주문한 음식이 늦게 나왔다고 화를 내며 점원에게 음식을 던져 문제가 됐다. 유튜브 화면 캡처
사실 누구든지 모멸감을 느끼면 분노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자기가 대단하다고 여기는 사람일수록 이런 평가에 더 민감해하며, 자신이 본 피해에 비해 과하게 보복하려 든다.
브레드 부시먼 미국 아이오와 주립대 심리학과 교수 연구팀은 모멸감과 폭력성에 관한 연구를 진행했다. 대학생 266명을 대상으로 낙태 찬반 의견을 나눠 글짓기를 시키고, 짝꿍과 바꿔서 채점하도록 했다. 채점 결과는 ‘매우 잘 썼다’는 칭찬부터 ‘정말 끔찍하다’는 혹평까지 다양했다. 사실 각 사람에게 통보된 결과는 실제 짝꿍이 채점한 게 아니라, 연구진이 무작위로 아무 얘기나 써서 준 것이었다.
그런 뒤, 각각의 짝꿍과 간단한 게임을 하도록 했다. 패자에게는 아주 듣기 싫은 소음 벌칙이 주어졌다. 이때 나오는 소음의 크기, 지속시간은 승자가 정할 수 있었다. 서로에게 소음 폭탄을 터트릴 수 있는 무기를 장전하고 게임에 임하도록 한 것이다.
그 결과 앞서 글짓기 채점에서 짝꿍에게 ‘글을 못 썼다’고 안 좋은 평가를 받은 사람일수록 전반적으로 강한 소음으로 보복하려는 경향이 나타났다. 그중에서도 특별히 큰 소음과 긴 지속시간으로 과도하게 보복한 사람들을 살펴봤더니, 나르시시즘(자기애) 점수가 유독 높은 사람들이었다. 글짓기를 못 했다는 채점 결과가 이들의 자존감을 건드렸고, 다른 이들보다 과하게 보복하게 만든 것이다.
공감 능력 떨어져…다른 사람 고통 이해 못 해
‘땅콩 회항’으로 물의를 일으킨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현재 조승연으로 개명)이 재판받고 나오는 모습. 타인의 고통을 공감하는 능력이 떨어질 경우 분풀이의 정도가 강해질 수 있다. 동아일보 DB
‘나만 특별하다’고 여기는 이들은 다른 사람의 심정이 어떨지 생각하는 공감 능력이 떨어진다. 상대가 힘들든지 말든지, 오로지 자기가 피해 본 사실만 중요하다는 기적의 논리를 펼치기 때문에 대화로 소통하기엔 한계가 있다. 이들은 선을 잘 넘고, 무례하며, 상대방을 조종하려고 든다.
데니스 라이디 미 조지아대 심리학과 교수 연구팀은 앞서 소개한 실험과 비슷한 연구를 진행했다. 자기가 특별하다고 믿는 자기애 성향 중에서도 어떤 요소가 있으면 더 공격적인지 알아보기 위한 연구였다.
연구진은 참가자를 2명씩 짝지어 간단한 게임을 하도록 했다. 이번에는 승패와 관계없이 게임이 끝나면 서로에게 전기충격을 줘서 경쟁자를 괴롭히는 기회를 줬다. 전기충격 강도는 0에서 10까지 참가자마다 알아서 조절하도록 했다.
승패와 관계없이 상대에게 벌을 주라고 하니 일부 참가자들은 처음엔 어리둥절해하며 눈치를 보다 시험 삼아 낮은 강도의 전기충격 버튼을 눌렀다. 그러다 상대가 충격 세기를 높이면 따라 올리는 식이었다. 그런데 자기애 성향이 높은 사람들은 처음부터 강한 전기충격을 줬다. 자신이 조금이라도 피해 볼 것 같은 상황을 참지 못하고 격렬하게 상대를 공격한 것이다.
특히 자기애 검사에서 ‘자격 의식’과 ‘착취성’ 점수가 높게 나온 사람일수록 공격성이 높았다. 여기서 착취란 다른 사람이 고통을 받든지 말든지 상관하지 않고 자기 이득을 얻으려는 태도를 말한다. 대인관계에서는 공감 능력이 떨어지고, 자기중심적인 태도로 나타난다.
“하고 싶은 것 다 해” 받아주며 키운 가정환경도 문제
편의점 주인이 진열대를 발로 차는 아이(왼쪽 사진)에게 하지 말라고 하자, 아이의 아버지가 계산할 물건을 계산대에 던지며 화를 내는 장면(오른쪽 사진). 온라인 커뮤니티 캡처
어렸을 때부터 자녀를 과대평가하면서 “특별 대우를 받아 마땅하다”는 인식을 심어주는 양육환경도 문제가 될 수 있다. 이렇게 길러진 자녀는 부모에 의해 자격 의식이 과도하게 부풀려진 줄 모르고, 집 밖으로 나와 사회에서도 그런 대접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때마다 이런 기대가 충족되지 못하면 수치심과 분노를 느낄 수 있다.
부모는 자녀에게 ‘안되는 건 안 되는 것’이라는 훈육을 통해 인격 성숙에 필요한 ‘적절한 좌절감’을 경험하게 해야 한다. 작은 좌절을 통해 형성된 심리적 근육이 있어야 삶의 큰 좌절 앞에서도 무너지지 않을 수 있다. ‘나에겐 상처받을 이유가 없다’ 저자이자 유튜브 채널 '토킹닥터스, 토닥'을 운영하는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원은수 원장은 “자신이 특별대우 받아야 한다는 근거 없는 믿음이 있는 아이들은 욕구가 좌절됐을 때 정신적으로 건강한 아이들은 겪지 않는 불필요한 수치심을 경험한다”며 “이때 발생하는 수치심은 우울감이나 분노로 이어지고, 학교폭력 같은 문제까지 이어질 수 있다”고 했다.
이 때문에 자녀가 마치 아무런 결점도 없이 완벽한 존재인 것처럼 대하는 태도는 자녀에게 독이 된다. 오히려 자녀가 스스로 부족한 부분이 무엇인지 깨닫도록 돕고, 극복 과정을 지지해주는 것이 부모의 역할이다. 또한 돈이나 학벌, 권력적 성공이 최고라는 왜곡된 사고방식을 심어주기 보단 다른 이의 고통과 아픔을 아는 공감 능력을 길러주는 것이 중요하다. 원 원장은 “자녀가 부모에게 공감능력을 배우지 못하면, 다른 데서는 배우기 힘들다”며 “타인을 배려하고 존중하는 법을 가르치는 양육 방법이 자녀의 공감 능력을 키울 수 있다”고 했다.
최고야 기자 bes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