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불어민주당 김은경 혁신위원장(오른쪽)이 지난 6월 20일 오전 서울 국회에서 열린 당 혁신기구 발족식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김 위원장 왼쪽에 이재명 대표가 앉아있는 모습. 뉴스 1
민주당에서 ‘혁신위’ 필요성이 처음 거론된 건 5월 14일 의원총회에서입니다. 전당대회 돈봉투 사건에 이어 김남국 의원 코인 사태 등 도덕성 논란으로 당 지지율이 바닥을 쳤을 때죠. 급히 ‘쇄신 의원총회’를 연 민주당 원내지도부는 소속 의원 전원 명의로 “절박한 마음으로 쇄신하겠습니다”라는 제목의 결의문을 냅니다. 이 결의문 마지막 항목 5번, 그것도 맨 마지막 줄에 ‘당 차원의 혁신기구’가 살짝 언급됐습니다.
5. 당을 근본적으로 혁신하겠습니다.
민주당이 먼저 기득권을 내려놓고 정치를 바꾸겠습니다. 오늘 보고드린 쇄신 방안을 실천해 나가고, 전당대회 투명성과 민주성 강화 등 당 차원의 정치혁신 방안을 준비해서 보고드리겠습니다. 이를 위해 당 차원의 혁신기구를 설치하겠습니다.이에 대해 한 재선 의원은 “혁신기구 얘기는 그날 처음 나왔다. 애초에 의원들 사이에선 관심 사안도 아니었다”고 했습니다. 초선 의원도 “의총 도중 박광온 원내대표가 혁신기구 설치를 언급하긴 했지만, 결의문 초안에도 자세한 내용이 없다 보니 다들 막연하게만 생각했다”고 했습니다. 애초에 크게 힘이 실릴 조직이 아니었다는 거죠.
“민주당이 시간 끈다”는 비판이 이어지자 결국 민주당은 6월 5일 쫓기듯 이래경 사단법인 다른백년 명예이사장을 혁신위원장으로 선임합니다. 이재명 대표는 이 이사장의 선임 소식을 직접 발표하며 “새 혁신기구의 명칭, 역할 등에 대한 것은 모두 혁신기구에 맡기겠다. 혁신기구가 마련한 혁신안을 존중하고 전폭적으로 수용하겠다”고 했죠.
민주당 이재명 대표는 6월 5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민주당은 당의 혁신 기구를 맡아서 이끌 책임자로 사단법인 다른백년의 이래경 명예이사장을 모시기로 했다”고 밝혔다. 이 이사장은 ‘천안함 자폭’ 등 과거 발언 논란으로 임명 9시간 만에 자진해서 사퇴했다. 사진은 이 이사장이 2018년 3월 한 세미나에서 인사말을 하는 모습. 뉴스1
다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래경 사태 덕분에 혁신위에도 비로소 존재감이 조금씩 생깁니다. “이래경 다음 타자는 누구냐”가 화제가 되기 시작한 거죠. ‘김은경’이란 이름이 등판한 건 쇄신 의총으로부터 딱 한 달째 되던 6월 15일 저녁이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금융감독원 부원장 출신’ ‘한국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라는 프로필부터 낯설었던 탓에 “금융·소비자운동 전문가가 웬 당 혁신을 하느냐”는 말도 나왔습니다.
더불어민주당 김은경 혁신위원장이 7월 12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김 위원장 뒤로 ‘윤리정당 정치회복’이라고 적혀있다. 뉴시스
혁신위는 실제 ‘이재명 사법리스크’에 대해 “사법적 판단(영역)이라 해당 문제를 혁신위가 관리할 이유는 없다”고 일찌감치 선을 그었고, 이재명 체제에 대해서도 “혁신위 평가 대상이 아니다”라고 일축했습니다. ‘이재명 지키기 혁신위’라는 지적에 혁신위 스스로도 “틀린 생각은 아닌 것 같다. 이재명 탄핵 사유를 현재까지 발견 못 했다”(서복경 혁신위원)고 하더군요.
당연히 비명계 의원들과는 갈등이 이어졌습니다. “혁신위가 이 대표 체제에 대해서는 평가의 대상이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문을 닫아놓고 길을 찾는 거나 마찬가지”(윤영찬 의원) “성역 있는 혁신을 누가 혁신이라고 보겠나. 지도부 눈치 보기로는 혁신이 불가능하다”(이원욱 의원)이라는 비명 의원들의 비판에 맞서, 혁신위도 비명계 의원들을 겨냥한 날선 발언을 쏟아냈습니다. ‘미스터 쓴소리’ 5선 중진 이상민 의원을 향해 실명을 거론하며 “자중하라”고 경고하는가 하면, 이낙연 전 대표를 향해선 “자기 계파를 살리려 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분열은 혁신 대상”이라고도 했죠. 이에 친이낙연계 설훈 의원이 발끈하며 “김 위원장의 발언은 오히려 갈등을 부추기며 당의 혼란을 가중시키는 격”이라고 강하게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 뒤로도 김 위원장의 ‘실언 리스크’는 계속 이어졌습니다.
김 위원장은 민주당 초선 의원들과의 간담회를 마치고는 “기억에 썩 남는 것은 없다”, “코로나 때 (당선된) 초선 (의원들)이라 소통이 잘 안되는 느낌이 들었다. 자기 의견을 이야기할 때 정리가 덜 된 듯했다”고 말해 ‘초선 의원 비하 논란’에 휩싸였습니다. 간담회에 참석했던 한 초선 의원은 “전혀 그런 분위기가 아니었는데 본인이 잘 못 알아듣고선 저렇게 말하는 거 아니냐”며 황당해하더군요. 의원들의 항의가 빗발치자 결국 김 위원장은 “오해의 소지가 있었다면 유감스럽게 생각한다”고 해명했습니다. 또 ‘오해’라는 겁니다.
“둘째 아이가 중학교 1학년, 2학년 때 저한테 이런 질문을 했어요. ‘엄마, 왜 나이 드신 분들이 우리 미래를 결정해?’ 그러는 거예요. 그래서 자기가 생각할 때는 사람들의 평균 여명이 얼마라고 보았을 때 자기 나이로부터 여명까지, 엄마 나이로부터 여명까지로 해서, 비례적으로 투표를 하게 해야 한다는 거예요. (중략)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1인 1표이기 때문에 현실적인 어려움이 있지만 그게 참 맞는 말이에요. 우리들의 미래가 훨씬 더 긴데 왜 미래가 짧은 분들이 똑같이 1대 1로 표결을 하느냐는 거지요.”
논란이 거세지는데도 혁신위는 “김 위원장 아들이 중학생 시절 낸 아이디어를 소개하며 한 발언을 왜곡해 어르신 폄하로 몰아가는 것은 구태적인 프레임”이라고 반박했습니다. 저 발언을 그대로 봤을 때 무엇이 왜곡이고 몰아간다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김 위원장은 이번에도 ‘오해’라는 주장만 이어갔습니다. 8월 1일엔 “오해가 있었다면 노여움을 풀어 달라”고 했고 2일에는 “교수라 철없이 지내서 정치언어를 잘 몰랐다”고 하더군요. 교수가 언제부터 ‘철없는 직업’이 됐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이번에도 자신의 진위를 사람들이 ‘오해’했다는 겁니다. 김 위원장은 앞서 이낙연 전 대표를 비판한 인터뷰가 후폭풍이 거셌을 때도 “(언론이 인터뷰 내용을) 앞뒤 자르고 연결했기 때문”이라며 언론 탓을 했었죠. ‘오해 탓’ ‘언론 탓’하는 스킬만 봐서는 정치언어를 충분히 잘 아시는 분 같습니다.
김호일 대한노인회장이 3일 서울 용산구 대한노인회 중앙회에서 노인 비하 발언 논란을 사과하기 위해 찾아온 김은경 혁신위원장과 면담하던 중 김 위원장 사진을 때리고 있다. 뉴스1
김은경 혁신위원장의 사진을 손으로 때리며 분노를 표출하고 있는 김호일 대한노인회장. 뉴스1
민주당에선 혁신위가 남은 임기 동안 사고를 더 치지는 않을지 불안감이 적지 않습니다. “혁신위 해체가 혁신”이라며 조기 해체 요구가 이어지면서 당에선 일단 9월 초까지 예상했던 혁신위 임기를 이달 20일 정도로 2주 앞당겨 종료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 합니다. 다만 김 위원장은 “혁신의 의지는 그대로”라며 정면 돌파 의지를 고수하고 있죠. 10일엔 비명계는 반대하고, 개딸 등 이재명 강성 지지층은 찬성하는 사실상의 ‘대의원제 폐지’ 방안까지 발표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마지막까지 정말 시끌시끌한 혁신위로 기록에 남을 것 같습니다.
김지현 기자 jhk8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