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 수만 명 왜 땡볕 아스팔트에 모이나 가르침과 돌봄은 전혀 다른 영역 ‘사회화 안내자’로서 교사의 훈육 존중해야 교육 망가진 나라, ‘내 아이’ 미래인들 있을까
정용관 논설실장
지난 주말에도 광화문 일대는 ‘검은 물결’을 이뤘다. 좀 떨어진 곳에선 교사 수만 명이 운집했는지조차 모를 정도로 조용한 집회였다. 너무도 질서정연해 ‘집회의 품격’을 먼저 떠올리게 했다. 땡볕 아스팔트로 몰려 나온 선생님들은 좌절감, 무력감을 호소하며 “다시 뜨거운 열정으로 가르칠 환경을 만들어 달라”며 ‘교육권’ 보장을 숨죽여 외쳤다.
어느 10년 차 초등학교 교사에게 뭐가 문제의 핵심인지 물어봤다. ‘악성 민원’이라고 했다. 담임 맡기가 두렵다고 했다. 함께 임용된 가까운 교사 6명 중 4명이 정신과 약을 처방받는다고 했다. 교장 교감은 문제가 터져도 뒤로 빠지고 오롯이 담임이 감내해야 하는 상황이 된다고 했다. 그 사연이 구구절절해 지면에 옮기기 힘들 정도다.
악성 민원의 본질은 “내 자식만은…”의 이기주의다. 그 배타적 이기심은 학벌 콤플렉스의 발현일 수도 있고 “내가 이렇게 성공했는데” 하는 선민의식의 발로일 수도 있다. 사실 교육 문제만큼 ‘이중성’을 띠는 영역도 없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일가 얘기를 굳이 들먹이지 않더라도 겉으론 근사한 보편성과 도덕성을 내세우는 이들도 자식 교육 문제, 입시 문제가 얽히면 ‘내 아이는 예외’ 심리가 작동하는 사례가 허다하다. 그렇다 해도 남의 자식 제치고 짓밟고서라도 우리 아이만 올라서면 된다는 식의 천박한 인식은 심각한 사회병리라 할 만하다.
‘악의 평범성’ 개념으로 유명한 정치철학자 한나(해나) 아렌트는 “교육은 반드시 가르침과 동시에 일어난다”고 했다. 가르침 없이 배울 수도 있지만 그건 교육이 아니라는 것이다. 배움은 혼자서도 이룰 수 있지만 가르침은 교사와 학생의 ‘관계’ 안에서만 이뤄지기 때문이다. 아렌트가 말하는 교육의 본질은 ‘아이들이 세계 속에 진정한 한 인간 존재로 탄생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박은주 ‘한나 아렌트, 교육의 위기를 말하다’). 생물학적 탄생이 아닌 ‘사회적 탄생’을 돕는 것이 교육이고, 아이들을 세상으로 안내하는 역할을 하는 이가 바로 선생님이라는 뜻이다.
아렌트의 눈으로 보자면 우리 교육은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학교는 작은 사회다. 그러나 공동체 의식, 남에 대한 배려, 사회 기본 룰에 대한 존중, 인내심 같은 기본적인 소양, 사회화 등에 대한 가르침과 배움이 없는 학교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학생들 앞에서 잘한 학생을 칭찬하는 것도, 잘못한 학생을 야단치는 것도 차별이고 인권 침해라고 하니 교육은 설 자리가 없다. 일부 학부모는 비싼 학원비 또는 과외비를 지출해서인지 학비가 없는 공교육은 무시하는 경향마저 있는 것 같다. 그걸 보며 자란 ‘내 아이’는 과연 올바른 사회인이 될까.
이렇게 공교육에서는 악성 민원, 툭하면 벌어지는 인권 침해, 학대 논란 등으로 난리이지만 지금까지 학원이나 과외 선생님을 고발하였다는 뉴스는 본 적이 없다. 금전적 계약관계니 그렇다 치더라도 공교육과 사교육을 대하는 희한한 이중심리가 작동하는 건 아닐까.
최근 사태로 악성 민원이 잠시 주춤할지 모르나 상황이 본질적으로 달라질 건 없다. ‘교권 대 학생 인권의 대립’ 운운하는 수준에 그칠 게 아니라 뭘 가르칠 건지, 학교는 훈육이 가능한 곳인지 등 큰 원칙과 방향을 깊이 논의해야 한다. 학교를 이념의 진지로 만들고 인권 운운하며 정상적인 학생들의 인권까지 침해하는 교실 분위기를 만든 정치 교육감들은 제발 뒤로 물러나고….
정용관 논설실장 yongar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