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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 내 괴롭힘’ 신고해도 85%는 방치… 소극적 법 집행도 걸림돌

입력 | 2023-08-08 03:00:00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 시행 4년
행위별 명확한 처벌-조사규정 없고, 5인 미만 사업장엔 적용조차 안돼
현장 교육-인식 개선 노력 필요… 예방에 초점 맞춘 정책 보완을



게티이미지코리아


직장인 A 씨는 지난달 고민 끝에 시민단체 직장갑질 119에 재직 중인 회사 사장 B 씨의 ‘직장 내 괴롭힘’을 고발했다. 사장 B 씨는 A 씨를 부를 때 혀로 입천장을 치는 소리를 내며 마치 주인이 개를 부르는 듯한 제스처로 오라고 손짓을 했다. 또 회식에서 공개적으로 ‘바보’라고 부르는 등 모욕적인 발언을 반복했다. 신체적인 위해도 있었다. B 씨는 A 씨의 손을 비틀어 쥐거나 직장 동료들이 보는 공개적인 장소에서 A 씨의 등과 어깨를 손으로 치며 “죽여버린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이에 참다못한 A 씨가 시민단체에 고발을 하게 된 것이다.

● 직장인 3명 중 1명 ‘직장 내 괴롭힘 경험’
근로기준법 개정으로 2019년 7월 16일부터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이 시행됐다. 시행한 지 4년이 지났지만, 직장 내 괴롭힘은 곳곳에서 현재진행형으로 나타나고 있다. ‘직장 내 괴롭힘’이란 사용자 또는 근로자가 지위나 관계 등 우위를 이용해 업무상 적정 범위를 넘어 다른 근로자에게 신체적, 정신적 고통을 주거나 근무 환경을 악화시키는 행위를 뜻한다.

직장갑질 119가 6월 전국 직장인 1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 ‘지난 1년 동안 직장 내 괴롭힘을 경험했다’고 응답한 비율은 33.3%였다. 직장인 3명 중 1명은 여전히 직장 내 괴롭힘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다. 경험한 직장 괴롭힘의 유형으로는 △모욕·명예훼손(22.2%) △부당 지시(20.8%) △폭행·폭언(17.2%) △업무 외 강요(16.1%) △따돌림·차별(15.4%) 순으로 나타났다.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 시행 이전인 2019년 6월 당시에는 같은 설문에서 직장 내 괴롭힘을 경험했다는 응답이 44.5%였다. 법 시행으로 10%가량 줄어들어 효과를 보고 있지만, 일정 수치 이상 줄어들지 않는 모습이다.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 자체도 문제가 적지 않다. 직장 내 괴롭힘에 해당하는 행위들이 너무 포괄적인 데다, 폭언이나 부당 지시 등 각 괴롭힘 행위별 명확한 처벌 규정 및 조사 방법이 없다. 직장 내 괴롭힘 발생 시 회사 자체 조사를 통해 적절한 조치를 해야 한다고 명시돼 있어 실제 처벌까지 이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또한 개인 간 갈등인지, 사업장 내 직장 내 괴롭힘인지 판단하는 과정에서 고용노동부의 ‘강 건너 불구경’ 식 소극적인 법 집행 행태를 지적하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실제 고용노동부 통계를 보면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 시행부터 올해 6월까지 신고된 직장 내 괴롭힘 사건은 2만8731건이다. 이 중 개선 지도, 검찰 송치, 과태료 부과 등의 권리 구제까지 이어진 경우는 4168건이다. 전체의 14.5% 수준에 불과하다.

특히 기소 의견으로 검찰에 송치된 사건은 211건으로 전체의 0.7% 수준이었다.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이 시행된 지 4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고용노동부 신고 사건의 85.5%는 적절한 사후 조치 없이 방치되는 실정이다.

●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 사각지대 여전
근로기준법에 따라 5인 미만 사업장일 경우에는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이 적용되지 않아 피해자들이 보호를 받지 못하는 점도 문제다. 가족 경영회사 등 사용자와 가해자가 친족일 경우에는 회사 내부에서 2차 가해 및 조치 의무를 위반하는 경우가 생긴다.

중소기업에 다니는 직장인 C 씨는 무단 조기 퇴근을 일삼는 동료 D 씨의 불량한 업무 태도를 지적했다. 그러나 D 씨는 회사 대표의 처남이었다. D 씨는 적반하장식으로 C 씨를 ‘퇴사시키겠다’며 위협했다. C 씨는 회사에서 ‘분란을 일으켰다’는 명목으로 감봉 징계를 받기도 했다. 이에 C 씨는 고용노동부에 진정을 제기했지만 고용부는 ‘회사 업무가 아닌 개인 간 갈등’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C 씨는 “너무 억울한데 풀 수 없었다”고 하소연했다.

직장 현장에서 괴롭힘 예방 교육이나 인식 개선 노력도 미비하다는 평가다. 직장 내 괴롭힘 신고를 한 피해자에게 가해지는 조직적인 추가 괴롭힘에 대해서 대처가 어렵다는 한계도 존재한다.

전문가들은 직장 내 괴롭힘 관리·감독을 위한 행정적 역량을 늘리고, 직장 내 괴롭힘을 사전에 예방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권혁 부산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은 우리나라가 고도 성장하는 과정에서 취약했던 근로자들의 인격권을 어떻게 보호하느냐는 고민의 산물”이라며 “우리나라의 노동행정 역량은 임금 체불 쪽에 집중돼 있는 만큼, 직장 내 괴롭힘 조사와 감독에 대한 행정 역량을 늘려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특히 인격권 침해 없이 근로관계 복귀를 유도하는 법 취지에 맞게 사전 예방에 초점을 맞춘 정책적 보완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이문수 기자 doorwater@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