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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보는 남편과 아내의 장미 정원[김선미의 시크릿가든]

입력 | 2023-08-10 10:00:00


영국의 대문호 윌리엄 셰익스피어는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줄리엣의 대사를 통해 말했다. “이름이 뭐가 중요할까요? 우리가 장미를 어떻게 부르든 이름이 무엇이든 그 향기는 달콤할 거예요.” 이 말에 절반만 수긍한다. 장미는 향기가 달콤한 동시에 그 이름도 특별하다.

충남 아산시 배방읍에 있는 황인준-오수정 씨의 3층 단독주택 정원. 이들 부부의 아홉 살 스탠다드 푸들 ‘꼬봉이’도 좋아하는 장소다. 오수정 씨 제공

긴 장마가 막 끝나고 무더위가 시작된 7월 마지막 주 금요일 오전. 충남 아산신도시 배방지구에 있는 황인준(58)-오수정(54) 씨 부부의 3층 단독주택 정원에 들어서자 장미 향기가 물씬했다. 영국 장미인 빨간색 ‘폴스타프’(Falstaff)와 살구색 ‘레이디오브샬롯’(Lady of Shalott), 독일 장미인 연분홍색 보이지(Voyage)….

화려한 미모의 장미 폴스타프에 셰익스피어 ‘헨리 4세’에 등장하는 주정뱅이 노 기사의 이름을 붙인 장미 업계의 작명 센스란! 오 씨의 정원에는 공주(‘프린세스 알렉산드라 오브 켄트’), 작곡가(‘벤저민 브리튼’), 화가(‘레오나르도 다빈치’)도 산다. 세계적 육종회사인 영국 데이비드 오스틴 사(社)와 프랑스 메이앙 사가 이들의 이름을 따서 장미의 이름을 지었기 때문이다.

지난달 28일 충남 아산시 배방읍 집 정원에 선 황인준-오수정 씨 부부. 아산=김선미 기자

오 씨는 32평 마당 정원과 8평 옥상 정원을 가꾼다. 덩치 큰 목백일홍과 목련, 가문비나무와 단풍나무, 라일락과 수국, 달리아와 백합 등이 심어진 이 정원에는 무려 100여 종의 장미가 자란다. “이 아이들이 힘든 장마의 고비를 넘겼어요. 모진 빗속에서 잘 버텨줘서 고마워요. 하지만 지금부터 무더위와 병충해에 시달릴 걸 생각하니 마음이 아파요. 사람도 식물도 힘든 계절이에요. 장마 전에 오셨으면 꽃 대궐을 보실 수 있었을텐데요.” 그는 기다란 전지가위를 들고 장미 꽃송이들을 잘라 순식간에 핸드 타이드 부케를 만들었다. “아침 일찍 자르지 않으면 폭염에 꽃들이 다 말라버리거든요.” 더위뿐일까. 태풍이 오는 것도 대비해야 한다.

오수정 씨는 정원에서 키우는 장미가 폭염에 말라 버리지 않도록 이른 아침 장미를 잘라준다. 마당에서 자른 장미들로 만든 핸드타이드 부케.

KTX에 몸을 싣고 서울에서 불과 30여 분 왔을 뿐인데 딴 세상이 펼쳐진다. 아산신도시는 미국이나 유럽처럼 단독주택들이 자리 잡고 있다. 담장도 대문도 낮아 이웃들의 정원이 훤히 들여다보인다. 동네 사람들도, 지나가던 외부 사람들도 오 씨의 정원에 찬사를 보낸다. 오 씨가 장미를 삽목(가지를 꽂아 뿌리를 내는 작업)해 이웃에게 나누면서 마을 전체가 꽃마을이 됐다.

황인준-오수정 씨 부부의 3층 단독주택 전경. 주변 이웃도 대부분 낮은 대문과 담을 가진 단독주택이다. 아산=김선미 기자

황인준-오수정 씨 부부 정원에 있는 영국 장미 ‘제프 해밀턴’. 오수정 씨 제공

“11년 전 이 집을 짓고 마당에 다양한 장미를 심어보려 할 때, ‘한국종자나눔회’라는 다음 카페에서 어린 줄 장미 묘목 열 주를 5000원씩에 받아 심었어요. 지금은 영국 장미, 일본 장미 등이 다양하게 수입되지만 당시엔 국내에 유통되는 장미가 얼마 없던 때였거든요. 못 보던 장미를 나눔 받았기 때문에 나도 나중에 필요한 분들에게 갚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오수정 씨는 장미를 땅에 심기도 하지만 화분에 심어 키우기도 한다. 오수정 씨 제공

그는 장미를 키우며 다양한 모습을 대하다 보니 점점 더 장미의 매력에 빠져들었다고 한다. “세상에는 너무나 많은 장미가 있거든요. 색과 향기, 형태가 각기 다른 장미들이 피어나면 작은 마당에서도 큰 행복을 느낍니다. 장미는 화려해서 쉽게 시선을 끌기 때문에 장미를 계기로 오가는 이웃과 금세 이야깃거리가 생겨나요. 이웃 간 소통과 왕래가 잦아져 각 집에서 키우는 개들도 누구네 집 가자고 하면 알아듣고 향해요. 비 예보가 있으면 지인들에게 장미를 한가득 꺾어드리기도 합니다. 꽃을 받고 기뻐하는 모습을 보면 ‘로즈 가드너(rose gardener)’로서 행복해집니다.”

오수정 씨가 어렵게 구해 키우고 있는 프랑스 ‘도멘 드 샹티이’ 장미. 오수정 씨 제공

오 씨가 갓 구워낸 허브 쿠키와 여름 과일들을 내왔다. 로얄 코펜하겐 잔에 담긴 커피 향이 좋았다. 거실에도 주방에도 곳곳에 장미들이 있었다. 얼마 전 읽은 책에서 정원을 ‘정원사가 분양받은 천국의 작은 조각’이라고 하던데, 그 조각이 이루는 일상은 참으로 평화로워 보였다. “새벽 5시에 일어나 마당 정원과 옥상 정원의 꽃들을 돌본 뒤 오전 7시에 남편과 수영을 다녀와요.”

오 씨가 다과를 준비하는 주방에 꽂혀 있던 독일 장미 ‘엘름스 혼’과 수국. 아산=김선미 기자

오 씨는 자신을 ‘식물들과 알콩달콩, 틈틈이 바느질, 어쩌다 첼로’하는 사람으로 소개한다. 올해로 결혼생활 28년째. 결혼 직후 남편의 유학을 따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살았던 그는 2000년대 중반 남편의 고향인 아산에 내려와 주부로 살아왔다. 손으로 만드는 일을 좋아해 퀼트 모임을 하면서 이웃을 사귀고, 첼로도 배웠다. 꼬맹이들이었던 세 딸은 이제 성인이 됐다.

영국 데이비드 오스틴 사의 ‘벤자민 브리턴’ 장미. 영국을 대표하는 작곡가 벤자민 브리턴(1913~1976)의 이름을 딴 장미로 색감이 화려하다. 오수정 씨 제공

층고가 높고 천창(天窓)도 난 건평 30평의 3층 집은 아내가 수집해 온 인형들, 미술과 요리를 공부한 딸들의 그림 등 가족의 역사가 빼곡한 예쁜 박물관인 셈이다. 이곳에 빼놓을 수 없는 ‘보물’이 또 있다. 남편 황인준 씨가 촬영한 천체 사진들이다. 1980년대 중반 한국 아마추어 천문협회 운영위원장을 지낸 황 씨는 국내 유명 천체 사진가로, 천체 관측 장비들을 제작해 수출하는 호빔천문대 대표를 맡고 있다. 2015년에는 천체사진집 ‘별빛방랑’(사이언스북스)도 펴냈다.

황인준-오수정 씨 부부의 3층 단독주택 곳곳에는 남편 황 씨가 찍은 천체 사진들이 걸려있다. 이 사진은 칠레 아타카마 사막에서 촬영한 것이다. 아산=김선미 기자

남편 황인준 씨는 종종 옥상정원에서 망원경으로 천체를 관측한다. 오수정 씨 제공


“연애할 때 정말 신기했어요. 하늘에 별이 무수히 많은데 어떻게 다 설명하는지 말이에요(웃음). 남편이 논 한가운데 땅 460평을 사서 호빔천문대를 처음 허름하게 지었을 때, 갑자기 땅이 생기니까 마음껏 꽃을 심어보고 싶었어요. 아이들은 낮에는 개구리나 도마뱀을 잡고, 저는 3년간 매일 아침 풀 뽑아가면서 미친 듯 꽃을 심었어요. 마침 ‘타샤의 정원’이 유행하던 때였죠. 꽃을 풍성하게 내는 데 집중했는데 아산의 산바람이 만만찮더라고요. 외국 잡지에서 예쁘게 본 꽃들이 여기에서는 안 되는 것들이 있었어요. 2012년 이 집을 짓고 제가 좋아하는 꽃들, 손이 덜 가면서 정원 관리가 쉬운 것들 위주로 골라 심었어요.”

오수정 씨가 장미가 폭염에 힘들지 않도록 전지가위를 들고 잘라내는 모습. 아산=김선미 기자

가느다란 열 주를 처음 심었던 ‘알키미스트’라는 이름의 장미는 자라나면서 오 씨에게 큰 기쁨을 주었다. 첫해에 한두 송이 피던 장미가 이듬해부터는 수십 송이씩 피어났다. 이 집 정원의 시작부터 함께 해 온 장미라, 장미 애호가들 사이에서는 널리 알려졌다. 꽃의 형태와 색감이 독특해 장미가 만개하면 누구나 감탄한다고 한다. 1년에 한 번 봄에만 피지만 1년 치 꽃을 몰아 피듯 많은 꽃을 보여준다. “올해로 아홉 살이 된 우리 집 스탠다드 푸들 ‘꼬봉이’ 사진을 해마다 이 장미 옆에서 찍었어요. 나중에 꼬봉이가 떠나면 꽃필 때마다 많이 아쉬울 것 같아요.”

황인준-오수정 씨 부부의 집은 봄이면 알키미스트 향기로 가득하다. 장미 애호가들 사이에서 이 광경이 입소문이 났다. 오수정 씨 제공

꼬봉이 얘기에 코끝이 찡해진다. 하긴 꽃도 지고 나서 다시 피는 꽃은 예전의 꽃이 아니다. 그렇게 만나고 헤어지는 게 삶일 것이다. “예전에는 화려하게 꽃피는 시절을 좋아했는데 이젠 봄에 새잎이 날 때도, 늦게 핀 가을꽃에 눈송이가 소복이 앉을 때도 좋아요. 화려하거나 조용하거나 모든 순간이 아름다운 걸 이제 깨달아요. 우리 인생도 그렇겠구나 싶어요.”

여름 무더위 속에서도 깨끗한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황인준-오수정 씨 집 정원의 목백일홍. 아산=김선미 기자

장미를 잘 키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저도 처음에는 시행착오가 많았어요. 어떤 장미는 별다른 관리를 하지 않아도 잘 크는데, 어떤 장미들은 까탈스럽기도 하거든요. 섬머송(Summer song)이라는 오렌지색 장미는 정말 잘 안 컸어요. 비리비리하다가 죽기도 하고요. 그런데도 너무 예뻐서 도저히 포기할 수가 없더라고요. 그래서 여기저기 찾아다니며 정보를 수집했어요. 결국 중요한 것은 키우는 장소와 장미의 특성을 잘 파악하는 것이에요. 장미는 무엇보다도 가드너와 상호 교감에 민감하니까요. 하나하나 공들이고 애쓴 만큼 장미는 화려하게 다가옵니다. 오랜 기간 준비하고 지켜봤던 가드너에게 특별한 보상이자 선물이에요.”

듣다 보니 자녀를 키우는 일과 다르지 않은 듯했다. “장미를 키우면 일단 욕심을 버리게 돼요. 자연의 순리를 따르다 보니 아이들이 성장해가는 과정이 각기 다르고, 완성되는 데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도 알게 돼 느긋해지는 것 같아요. 스롭셔 래드(Shropshire Lad)라는 장미는 초반 3, 4년간 성장이 너무 느렸는데 마음을 비우고 몇 년을 지켜보니 이제는 꽃도 풍성하게 내줘요.”

서로 다른 색과 향, 형태를 지닌 장미들이 피어나는 황인준-오수정 씨 부부의 정원. 오수정 씨 제공

부부는 적금을 부어 지난해 호주에 가서 개기일식을 보았다. 2008년부터 지금까지 7번의 개기일식을 관측했다. 중국 신장과 상해, 일본 가고시마, 호주 케언스, 미국 아이다호, 칠레 비쿠냐, 그리고 지난해의 호주 엑스마우스 개기일식까지. 남편 황 씨는 말한다. “외계 생명체들도 개기일식 보러 지구로 여행 가자고 할 판에, 지구에 살면서 이토록 황홀한 순간을 안 보면 지구인의 직무 유기죠(웃음).”

올해 4월 호주 엑스머스에서 황인준 씨가 촬영한 개기일식 장면. 황인준 씨 제공

대기업과 벤처기업을 다닌 황 씨는 고향으로 내려와 자신의 오랜 별 보는 취미를 ‘업’으로 삼았다. 30년 가까운 결혼생활 동안 아내는 남편의 인생 굽이굽이 도전을, 남편은 아내의 정원 가꾸기를 응원해왔다. 부부의 웃는 표정이 닮은 것처럼 별 보는 일과 정원을 가꾸는 일도 닮았을까. “아, 질문이 어려워요(웃음). 끊임없이 애정을 갖고 지켜보는 것 아닐까요. 그렇게 지켜보면 따뜻한 유대감이 생겨나니까요.”

황인준-오수정 씨 부부가 올해 4월 개기일식을 관측한 서호주 칼바리 자연의창 주차장의 일출 장면. 황인준 씨 제공

남편 황 씨는 말한다. “어릴 때 소달구지가 달리는 아산 시골에 밤이 내리면 멍석을 깔고 누워 별을 봤어요. 그때 어머니가 밤하늘의 이름들을 설명해줬어요. 짚신할배, 좀생이별, 삼태성…. 가난했던 시절이지만 행복했어요.” 그는 자신이 쓴 ‘별빛방랑’ 책에 “밤하늘의 수많은 별만큼 수많은 행복이 늘 함께하길 빕니다”라고 썼다. 눈을 감고 내가 다녀온 아산의 아담한 단독주택 정원을 떠올려보았다. 수많은 장미만큼 수많은 행복이 자라는 곳 같았다.

해 질 녘 황인준-오수정 씨 부부 집 옥상정원의 풍경. 오수정 씨 제공

p.s. 부부의 세 딸은 자율적으로 진로를 찾아 나가고 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일본과 프랑스에서 요리를 배운 막내딸은 최근 아산의 재래시장에 피자집을 냈다. 점심을 먹으러 그곳에 갔더니 ‘시크릿가든’이라는 이름의 피자가 있었다. 엄마의 정원을 생각하며 지은 이름일까. 동명의 연재물을 쓰는 입장에서 괜히 반가웠다.





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