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30일 중국 랴오닝성 다롄의 뤼순감옥 박물관에 있는 ‘뤼순의 국제 전사들’ 전시실이 굳게 잠겨 있다. 이 전시실에는 안중근 의사, 신채호 선생 등이 수감돼 고초를 겪었던 뤼순감옥이 그대로 보존돼 있다. 다롄=김기용 특파원 kky@donga.com
김기용 베이징 특파원
《지난달 29일 중국 베이징에서 고속열차로 4시간 떨어져 있는 랴오닝성 다롄을 찾았다. 다롄에 있는 한 교민의 제보를 받고서다. 그는 “최근 다롄에서 항일정신 계승 활동이 위축되고 있다”고 말했다. 분명하지는 않지만 중국 당국의 개입으로 보이는 정황도 있다고 덧붙였다. 한중 관계가 안 좋아지면서 항일정신 계승마저 흔들리고 있다는 얘기다. 그 우려가 조금씩 현실이 되고 있다.》
다롄은 한국인에게는 ‘요동반도’로 더 익숙한 랴오둥(遼東)반도 끝에 있다. 인구 608만 명(2022년 기준)으로 랴오닝성 성도인 선양(인구 914만 명)에 이어 두 번째로 큰 도시다. 지리적으로 한반도와 가까워서인지 다롄에는 한국 교민도 많이 살고 있다. 최근 2000∼3000명 수준으로 많이 줄었지만 한때 4만 명에 달했던 적도 있다. 그래서 이곳에는 한국 국제학교가 있고 주중 한국대사관의 영사출장소도 있다.
대도시인 베이징 상하이 못지않게 여러 교민단체들도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2020년 SK하이닉스가 이곳에 반도체 공장까지 마련하면서 한국과는 더 가까워진 느낌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다롄과 한국은 ‘안중근’이라는 역사적 인물로 연결돼 있다는 점을 빼놓을 수 없다. 다롄에는 안중근 의사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뤼순(旅順)감옥이 있다.
폐쇄된 ‘안중근 전시실’
뤼순감옥의 현재 정식 이름은 한국식 한자 발음으로 ‘여순일아감옥구지(旅順日俄監獄舊址)’다. 러시아와 일본이 감옥으로 사용한 옛터라는 뜻이다. 중국 정부는 현재 감옥 부지 전체를 박물관으로 바꿔 운영하고 있다.2009년 당시 국가보훈처(현 국가보훈부), 광복회 등은 뤼순감옥 측과의 오랜 협의 끝에 중국 당국의 허가를 받아 한국 독립운동가들을 기리는 별도 전시관을 만들었다. 이곳에는 안 의사 흉상과 옥중 글씨 등이 전시돼 있어 ‘안중근 전시실’로 불리며 다롄을 방문하는 한국인 관람객들의 필수 코스가 됐다.
중국 당국도 이 사실을 알고 많은 배려를 해 왔다. ‘안중근 전시실’ 외에도 뤼순감옥 박물관 내 모든 전시실에 중국어와 함께 한국어가 병기돼 있을 정도다. 일제 침략을 함께 겪은 한국과 중국이 항일정신 계승만큼은 함께할 수 있다는 의지를 보인 것으로 해석된다.
하지만 한중 항일정신 계승 공동 활동의 산물로 여겨져 온 ‘안중근 전시실’은 최소 2개월 이상 폐쇄 상태가 지속되고 있다. 기자가 지난달 29, 30일 이틀간 방문한 ‘안중근 전시실’은 입구에 자물쇠가 채워진 상태였다. 뤼순감옥 박물관 내 다른 전시실은 모두 관람이 가능한데 유독 ‘안중근 전시실’만 관람이 불가능한 것이다.
뤼순감옥 박물관 관계자는 지난달 30일 안중근 전시실 폐쇄 사유와 재개관 일정 등을 묻는 동아일보의 질문에 “시설 점검 및 보수 중”이라며 “재개관 날짜는 모른다”고 답했다.
하지만 전시실이 폐쇄된 지 이미 최소 2개월 이상 지났고, 이틀 동안 폐쇄된 전시실을 지켜본 결과 아무런 보수 활동이 없었다는 점은 중국 측의 설명을 무색하게 하고 있다. 또 전시실 폐쇄 시점으로 추정되는 4월은 윤석열 대통령이 로이터통신과의 인터뷰에서 “대만해협에서의 일방적 현상 변경을 반대한다”고 언급하면서 한중 갈등이 최고조에 이른 시기라는 점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단순히 ‘내부 수리’를 위한 폐쇄가 아닐 수 있다는 얘기다.
‘항일정신 계승 활동’ 위축
중국 당국이 밝힌 대로 ‘안중근 전시실’을 실제 수리하려는 계획이라고 해도 다롄 지역 전반에서 한국인들의 항일정신 계승 활동이 위축되고 있는 점은 분명한 사실이다. 특히 지난해와 달리 올해 모든 관련 활동이 연기되고 있다. ‘안중근 정신찾기 운동본부’가 지난해 11월 중국 다롄에서 주관한 캠프에 참가한 학생들이 안중근 의사 재판을 재현하는 연극을 하고 있다. 안중근 정신찾기 운동본부 제공
한중 관계가 항일 과거사 조명 작업에 영향을 미치는 사례는 다롄에 국한되지 않는다. 지린성 옌볜조선족자치주 룽징(龍井)에 있는 윤동주 시인 생가도 7월부터 폐쇄됐다. 윤동주 생가는 인근 백두산을 찾는 한국인 관광객들의 필수 관람 코스다.
중국 측은 윤동주 생가 역시 내부 수리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4일 윤동주 시인 생가 관리자는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옌볜조선족자치주 정부의 요구로 폐쇄 중”이라고 밝혔다. 내부 수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지방정부의 요구가 있었다는 얘기다.
한중 양국이 이견 없이 공동으로 진행할 수 있는 항일정신 계승 활동에 대해서도 중국 측이 딴죽을 걸고 나오면서 한중 관계가 더 악화돼선 안 된다는 우려가 확산하고 있다.
다만 일부에서는 중국에 고도의 정치적 노림수가 있는 것 아니냐는 분석도 나온다. ‘안중근 전시실’과 ‘윤동주 생가’ 폐쇄가 윤석열 정부의 반중(反中) 움직임 탓이라는 여론을 조성해 한국 정부를 압박하려 한다는 얘기다. 중국공산당이 중요 국면 때마다 여론몰이에 능한 면모를 보여 왔던 점을 고려하면 개연성이 있는 해석이다.
―다롄에서
김기용 베이징 특파원 kk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