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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 보장 없는 휴전 없다”[정전 70년, 끝나지 않은 6·25]

입력 | 2023-08-11 12:27:00

[19회]





중국 랴오닝성 단둥의 항미원조기념관에 클라크 유엔군사령관의 자서전 ‘댜뉴브강에서 압록강까지’ 표지가 대문짝만하게 걸려 있다. “역사상 처음으로 승리하지 못한 정전협정에 서명하는 미국 사령관이 됐다”는 구절이 있다고 소개하고 있다. 단둥 = 홍진환 기자



‘전쟁과 파괴적 행동으로 공산측이 더욱 전진해 오는 서곡이 되리라고 확신해 정전 조인을 반대했다’(이승만)

‘자유세계와 공산세계의 대결이 끝나지 않는 한 한국의 평화적 재통일은 어렵지 않나하는 염려가 있다’(아이젠하워)

‘사상 처음으로 승리없는 전쟁의 휴전협정에 조인한 미군사령관이 됐다. 패배감을 느꼈다. 조인 후 형언할 수 없는 좌절감에 소리없는 눈물마저 흘렸다’(클라크)

정전협정에 서명하면서 전투가 끝난 안도와 평화에 대한 희망보다는 비감함이 서려있듯 누구도 만족하지 않았지만 협정은 맺어지고 전쟁은 일단 끝났다. 하야를 무릅 쓴 이승만 대통령의 휴전반대 분투와 저항은 ‘한미동맹조약’으로만 멈추게 할 수 있었다.


정전 협상을 벌이고 있는 유엔군측과 공산측. 협상 초기 대표로 참석한 백선엽 장군은 중공군측에 비해 북한측 대표의 표정이 굳어 있었으며 북한 이상조는 한국에 대해 ‘미 제국주의를 추종해 상가집 x보다 못하다’는 욕설이나 끄적이고 있었다고 했다.






● 스탈린 사망으로 고비 넘다    
포로 교환 기준 등을 두고 협상이 교착상태에 빠져 있는 상황에서 1953년 3월 5일 스탈린이 사망해 협상에 새로운 전기가 됐다. 3월 15일 소비에트 최고회의는 “현재 분쟁 중이거나 아직 해결되지 않은 모든 문제는 협상 원칙하에서 평화적으로 해결될 수 있다”고 밝혔다. 말렌코프 정부는 6·25 전쟁 휴전협상의 최대 걸림돌이 되어 온 포로의 무조건 송환 원칙을 고집하지 않았다.

스탈린은 포로 문제 등을 빌미로 미군을 한반도에 묶어 유럽에서 외교적 이득을 보려했으나 방향을 선회한 것이다. 말렌코프 정부의 정전 선회는 미국이 취할 조치 중 ‘최악의 상황’을 염두에 두었다는 분석도 있다. 핵무기 사용 가능성까지 포함한 전쟁에서 승산이 없는 소모적인 상황을 빨리 끝내야 한다는 현실적인 판단이 작용했다는 것이다.(선즈화, 581쪽) 공산주의자들은 아이젠하워가 원자탄두를 오키나와에 배치하고 이의 사용을 검토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되었고, 아이젠하워가 국내외로부터 전쟁을 확대하라는 압력을 받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김계동, 373쪽) 일본의 대표적인 한국전쟁 전문가인 와다 하루키는 통설과는 다르게 ‘스탈린은 전쟁을 계속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아 그의 죽음으로 정전협상에 변화가 일어났다고 생각하는 통설은 잘못된 것이다”고 주장했다.(하루키, 537쪽)

중공군 병사들이 정전협정 체결 소식을 들은 뒤 환호하고 있다. 중국 랴오닝성 단둥의 항미원조기념관 전시. 단둥 = 홍진환 기자






● 전황 따라 오락가락한 마오쩌둥과 김일성  
마오쩌둥(毛澤東)은 ‘항미원조’를 명분으로 참전한 뒤 38선을 넘고 내려와 서울을 점령할 때는 “미군은 한반도와 대만 해협에서 철수하라”고 자신감을 나타냈다. 하지만 두 차례의 춘계 대공세(4월 22~30일, 5월 16∼20일)마저 실패로 돌아간 뒤 “싸우면서 담판하고, 담판을 통해 문제를 해결한다”는 방침을 정하고 장기전을 준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휴전에 소극적이었던 스탈린이 사망하자 마오는 소모전에서 벗어나고자 했다는 분석이 있다. 3월 11일 스탈린의 장례식 참석차 모스크바에 온 저우언라이(周恩來)는 소련 지도부에 정전 협정을 서둘러 달라는 요청을 했고, 소련측도 받아들였다는 것이다.(판초프, 551쪽)

김일성은 1951년 5월 마오쩌둥이 6차 대공세 이후 정전으로 선회한 후에도 신속한 승리를 주장하며 6월말에서 7월 중순까지 중조 연합군이 총공격을 개시할 것을 요구했다. 마오가 전쟁 접촉선을 휴전선으로 하는 것을 받아들이려고 하자 “차라리 중국인 도움없이 전쟁을 계속하고 싶다”고 했다.(선즈화, 563쪽)

그러던 김일성은 미군기에 의해 북한 주요 도시가 잿더미로 변해가는 상황에서 1952년 이후 마오에게 휴전을 호소했으나 이번에는 마오가 듣지 않았다. 더 많은 병력을 투입해 제압하겠다고 했다. 중공이 버틸수록 북한은 더욱 황폐화됐다.(정일화, 552쪽)


아이젠하워가 공약대로 대통령 당선자 신분으로 한국을 방문해 경무대에서 이승만 대통령과 만났다. 왼쪽부터 밴 플리트 미 8군 사령관, 마크 클라크 유엔군사령관, 이승만 대통령 ,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 당선자, 그의 아들 존 아이젠하워 소령.






● 아이젠하워의 강온 양면 휴전 전략  
1952년 11월 대통령 선거에서 ‘명예로운 휴전’을 공약으로 제시한 아이젠하워가 대통령으로 당선돼 정권이 교체된 것도 협상 진전의 요인으로 꼽힌다. 아이젠하워는 협상에 적극적이면서도 휴전을 위해 세 가지 조치를 취했다. 한국군 증강, 미 제7함대의 대만중립화 해제로 중공에 대한 심리적 압력 가중, 그리고 덜레스 국무장관을 시켜 한국의 교착상태가 지속된다면 핵사용도 불사한다는 위협을 중소 관리 귀에 들어가도록 했다. 힘을 바탕으로 한 강온양면 전술을 구사한 것이다.(이용호, 116쪽)

클라크 사령관은 공산측이 아이젠하워 당선 이후 휴전 협상에 적극 나선데는 압도적 지지로 당선된 아이젠하워가 미국민의 지지를 등에 업고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한국 전쟁에 전력투구할 지도 모른다는 공포감도 갖고 있었다고 보았다.(클라크, 19쪽)


판문점에서 유엔군과 공산측 대표가 협정에 서명하고 있다. 서명 전후 아무런 인사말이나 악수도 없이 각자 서명만 하고 나갔다.






● ‘12분만에 끝난 정전 협정 서명’  
1953년 7월 27일 10시 유엔군 측 수석대표 해리슨과 공산군 측 수석대표 남일은 각자 다른 테이블에 앉아 정전협정에 각각 서명했다. 휴전회담이 시작된 지 159회 만이었다. 한글 영어 중국어로 된 정전협정문 각 6부, 모두 18부에 양측은 각각 12분씩 서명을 마친 후 단 한마디의 인사말 없이 회담장을 떠났다.

마크 클라크 유엔군사령관은 오후 1시 문산 극장, 김일성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과 펑더화이(彭德懷) 중공군사령관은 평양과 개성에서 각각 서명했다. 한국 대표는 협정 서명에는 참여하지 않았으나 협정에는 반대하지 않았다. 이날 밤 10시 모든 전선의 포성이 멎었고 1129일간의 전쟁은 중지되었다.

7월 31일 김일성은 평양에서 중공군 지도부도 초청한 축하 만찬을 열고 훈장도 수여했다. 8월 3일 회창 중공군 사령부에서도 전승축하연이 열렸다. 훙쉐즈 부사령관은 참전명분인 ‘미국에 대항해 조선을 지원하고 가정과 국가를 지켰기 때문’이라고 했다.(훙쉐즈, 439쪽) 침략으로 3년간 한반도가 황폐화되고 한민족에게 큰 상처를 남겼으면서도 미국 등 유엔군이 확전을 자제해 정권을 유지하고 응징당하지 않은 것을 승리로 여기는 그들만의 셈법이었다.



<표> 휴전협정 시기 양측 병력

유엔군
공산군
국군 60만명
북한군 47만명
미군 등 34만명
중공군 135만명
94만명
182만명
출처 : 김철수, 274쪽





북한은 정전 협정에 서명한 장소를 ‘평화 박물관’으로 바꿔 보존하고 있다. 협정 서명 당시에는 지웠던 ‘피카소의 비둘기’가 지붕의 삼각형 부분에 새겨져 있다. 출처 영문위키.





피카소의 비둘기. 1949년 작품. 출처 영문위키







● 판문점에 웬 피카소의 ‘비둘기’? 
회담 당시 판문점은 초가 서너채만 있는 농촌이었다. 3천평의 터를 닦고 천막을 지어 회의장으로 사용했다. 공산측이 천막을 제공하고 유엔은 전기와 난방시설 공사를 맡았다. 지금의 판문점보다 약 1km 가량 떨어진 곳이다.

협정 조인을 위해 공산측은 회담 장소 북쪽에 강당같은 목조단층 건물을 지었다. 기와지붕 처마밑 삼각형 부분에 피카소의 ‘비둘기’(1949년 작)를 본뜬 두 마리의 비둘기 그림을 그려 넣었다가 유엔군측 항의로 지웠다. 공산주의자를 자처한 피카소의 비둘기로 평화를 애호하는 것처럼 선전하려는 것이었다.

북한은 협정을 조인했던 건물을 ‘평화박물관’으로 바꿔 보존하고 있는데 ‘비둘기’가 있다. 더우기 1976년 도끼 만행 사건 때 사용된 무기를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고 한다.(영문 위키)



개성에서 옮겨와 정전 협상 회담을 이어간 판문점 주위가 모두 논밭이다. 전쟁기념관 전시.






● 이승만, ‘미군 철수하면 공산측 다시 쳐들어온다’
이승만 대통령은 한반도가 애치슨 라인 선언으로 미국의 방어선 밖으로 밀려나고 해방후 주둔했던 미 24군단 3개 사단이 전차 한 대 안 남기고 떠나 북한의 남침을 불러왔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1951년 6월 휴전 협상 분위기가 높아지자 북한군의 무장해제와 중국군의 철수 등 조건을 제시하며 휴전 반대 움직임을 본격화했다.

이승만이 휴전을 반대한 것은 휴전 이후 외국 군대의 철수 때문이었다. 중국과 소련은 철수해도 강 하나만 건너면 다시 올 수 있지만 미국은 태평양을 건너가면 전쟁이 발생했을때 다시 군대를 추슬러 올 지 의문이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북한의 불법 남침으로 큰 피해를 입었는데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전쟁을 중단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승만은 1953년 4월 9일 아이젠하워에 보낸 서신에서 ‘중국군이 한반도에 주둔한 상태로 휴전되면 한국 정부는 압록강까지 진격하지 않는 동맹국 군대의 철수를 요구할 것이라며 미군도 철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며칠 후에는 “중국군의 주둔을 허용하는 협정을 맺으면 한국군을 유엔지휘권에서 철수시켜 단독으로 전쟁을 계속하겠다”고 선언했다.

클라크가 한국군의 작전권 이양 약속을 어기고 단독 행동을 하는 것은 자살행위라고 설득했으나 ‘자살을 의미한다고 해도 국군은 싸움을 계속하고 자신이 직접 지휘하겠다’고 한 발도 물러서지 않았다.(클라크, 460쪽)


판문점의 황량한 들판에 정전 협상을 위해 설치된 천막과 양측의 경비병들.

현재의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 정전 협정 당시의 협상 장소는 현 위치에서 1km 가량 떨어진 곳이다. 뒤로 보이는 건물은 북한의 판문각.







● 이승만 하야 작전 ‘에버레디 계획’
스탈린 사후 휴전회담은 1953년 6월 8일 ‘포로의 자발적 송환에 입각한 중립국 송환위원단 관련 협정’ 체결까지 순조롭게 진행됐다. 이에 함께 이승만의 휴전 반대도 더욱 거세졌다. 국군이 독자 행동을 하겠다는 것에서 나아가 포로수용소의 공산포로 석방 엄포까지 점차 수위가 높아졌다. 이승만의 강경 자세를 꺽고 설득하기 어렵다고 본 미국은 유엔사령부에 의해 주도되는 ‘에버레디 계획(Plan EverReady)’을 세웠다.

이는 이승만의 반대 속에 정전협정이 타결됐을 때 ① 한국군이 유엔군의 지시를 듣지 않거나 ② 독자 행동을 하거나 ③ 유엔군에 공공연하게 적대적이 되는 경우에 대비한 유엔군의 행동 계획이다. 유엔의 이름으로 계엄을 선포하고, 불복종하는 한국의 군부 및 민간 지도자를 감금한 뒤 유엔군 군정을 실시한다는 것이 골자다. 체포 대상 민간 지도자에는 이승만 대통령도 포함된다. 유엔사령부 이름으로 계엄을 선포하고 군부 또는 민간 지도자 중 명령 불복하는 자들을 감금하며, 유엔사에 의한 군사정부를 수립하는 것이었다.(남시욱, 66쪽)

이는 1952년 7월 부산정치파동 당시 클라크 사령관이 입안했다가 여야 타협으로 발췌개헌안이 통과돼 실행하지 못한 ‘이승만 정부 전복 계획’을 보완한 것이다.

미 국무부는 “우리 자신을 침략자의 위치로 전락시키는 것”이라며 대신 방위조약을 체결해 주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을 냈다. 결국 아이젠하워는 5월 30일 미국·필리핀 방위조약이나 호주 뉴질랜드와 맺은 엔저스(ANZUS) 조약과 유사한 조약을 맺는 것으로 이승만 달래기에 나서면서 이승만 하야 계획에서는 물러섰다.

부산 서구 임시수도기념로의 ‘임시수도 대통령관저’. 이승만 대통령은 전쟁 발발 2개월 가량 후인 8월 18일부터 정전 협정으로 서울로 돌아가기 전까지 이곳에서 집무를 보았다. 이곳은 1920년대 일제하에서 경남지사의 관저로 지어진 건물이다. 부산 = 구자룡 기자







● 이승만의 초강수, 반공포로 석방 
휴전협정 체결이 진전되면서 한국내 휴전 반대 분위기도 높아졌다. 대규모 시위가 벌어지고 국회는 129대 0으로 반대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급기야 이승만은 6월 18일 반공포로를 예고없이 석방했다. 부산 거제 등 전국 수용소에서 그야말로 한 밤중에 대탈주가 벌어졌다. 3만 5천여명의 반공포로 중 2만7388명이 4일에 걸쳐 석방됐다. 연초부터 원용덕 헌병총사령관을 시켜 은밀히 포로석방계획을 준비하다 결행한 것이다. 반공포로 석방 과정에서 포로 56명이 사망하고 81명이 부상했다. 아이젠하워는 유엔사령부의 권위에 도전하는 공개된 무력행사라고 비판하면서 군대를 한국에서 철수할 상황이 올 지도 모른다고 경고했다.

클라크는 휴전 협정 체결이 막바지에 이른 상황에서 나온 반공포로 석방에 당혹해 하면서도 한국민들의 높은 지지를 받았다고 자세히 기록했다. 국민들이 탈출한 포로들을 모두 숨겨주고 음식과 술 담배를 제공하는가 하면 한국 경찰들은 탈출한 포로를 검거하려는 미국 병사들의 접근을 막기 위해 경계를 했다는 것이다.(클라크, 467쪽)

반공포로 석방은 공산측이 유엔군 포로를 석방하지 않고 맞대응하면 협상을 파탄낼 수도 있는 빌미가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우려와는 달리 협상은 더 이상 궤도에서 이탈하지는 않았다. 반공포로 석방을 유엔군사령부와 한국이 공모했다고 공격하고 유엔군이 한국군을 통제할 수 있는지 문제 삼았지만 협상 열차를 멈추게는 하지 않았다.

부산 임시수도 대통령 관저의 집무실의 이승만 대통령. 문뜩 방문을 지나다 보면 실제로 앉아있는 느낌을 줄 정도로 생생하고 자연스런 모습이다. 부산 = 구자룡 기자


정전협정에 서명하는 클라크 유엔군 사령관(왼쪽에서 두 번째). 출처 영문위키.





● 클라크의 이승만 존경
거제포로수용소에서 공산 포로들이 도드 포로수용소장을 억류한 날인 1952년 5월 7일 유엔군사령관으로 도쿄에 부임한 클라크 사령관의 가장 큰 임무는 휴전 협상의 마무리였다. 협상은 공산측의 갖은 잔꾀와 선전술, 터무니없는 지연작전 등으로 진행이 더뎠지만 넘어야 할 또 하나의 큰 관문은 ‘이승만과 한국 국민의 반대’였다.

미군 사령관으로서 워싱턴의 지시와 훈령을 받아 협상을 진행시켜야 할 임무를 띤 클라크였지만 이승만과 한국민의 휴전 반대 심정과 논리를 누구보다 이해하고 마음으로는 동조했다. 그의 자서전에는 이승만을 존경하는 마음이 곳곳에 묻어있다.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불신, 압록강 북쪽에 중공군의 병참기지를 손보지 않고는 승리할 수 없다는 맥아더의 확전론을 확고히 지지하는 것도 이승만과 결이 같았다.

클라크는 ‘이승만은 한국의 조지 워싱턴’이라며 아시아 모든 비공산 국가들의 뿌리깊은 안전 보장에 대한 열망을 상징적으로 대변하는 지도자라고 했다. 이승만은 한국 전쟁을 통해 장제스(蔣介石) 총통과 인도 네루 수상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위대한 지도자로 부상한 ‘아시아의 별’이라고도 했다.(클라크, 272쪽) 클라크는 “역사는 앞으로 이승만이 한국 전쟁에서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한 것이 휴전을 앞세운 미국의 주장보다 더 정당했다는 것을 보여줄 것이다”라고 할 정도였다.(클라크, 19쪽)

월터 로버트슨 미국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왼쪽)가 정전 협정 서명 한 달여를 앞둔 6월 25일 서울에 도착해 이승만 대통령과 악수하고 있다.




● 10대 강국의 초석 ‘한미동맹조약’   
미국은 이승만이 가장 우려하는 휴전 후의 안보우려를 해소하기 위한 ‘동맹 협상’, 이른바 ‘소 휴전회담’을 통해 이승만의 반대가 장애가 되지 않고 휴전회담이 무사히 마무리되도록 했다. 휴전 협정 서명 한달여 전인 6월 25일 서울에 도착한 로버트슨 국무부 차관보는 7월 12일 출국하기 전까지 한국에 머물며 12차례에 걸쳐 주로 이승만 대통령과의 담판을 통해 협상을 벌였다.

이승만이 휴전에 동의하면서 얻어낸 합의사항은 △상호방위조약 체결 △2억 달러 제공 및 장기 경제원조 △한국군 40개 사단 증강 등이었다.

클라크는 공산측의 침략이 있을 경우 미국이 다시 오는 내용의 한미상호방위조약은 ‘미군 배치 및 전략에 관한 계획(JOEWP)’에 맞지 않는다며 반대했었다. 트루먼 후임으로 당선된 아이젠하워 대통령도 한미간 상호방위조약은 유엔이 비효율적인 기구라는 인상을 줄 수 있다며 조약 체결에 부정적이었다. 한미간에 조약이 체결되면 일부 참전국이 군사 개입을 축소하려 할 것이라는 등의 이유를 들기도 했다. 베트남은 휴전협정을 맺고 2년 뒤 공산화됐다. 이승만은 ‘협정’이 종이조각에 그치지 않는 안보 방패막이로 만들면서 비로소 휴전 반대를 접었다.

덜레스 국무장관은 휴전협정 체결 후인 8월 방한해 “조약은 한국이 공격을 받으면 홀로 있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기록할 것이며 적에게 미국이 할 일을 할 것이라는 명백한 통고를 하는 것”이라고 10월 1일 체결될 조약의 취지를 설명했다. 이는 조약에서 “외부의 무력 공격에 대한 공동의 방위 결의를 공개적이고 정식으로 선언해 어떤 잠재적 침략자도 당사국 중 어느 한 국가가 고립하여 있다는 환각을 갖지 못하게 한다”고 조항으로 명문화됐다. 조약은 이듬해 11월 비준서 교환으로 발효됐다. 6·25 전쟁 이후 한강의 기적과 세계 10대 경제 강국으로 발돋움 한데는 한미동맹이라는 안보 울타리가 큰 역할을 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조이 제독이 지적한 공산주의자들의 협상 전술과 협상 요령

터너 조이 제독. 출처 영문위키




● 공산주의자들의 협상 전술
➀회담에 유리한 장소 선정과 분위기 조성
➁장기 담판에 대비 계급보다 능력위주의 회담 대표단 구성
➂원하는 결론으로 가도록 속임수가 있는 의제 설정
➃협상에 유리한 사건을 중간에 모의하고 촉발시킴
➄지연전술로 상대의 조급증 유도, 서방의 인도주의 악용
➅약속 후 검증을 거부하는 방법 모색
➆협정 실행 중 ‘거부권’ 확보해 필요시 이행 회피
➇‘가짜 쟁점’ 끼워 넣어 다른 목적 확보용으로 거래
➈부력(浮力)있는 진실은 부인보다 왜곡 선호
➉상대가 양보하면 약점으로 알고 더욱 강한 요구
⑪불리한 합의는 자의적 해석으로 부인 회피
⑫같은 요구 되풀이해 피로하게 함




● 공산주의자와의 협상 요령  

①정전을 요청해도 압력을 낮추지 마라
②회담 시한을 설정해 지연전술에 끌려가지 말아야 한다
③회담 장소를 결정하게 하면 오만해진다
④회담 제안에 서둘러 응하지 마라
⑤최고의 협상팀을 구성하라
⑥일방적 양보 아닌 댓가를 받아내라
⑦서두르지 마라
⑧의제에 함정이 있는지 살펴라
⑨말을 많이하면 표적만 제공한다
⑩목적을 분명하고 구체적으로 정해놓고 회담해야 한다
⑪전쟁 피하려면 전쟁 위험부담을 감수해야 한다
⑫협상할 때는 힘을 배경으로 하지말고 사용해야 한다


출처 : ‘공산주의자는 어떻게 협상하는가’






<참고 문헌>김철수 지음, 『그 때는 전쟁, 지금은 휴전 6·25』, 플래닛 미디어, 2017.
김계동 지음, 『한국전쟁 불가피한 선택이었나』, 명인문화사, 2014.
남시욱 지음, 『한미동맹의 탄생 비화』, 청미디어, 2020.
마크 W. 클라크 지음, 김형섭 옮김,『다뉴브강에서 압록강까지』,국제문화출판공사, 1981.
선즈화(沈志華) 지음, 김동길 옮김,『조선 전쟁의 재탐구』, 도서출판 선인, 2014.
알렉산더 판초프 지음, 심규호 옮김,『마오쩌둥 평전』, 민음사, 2017.
와다 하루키 지음, 남상구 조윤수 옮김, 『한국전쟁 전사』, 청아출판사, 2023.
정일화 지음, 『휴전회담과 이승만』, 선한약속, 2014.
훙쉐즈(洪學智) 지음, 홍인표 옮김, 『중국이 본 한국전쟁』, 한국학술정보, 2008.
『정경문화』 이용호, 1983년 7월호





구자룡 화정평화재단 21세기평화연구소장 bonh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