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이승만은 왜 ‘반공 투사’가 되었는가[김상운의 빽투더퓨처]

입력 | 2023-08-14 10:00:00

[4] 이승만의 반공주의와 독립외교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을 둘러싼 재평가 논란이 뜨겁습니다. 9일에는 백범 김구와 이승만의 관계에 대한 윤석열 대통령의 발언이 눈길을 끌었죠. 이날 독립유공자 오찬에서 김미 김구재단 이사장(백범 손녀)이 “이승만 전 대통령과 김구 선생이 힘을 합쳤었는데 후세 일부가 이간질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하자, 윤 대통령이 “백범은 공산주의에 가장 강하게 반대하신 분이다. 어떻게 이 전 대통령의 적이 될 수가 있었겠느냐”고 답했다는 겁니다.

지난달에는 경북 칠곡군 다부동전적기념관에서 열린 이승만 동상 제막식을 놓고 논란이 일었습니다. 민족문제연구소 등 일부 단체들이 “4.19 혁명으로 쫓겨난 독재자를 기리는 건 역사 부정”이라고 반발한 거죠.

이명박 정부 당시 건국절 논란과도 이어지는 이승만 재평가는 한국 현대사의 가장 뜨거운 감자 중 하나입니다. 1960년대 그의 장기 독재와 하야는 교과서에도 자세히 수록된 만큼 상대적으로 덜 조명된 그의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과 이후 6.25 전쟁 시기까지의 행적을 역사학계의 연구성과를 바탕으로 들여다보겠습니다.


유라시아 공산화와 이승만의 반공주의

이승만과 김구가 1946년 미군정 자문을 위한 회의를 마치고 악수하고 있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

“비록 공산주의자들이 앞으로 3년 동안 인민군의 확장을 중지하고, 그동안 남쪽에서 모든 노력을 기울이더라도 공산군의 현재 수준에 대응할 만한 병력을 (남한이) 건설하기란 불가능합니다. 소련인들은 비난을 받지 않고 아주 손쉽게 그 병력을 남한으로 투입시키고 한순간에 여기에서 정부가 수립되고 인민공화국이 선포될 것입니다.”(백범-류위완(劉馭萬) 대화록)

1948년 7월 11일 김구가 자택을 찾아온 류위완 유엔한국위원회 중국 대표공사에게 건넨 대화입니다. 여기에는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 유라시아 대륙에서 급속하게 진행된 공산화의 파고가 한반도에도 들이닥칠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본 백범의 시각이 담겨있습니다. 역사학계 일각에서는 그해 백범이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며 김일성을 만나러 38선을 넘은 것도 이 같은 정세 판단에 기인한 것이라는 해석을 내놓고 있죠. 이런 백범의 현실 판단은 결코 과장이 아니었습니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종전을 앞두고 영미 연합국과 미묘한 균열을 일으키기 시작한 소련은 동유럽 적화(赤化)를 목표로 헝가리, 불가리아, 폴란드 등에서 ‘인민전선 전술’을 동시다발로 구사합니다(이하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북한체제의 수립과정> (1991) 참조)

소련은 인민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민족주의자 등 좌우를 망라한 연립정권을 세운 뒤 테러 등을 통해 반공 세력을 제거 혹은 흡수하는 과정을 거쳤죠. 공산당 특유의 기만전술로 이른바 ‘사이비 연립단계’를 거쳐 공산주의 독재정권을 잇달아 수립한 겁니다.

이 같은 소련의 적화 방식은 북한에도 적용됩니다. 소련 군정이 초창기 조만식 선생 등 민족주의 세력을 끌어들이려고 한 시도(소련군은 건준 대신 세운 임시정치위원회 위원장으로 조만식을 추대)가 대표적입니다.

이에 대해 이미 해방 전부터 확고한 반공 노선을 견지한 이승만은 김일성과의 타협을 일절 거부하고 남한 단독정부 수립으로 나아갑니다. 그는 미국 하와이에서 독립운동을 벌일 당시인 1923년 <태평양잡지>에 기고한 ‘공산당의 당부당(當不當)’에서 “공산당이 폭력적인 방법으로 실현하고자 하는 사유재산 부정, 자본가 부정, 지식계급 부정, 종교 부정, 국가 부정은 부당한 것”이라고 못 박습니다.

해방 직후 소련군이 미군보다 먼저 한반도에 진주한 가운데 다수의 독립운동가들을 포함한 많은 지식인들이 사회주의를 옹호하는 상황에서 이승만은 꿋꿋이 반공을 고수하죠. 그의 이런 확고한 반공 원칙은 어디에서 비롯된 걸까요.


‘반공 투사’ 이승만의 탄생

미국인 선교사 아펜젤러가 1885년 설립한 서울 중구 배재학당. 이승만은 이곳에서 ‘미국’, ‘기독교’와 처음 조우한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이승만의 인생을 관통하는 키워드를 딱 두 가지만 고른다면 아마도 ‘미국’과 ‘기독교’가 아닐까 싶습니다. 양녕대군 16대손으로 유학(儒學)을 신봉하는 양반가 자제였던 그가 기독교로 개종하고 미국으로 이주하면서 인생의 항로가 바뀌기 때문이죠. 사실 반공주의 원칙은 이 두 요소에서 비롯됐다고 봐도 무방할 겁니다.

‘미국’, ‘기독교’와의 첫 조우는 1895년 그의 나이 스물에 입학한 배재학당에서 이루어졌습니다(이하 유영익, <이승만의 생애와 건국 비전> (2019, 청미디어) 참고) 연이은 과거 낙방으로 잠시 방향을 잃은 그에게 1894년 청일전쟁은 커다란 충격을 안깁니다. 갑오경장으로 과거제가 폐지된 데다 일본이 대국 청나라를 꺾는 모습을 보고 유학 공부를 중단한 뒤 서양 신학문 학습에 나서죠.

미국 감리교 선교사 헨리 아펜젤러가 1885년 한양에 설립한 배재학당은 각국 외교관, 무역회사 자제들이 공부하는 일종의 미국식 국제학교였습니다. 이곳에서 이승만은 영어학습에 천재적인 능력을 발휘해 입학 6개월 만에 영어반 보조교사로 발탁됩니다.

특히 당시 한국인 최초로 미국에서 의사 면허증을 따고 배재학당에서 특강을 맡았던 서재필과 운명적인 만남을 갖죠. 이승만은 배재학당의 개신교 선교사들, 서재필 등과 교유하면서 미국식 민주주의에 눈을 뜨게 됩니다. 평생에 걸친 미국과의 깊은 인연이 여기에서 시작되죠.

1903년 대한제국 한성감옥에 수감된 죄수복 차림의 이승만(가장 왼쪽에 서있는 사람)과 이상재(앞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 당시 이승만은 28세였다. 이승만건국대통령기념사업회

배재학당 졸업 후 1899~1904년까지 5년 7개월 동안 대한제국 한성감옥에 수감된 경험도 이승만 인생에 큰 전환점이 됩니다. 당시 중추원 의관이던 그는 고종황제를 퇴위시키고 이강을 새로운 군주로 옹립하려는 급진 개화파 박영효의 정치개혁에 가담했다가 종신형을 선고 받습니다.

목에 10kg에 달하는 무거운 칼을 쓰고 사형의 위기를 맞은 한계 상황에서 이승만은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입니다. 그는 동료 죄수들과 성경 공부를 하면서 40여 명을 기독교로 개종시킨 데 이어 옥중학교를 세우고 죄수와 간수들을 대상으로 한글, 한문, 영어, 수학, 국사, 지리 등을 가르치죠. 평생 정치인이자 기독교 교육가로 활동한 그의 이력이 이 감옥에서 처음 시작된 겁니다.

미국인 선교사들의 도움을 받아 옥중 도서실을 만들어 영어, 한문으로 쓰인 많은 책들을 탐독하고 400쪽에 이르는 책(<독립정신>)을 저술하기도 합니다. 그는 훗날 영문 자서전에 “나는 감옥살이에서 얻은 축복에 대해 영원히 감사한다”고 썼습니다.

당시 극동지역으로 팽창하던 러시아에 대한 지정학적 위기감도 그를 반공투사로 만든 요인 중 하나입니다(이하 김명섭 등 <20세기초 동북아 반일(反日) 민족지도자의 반공(反共): 이승만과 장개석의 사례를 중심으로> 한국정치외교사논총 제34권 2호(2013) 참고)

그는 <독립정신>에서 “1859년 러시아-터키 전쟁에 서양 열강들이 간섭해 서쪽으로 길목이 막히자 러시아가 동쪽으로 눈을 돌려 우리의 위급함이 조석에 달렸다. 속히 러시아의 무도함을 꺾어 동양으로 뻗어 나오는 세력을 막아야 동양 각국도 안전함을 얻을 것”이라고 썼습니다. 당시 러시아의 팽창주의에 대한 위기감은 조선뿐 아니라 청, 일본 지식인들도 공유하고 있었습니다. 러시아 제국을 잇는 소련 공산당의 팽창주의도 이승만의 시각에선 ‘제국주의 침탈’로 해석됐고, 이는 2차 대전 이후 동유럽 각국의 역사가 증명하는 바입니다.


일제강점기 이승만의 ‘독립 외교’

1921년 워싱턴회의 당시 독립 외교를 이끈 이승만(왼쪽)과 서재필. 이승만건국대통령기념사업회

이승만은 무장항쟁 이상으로 외교전이 독립 쟁취에 중요하다고 봤습니다. 태평양전쟁 직전까지 세계 3위의 해군력을 보유한 강대국 일본에 소규모 무장항쟁으로 맞서는 건 한계가 있다고 보고, 한국 독립의 필요성을 각국에 설득하기로 한 거죠.

이는 일찍이 1920년대부터 일본이 반드시 미국과 전쟁을 벌일 거라고 내다본 그의 전망에 기반한 것이었습니다. 미국 프린스턴대에서 국제정치학 박사학위를 딴 그의 식견은 약 20년 뒤 역사적 사실로 나타납니다.

그는 특히 대미 외교전에 총력을 기울입니다. 미국이 여론에 상당한 영향을 받는 민주주의 국가라는 점에서 언론, 시민사회를 통해 한국 독립의 필요성을 꾸준히 설득하면 미국 정부의 정책도 바뀔 수 있다고 본 거죠(이하 김명섭 등 <워싱턴회의 시기 이승만의 외교활동과 신문 스크랩, 1921-1922> (한국정치학회보 51집 2호, 2017) 참고)

이 과정에서 배재학당 때부터 구축된 기독교 네트워크는 그의 민간, 공공외교에서 큰 자산이 됩니다. 청교도 정신으로 건국된 기독교 국가답게 미국 정치권은 기독교계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이죠.

그렇다면 한국독립을 국제적으로 처음 보장한 1943년 카이로선언이 나오기까지 일제강점기 이승만의 독립 외교는 어떻게 진행되었을까요. 1920, 30년대 이승만의 외교전은 1921~22년 워싱턴회의와 1933년 만주사변에 대한 국제연맹 특별회의를 핵심 축으로 전개됩니다. 그럼 시계를 당시로 돌려보겠습니다.

워싱턴회의는 제1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아시아 태평양지역의 국제질서를 규정하는 중요한 국제회의였습니다. 일본의 막강한 해군력을 억제하고 동아시아에서 힘의 균형을 추구하고자 한 미국의 의도가 반영된 회의였던 만큼, 이승만을 비롯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이를 독립 외교의 기회로 활용하고자 했습니다.

이에 따라 이승만은 먼저 1921년 3월~1922년 1월까지 약 1년간 267개 미국 신문에 게재된 1009개의 한국 관련 기사들을 수집합니다. 미국 정부의 외교 방침을 명확히 이해하고 현지 언론을 외교전에 활용하기 위한 포석이었습니다. 또 한국 독립문제를 미 의회에서 다룬 바 있는 토마스 찰스 전 상원의원 같은 정계 인사를 특별고문으로 영입합니다.

그러나 여러 노력에도 불구하고 당시에는 목표했던 성과를 거두지 못합니다. 미 정부가 1차대전 승전국이던 일본을 의식한 탓에 이승만을 비롯한 한국 대표단이 회의에 참석할 수 없었고, 한국 문제가 공식 의제로 다뤄지지도 않은 겁니다.

하지만 성과가 아주 없지는 않았습니다. ‘한일병합이 한국의 자발적 의지에 따라 이루어졌고, 일본의 식민 지배는 한국에 혜택을 주었다’는 일본 주장에 맞서 “한일병합은 강제로 이뤄졌고, 한국인들은 일본의 압제에 시달리고 있다”는 임정의 입장이 미국 언론에 보도되기 시작했습니다. TV가 없던 시절 신문의 대중 영향력이 매우 컸기에 독립 외교에서 의미 있는 첫발을 내디딘 것으로 평가됩니다.

1933년 5월 2일 스위스 제네바의 국제연맹 본부 앞에 선 이승만. 당시 그는 일본의 만주 침략에 따른 한인들의 피해를 각국에 알리는 데 힘썼다. 이승만건국대통령기념사업회

1931년 일본의 만주 침략을 계기로 열린 1933년 국제연맹 특별회의에서 이승만의 외교전은 워싱턴회의 때보다 성공적이었습니다. 이때는 일본의 아시아 침략이 본격화되면서 미국과의 대립 구도가 확연해지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미일 갈등이 심화되면서 일본 대륙 침략의 교두보인 한반도의 전략적 가치가 재평가될 수 있었죠.

이승만은 이 같은 미일 간 균열을 독립 외교에 활용하려고 노력했습니다(이하 김정민 등 <만주사변 발발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제연맹 외교: 이승만의 외교활동을 중심으로> (한국정치학회보, 2019) 참고) 그의 이런 의도는 국제연맹 회의가 열린 제네바로 출국하기 직전에 가진 언론 인터뷰에서 잘 드러납니다.

“극동 문제는 한국인의 권리와 요구를 다루지 않고는 결정적 해답을 찾을 수 없다. 한국은 일본이 대륙으로 가는 교두보(stepping stone)이므로 일본은 극동에서의 전략적 거점을 차지한 것이다. 한국 문제는 현재 극동이 당면한 문제에 대한 평화적 해결을 결정할 때 반드시 고려되어야 한다. 현재 한국은 일본의 완전한 통치하에 있으며 만주 문제의 현안 범위에 속해 있지는 않다. 그러나 일본의 아시아 대륙 침략 문제는 열강들의 보장 하에 완충국 한국이 정상적인 위치로 회귀 되지 않는 한 결코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1933년 2월 ‘The Korean Student Bulletin’의 이승만 인터뷰)

당시 이승만에 대한 임정의 태도가 바뀐 것도 주목할 만합니다. 앞서 임정은 워싱턴회의 외교가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그에 대한 불신임안을 가결한 뒤 1925년 3월 11일 그를 대통령직에서 탄핵합니다.

그랬던 임정이 국제연맹 회의 직전, 이승만을 특명전권 수석대표로 임명하고 그를 지원하게 됩니다. 미일갈등 구도 등 당시의 급변하는 국제정세를 감안해 그를 재신임한 겁니다. 여기에는 만주사변 이듬해인 1932년 4월 윤봉길의 상하이 의거를 계기로 한국 문제가 장개석의국민당 정부와 국제사회의 주목을 받게 된 것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승만은 중국 국민당 정부(중화민국)와 접촉해 한국 독립에 대한 협조를 약속받습니다. 국제연맹 회의 당사국으로 참여한 중화민국을 통해 한국의 독립 의지를 각국에 알리겠다는 의도였죠.

흥미로운 건 10여년 전 워싱턴회의 때만 해도 이승만을 푸대접한 미국 정부의 태도가 이때는 180도 바뀐 사실입니다. 미국 체류 당시 무국적 신분이던 그에게 외교 여권을 발급해준 데 이어 제네바 주재 미국 영사(길버트 프렌티스)가 각국 대표들을 소개해주고 국제연맹 사무국의 정보도 알려줍니다.

이뿐 아니라 이승만이 만든 외교 문건을 검토해주고, 그의 편지를 미 국무장관 및 소련 대표단에 전달해주기도 하죠. 이 같은 미국의 변화는 앞서 말한 미일 대립 구도가 본격화된 데 따른 전략적 판단에 따른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결국 이승만과 임정은 만주 거주 한인들의 피해를 호소하고 일본의 침략을 규탄하는 성명서를 1933년 2월 22일 국제연맹 특별회의에서 공식 회람시키는 데 성공합니다. 1931년 만주사변이 국제사회에 한국 독립 문제를 이슈화할 수 있는 기회가 된 셈입니다. (6.25 전쟁 전후 이승만의 행적은 다음 편에서 다룹니다)


“모든 해답은 역사 속에 있다.“ 초 단위로 넘치는 온라인 뉴스 속에서 하나의 흐름을 잡기가 갈수록 어려워집니다. 역사를 깊이 들여다보면 연이은 뉴스들 사이에서 하나의 맥락이 보일 수 있습니다. 문화재, 학술 담당으로 역사 분야를 여러 해 취재한 기자가 역사적 사실들을 통해 뉴스를 분석하고, 미래에 대한 인사이트를 찾아보고자 합니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