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진 한국외국어대 그리스·불가리아학과 교수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예술품은 지난 2000년간 수집가들의 관심을 끌어왔다. 가장 먼저 수집에 열을 올렸던 이들은 그리스를 점령한 로마의 장군이나 그리스 문화를 향유한 로마의 황제와 귀족들이었다. 이탈리아에서는 대리석의 채석이 기원후에나 이루어지면서, 그리스에서 난 희고 반투명에 가까운 양질의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그리스의 조각상은 로마인들의 전리품으로 인기가 높았다. 기원전 86년에 아테네를 약탈한 로마의 장수 술라는 조각상, 신전의 기둥, 무덤 비석 등을 배에 실어서 로마로 가져갔다. 무리하게 배로 전리품을 옮겨 담다가 그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피레우스 항구에 배가 침몰하는 일도 있었다. 선적이 잘되더라도 항해 중에 풍랑을 만나거나 암초에 좌초되어 배가 침몰하는 일도 잦았다.
우여곡절 끝에 로마에 도달한 그리스의 예술품은 로마의 황제와 귀족이 수집해 그들의 저택을 꾸미는 데 사용되었다. 로마인들이 그리스의 예술품만 수집한 것은 아니었다. 로마인들은 소아시아와 이집트, 지중해 전역을 장악하면서 이국적인 물건이나 지역의 특산물을 수집하기도 했다. 지중해의 특정 지역을 대표하는 물건들을 집에 둠으로써 방문객에게 자신의 경제력을 드러내고 사회·정치적 권력을 과시할 수 있었다.
그리스에서 가져오는 예술품이 부족한 경우에는 시장의 수요에 맞춰 복제가 이루어졌다. 복제를 담당한 이들은 대리석을 잘 다루는 그리스 출신의 조각가들이었다. 대형 청동 원본은 비슷한 크기의 대리석상으로 복제되기도 했고, 크기와 재료를 바꾸어 토우나 벽화, 모자이크 등에 재해석되기도 했다. 복제라고는 하지만, 조각가의 실력과 안목에 따라 결과물의 예술적 완성도는 천차만별이었다. 이렇게 그리스를 떠나서 로마에 도착한 원본 청동 조각상은 녹여서 재사용되어 사라지는 경우가 많았다. 폴리클레이토스의 ‘창을 든 남성’이나 미론의 ‘원반 던지는 사람’과 같은 작품은 복제본들만이 전 세계 박물관 곳곳에 전시되고 있다. 이러한 연유에서 박물관 그리스 조각상의 안내문에서 ‘로마 복제본(Roman Copy)’이라는 문구를 어렵지 않게 만나게 되는 것이다.
헬레니즘 시대 걸작 ‘라오콘 군상’을 복제한 두상(왼쪽 사진). 두 아들의 죽음을 눈앞에 둔 아버지 라오콘의 슬픔, 고통이 절제된 표정 속에 생생히 담겼다. ‘팍스로마나’의 마지막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초상에서는 황제가 아닌 인간으로서의 외로움과 처연함이 느껴진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명상록’의 저자이자 평화의 시대로 일컫는 ‘팍스로마나’ 시대의 마지막 황제로 알려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재위 161∼180년)의 초상도 발길을 멈추게 한다. 초연하게 허공을 응시하는 눈동자에서 철학자로서의 깊은 사색의 눈빛과 동시에 광활한 제국의 통치자가 느끼는 책임과 피로감이 함께 느껴진다. 황제의 자리를 그의 아들 콤모두스(재위 177∼192년)에게 넘겼지만, 그는 아버지와 달리 과대망상적 증상과 독재적 행위로 인하여 암살되고 사후에도 그에 관한 기억을 삭제하는 ‘기록말살형(Damnatio memoriae)’에 처해진다. 콤모두스의 비극은 아우렐리우스 사후에 벌어진 일이지만, 아우렐리우스의 초상은 미덥지 못한 아들의 운명을 마음 한쪽에 예견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직접 북방 이민족을 정벌하고 영토를 확장하는 등 장수로서도 뛰어난 업적을 남겼는데, 초상 조각에서 보이는 처연한 눈빛은 강력한 황제의 위상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전시장에서 볼 수 있는 군인 황제의 초상에서 보이는 강인한 인상과는 대조적이다. 오히려 세상을 호령하고 최고의 명성을 얻은 황제라도 인간으로서 느끼는 한계와 외로움이 공감된다.
아테네의 화가이자 도공이었던 소타데스의 작품. 페르시아의 전통적인 각배(짐승의 뿔로 만든 술잔)에 동물 형상과 신화를 그려 넣어 그리스식으로 각색했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