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자독식 속 책임 실종, 정치적 득실만 정치가 결과적으로 키운 관료 복지부동
길진균 논설위원
“결과적으로 국민께 피해를 끼쳐 송구스럽습니다.”
정치인들이 자주 쓰는 사과의 표현이다. ‘결과적’이라는 단서를 붙였다는 점에서 좋은 사과의 예시라고 할 순 없다. 면피성 의미가 엿보이지만 사과의 뜻이 분명하다면 크게 문제 삼지 않는다. 그래도 국민의 질타를 인정했다는 뜻이고, 나아가 자리에 연연하지 않겠다는 책임의 의미까지 내포한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즘 우리 정치에선 ‘결과적 책임’이라는 말 조차도 잊혀진 듯하다.
결과적 책임을 외면하는 모습은 야권에서도 볼 수 있다. 이재명 대표는 대선 패배에 이어 총괄선대위원장을 맡은 지방선거까지 참패하고도 다시 전당대회에 출마해 당권을 쥐었다. 패배한 리더는 잠시라도 현실 정치를 떠났던 과거 사례와는 달랐다. 결과적 책임에 대해 측근들은 “책임감을 갖고 더 충실히 일하겠다”는 엉뚱한 해명을 내놨다.
‘결과적 책임’이 보여주는 정치의 책임성, 반응성의 구현 여부는 민주주의의 수준을 가르는 핵심 내용들이다. 이제 여의도에선 잘못이 비교적 명확한 문제까지 한사코 부정하는 ‘몰염치’의 언행이 만연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정치의 퇴보다.
위기의 근원은 어디일까. 30년 넘게 누적돼 온 승자독식 구조 탓이 크다. 한 표라도 더 얻는 후보 또는 정당이 권력을 독점하는 현실 속에서 가장 큰 명제는 ‘승리’다. 표의 득실을 따져볼 때 정치윤리적으로 잘못을 인정하고 책임지기보다는 상대를 문제를 야기한 거악(巨惡)으로 몰고 이를 통해 지지층을 결집하는 것이 더 남는 장사라는 계산이다. 한 중진 의원은 “예전엔 무엇이 옳고 그른가에 대한 절대적인 선이 있었다. 지금은 다른 목소리를 내면 ‘전쟁 중에 적을 돕는 배신자’ 취급을 받는다”고 했다.
총선을 8개월 앞둔 여야는 격렬한 전쟁을 벌이고 있다. 한국토지주택공사(LH) 부실 건축물, 교권 침해, 시민사회와 노동계의 난맥상 등 사회의 주요 사안이 모두 정쟁의 장이다. 반목과 책임 떠넘기기가 정치의 ABC가 됐다. 국제적 망신을 산 세계잼버리대회까지도 ‘내 책임’에 대해선 입을 꾹 닫고, ‘다른 누구의 책임이 더 큰지’만 따지는 정쟁이 됐다.
여야의 극단적 대립 구조가 낳은 책임지지 않는 정치가 결과적으로 관료 시스템까지 훼손하고 있다. 누구도 “내 탓이오”를 말하지 않는 실패한 정치가 민폐를 쌓고 있다.
길진균 논설위원 le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