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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1945년 韓美, 하나의 군단 됐다”… ‘항일 독수리작전’ 미군 회고록

입력 | 2023-08-15 03:00:00

[광복절 78주년]
정보요원 키워 한반도 침투 계획
광복군과 작전 이끈 사전트 대위, 레터용지 10쪽 분량 회고록 남겨
78주년 광복절 맞아 최초 공개



한국광복군과 미군 전략사무국(OSS) 교관들이 독수리작전 종료 사흘 뒤인 1945년 9월 30일 함께했다. 사진 위 ‘첫 번째 한미동맹을 기념하며, 1945년 시안에서(Commemorating First Korean and American Alliance Hsian 1945)’라는 영문과 “우리 두 나라의 힘 있는 합작이 실현되는 날, 이 사진의 역사적 가치를 볼 수 있을 것이다”라는 문구는 독수리작전이 최초의 한미동맹임을 보여준다. 오른쪽 사진은 클라이드 사전트 대위가 1980년 남긴 독수리작전 회고록 첫 번째 장. 독립기념관 제공


“이범석(한국광복군 제2지대장)과 내가 공동의 목표를 위해 조성한 평등, 존중, 협동의 분위기 속에서 뛰어난 정신을 지닌 하나의 군단이 힘을 얻었다.”

태평양전쟁 말인 1945년, 한국광복군과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전신인 전략사무국(OSS)이 공동 추진했던 ‘독수리작전’의 미국 측 책임자 클라이드 사전트 대위(1909∼1981)는 당시 대원들의 훈련 분위기를 회고록에서 이같이 밝혔다. 독수리작전은 한국광복군과 OSS가 합작해 한국 청년을 대일전 정보요원으로 양성한 뒤 한반도에 침투시키려 한 계획이다. 사전트 대위는 당시 한국인 청년들과 미군이 일제에 맞서기 위해 하나가 돼 합력(合力)했다고 봤다.

사전트 대위가 남긴 회고록과 관련 자료를 최근 확보한 독립기념관은 78주년 광복절을 앞두고 이를 14일 동아일보에 공개했다. 미국 메인주에 사는 사전트 대위의 아들 로버트 사전트 씨가 소장한 기록물들로 연구를 위해 일부 공유됐을 뿐 일반에 공개되는 것은 처음이다. 회고록은 독수리작전에 참여한 미군 관계자가 공식 문서 외 따로 남긴 유일한 현존 기록으로 평가된다. 김도형 전 독립기념관 수석연구위원이 자료를 번역 분석했다.

회고록에 따르면 한미 양국 군인들은 숙식과 훈련을 위해 중국 시안(西安)의 버려진 사당을 손수 고쳐 쓰는 등 훈련 준비에도 함께 힘을 모았다. 사전트 대위는 “생존과 조정을 위한 합리적인 것(결과)을 만들기 위해 수많은 도전에 직면했다”면서도 “거대한 개축과 재건, 건축에 (함께) 힘을 쏟았고, 전후 중국을 떠날 때 미국인, 중국인, 한국인들이 자랑스럽게 떠날 수 있었다”고 했다.

사전트 대위는 세상을 뜨기 한 해 전인 1980년 3월 7일 독수리작전을 회고하며 레터(Letter) 용지 10쪽 분량의 타자본으로 이 회고록을 완성했다.

학계에서는 이 회고록이 최초의 한미 동맹을 보여주는 핵심 문서라는 평가가 나온다. 김 연구위원은 “회고록은 한국과 미국 정부를 대표하는 군사기관이 펼쳤던 최초의 공동 군사작전을 입증하는 귀중한 기록으로 역사적 의의가 매우 크다”고 강조했다.





독수리작전
1945년 미국 전략사무국(OSS)이 한국광복군과 합작해 중국에서 활동하는 한국인을 대일전 정보요원으로 양성한 군사계획이다. 중국 시안에 있는 한국광복군 제2지대가 훈련에 참여했다. 1945년 8월 4일 1기 훈련 과정이 끝나고 ‘공작반’ 편성 뒤 한반도 침투 작전이 추진됐으나 일본의 항복으로 실행되지 않았다.

“2차대전때 독수리작전, ‘최초의 한미동맹’으로 재평가해야”


사전트 대위 회고록 ‘한미공조 관점에서 본 작전’ 첫 공개
작전 기획부터 해산까지 기록
독수리작전, 미완으로 끝났지만…

1945년 중국 시안에서 독수리작전의 일환으로 무선 교신 훈련을 받고 있는 한국광복군 제2지대 대원들. 독립기념관 제공

‘제2차 세계대전 시기 한미 공조활동의 관점에서 본 독수리작전(Note on an aspect of U.S.-Korean collaborative activities during World War Ⅱ: The Eagle Project).’

OSS 중국전구(戰區) 비밀첩보과 소속으로 독수리작전의 미국 측 책임자였던 클라이드 사전트 대위가 쓴 회고록 제목이다. 회고록에는 △독수리작전 기획 △훈련 △광복 후 일본 전쟁포로수용소 내 미군 구출을 위한 서울 작전 등 시작부터 해산까지의 과정이 담겼다.

● “대(對)일본 정보작전에 한인 청년 활용”

사전트 대위와 한국광복군의 첫 만남은 1945년 1월이었다. 이범석 한국광복군 제2지대장(1900∼1972·대한민국 초대 국무총리 겸 국방부 장관)은 OSS 내 중국 정보 분석가였던 사전트 대위 등 중국에서 활동하던 OSS 장교들에게 군사합작을 제안했다. 일본군에 강제 동원됐다가 중국에서 탈주한 조선 청년 수백 명을 훈련시켜 연합군의 대일전에 참여시키자는 제안이었다. 그해 1월 31일 사전트 대위는 일본군으로 중국 전선에 배치됐다가 탈출한 조선인 청년들을 중국 충칭(重慶)에서 만났다. 사전트 대위는 작전의 시작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독수리작전이 종료된 1945년 9월 27일 한국광복군과 미국 OSS 중국본부가 작성한 ‘독수리작전 기지반환 계약 문건’. 이범석 한국광복군 제2지대장 성명과 직인, 사전트 대위의 사인이 하단에 있다. 독립기념관 제공

“나는 이 계획(독수리작전)이 이범석이 중국 동부에 있는 한국 청년들의 존재를 내게 말했을 때 고안됐다고 기억하고 있다. 한국 청년들은 일본에 있는 학생들이 일본군에 징병됐다가 탈주해 중국 동부에서 발견된다고 했다. (나는) 한인 청년들을 일본에 대한 정보작전에 활용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사전트 대위는 ‘OSS-한국광복군 연합 작전 계획’을 수립했고, 그해 2월 24일 ‘비밀정보국의 한국 침투를 위한 독수리작전’이란 제목의 보고서를 작성했다. 미국 국립문서관리청에 소장된 이 보고서에는 요원 60명을 선발해 3개월간 첩보·통신 훈련을 거친 뒤 이들 가운데 적격 요원 45명을 선발하겠다는 훈련 계획과 함께, 이들을 한반도 5개 전략 지점(서울, 부산, 평양, 신의주, 청진)에 침투시킨다는 계획이 담겼다.

● “군사집단으로서 가장 지적인 집단”

사전트 대위는 중국에서 만난 조선 청년들에게서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고 했다. 1945년 4월 3일 사전트 대위가 OSS에 보고한 문건에는 이날 충칭에서 25km 떨어진 지역에서 그가 만나고 온 조선인 청년 37명에 대해 “군사집단으로서 내가 본 가장 지적인 집단으로, 미군 청년 장교들과 알맞게 비교될 것 같다”며 “그들 모두를 독수리작전 훈련에 참가시키는 것을 제안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한국광복군과 OSS는 제2지대 본부가 있었던 시안에 ‘한미합동지휘본부’를 설치하고, 이범석과 사전트가 양측 지휘관을 맡아 1945년 5월 21일부터 훈련을 진행했다. 사격·폭파를 비롯한 특수훈련과 첩보활동을 위한 무선교신 훈련이 3개월간 진행됐고, 1945년 8월 4일 제1기생이 훈련을 마쳐 적격 요원 50명을 선발했다. 1945년 6월 25일 1차 훈련을 마친 뒤 사전트 대위가 OSS 측에 보고한 문건에는 “기율과 사기가 훌륭하다”며 “(한국인 청년들은) 연합군 전체의 노력에 귀중한 도움이 될 것”이라고 기록돼 있다. 이범석의 지도력에 대해선 “경의를 표한다”고도 했다.

● 최초의 한미동맹, 독수리작전

OSS 중국본부는 1945년 3월 3일 독수리작전 훈련 계획을 승인했다. 4월 3일에는 김구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1876∼1949)이 계획을 승인했다. 김 주석과 OSS 최고책임자 윌리엄 도너번 소장(1883∼1959)은 1945년 8월 7일 중국 시안에서 만나 국내 침투 작전에 합의했다. 한미가 정식으로 한반도로 진입하는 공동 군사작전에 합의한 것이다. 도너번은 “오늘부터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미합중국 사이에 적 일제에 대한 공동작전이 추진된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하며 독수리작전은 미완으로 남았다. 광복 후 OSS는 일제의 수용소에 갇힌 미군 포로를 구하기 위해 서울에 사전트 대위와 독수리작전 대원을 파견했다. 사전트 대위는 “(독수리작전은) 1945년 9월 27일에 끝났다”고 기록했다.

독립기념관이 회고록과 함께 사전트 대위의 아들로부터 입수한 ‘기지 반환 공고문’은 독수리작전이 끝나던 날 작성됐다. 레터 용지 1장 분량의 문서는 ‘한국광복군 제2지대가 중국 산시성 시안에서 작전기지로 점유해 왔던 사당 두 곳의 토지와 가옥을 미국 OSS가 점유해 사용하는 구두계약을 1945년 4월 15일 체결했는데, 협정이 종결되면서 해당 토지와 가옥을 다시 한국광복군에 양도한다’는 내용이다. 양도 계약의 주체로는 “OSS에 의해 대표되는 미국 정부”가 명시돼 있다. 문서 하단에는 이범석 지대장의 한자 성명과 직인이 찍혀 있고, 증인으로 사전트 대위가 영문 서명을 남겼다. 김도형 전 독립기념관 수석연구위원은 “독수리작전과 관련된 한미 간 계약 문건은 미국 국립문서관리청에서도 지금껏 확인된 적 없다. 미국 정부와 한국 정부를 대표하는 두 군사기관이 맺은 동맹 관계를 입증하는 문건이 나온 건 처음이다”라고 했다. 그는 “일제에 맞서 한국 독립을 위해 공동의 군사계획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한미동맹 체계의 원형이 갖춰졌다고 본다”고 했다.




美 OSS “한국인들 굳건히 조국 위해 맞서 완전 독립 약속해야”

미국 국립문서관리청이 소장한 OSS 보고서 ‘한국 독립 승인과 그것이 전쟁에 미치는 효과’의 첫번째 장. 김도형 전 독립기념관 수석연구위원 제공

“일제 지배하의 한국인들은 용감하게 그리고 굳건하게 그들의 조국을 위해 고문을 받아 왔다. 그러나 희망도 없고 궁극적인 성공에 대한 확신도 없이 그들이 집단적으로 일어나기를 기대하는 것은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우리가 최소한 할 수 있는 것은 그들 개인의 희생이 헛되지 않다는 것을 확신시켜 주는 것이다.”

미국 국립문서관리청이 소장한 전략사무국(OSS) 1급 기밀 보고서 ‘한국 독립 승인과 그것이 전쟁에 미치는 효과(Recognition of Korean Independence and Its Effect on the War)’의 일부다. 태평양 전쟁 당시 작성된 5쪽 분량의 이 보고서는 “한국인들에게 전적이고 완전한 독립을 약속하면, 우리는 절대적으로 아무것도 잃을 것이 없다. 반대로 우리(미국)는 이 전쟁을 단축시킬 수 있고 귀중한 미국인의 생명을 아낄 수 있다”고 결론내렸다.

김도형 전 독립기념관 수석연구위원은 ‘Project Eagle(독수리작전)’이라는 책을 2017년 미국에서 출간한 한인 2세 로버트 김 변호사로부터 이 보고서를 입수했다. 김 전 연구위원은 “미국 정보기관이 대일전 승리를 위해 한국의 완전한 독립 보장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다는 면에서 매우 의미 있는 보고서”라고 설명했다. OSS가 ‘한국의 완전한 독립’에 우호적인 입장을 취한 배경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 및 한국광복군 요원들과의 두터운 신뢰 관계가 있었다는 분석이다.





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