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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선행학습” 초교도 안 보내고… 영유 → ‘비인가 국제학교’로

입력 | 2023-08-16 03:00:00

[학교 버리는 아이들]〈하〉 입시 루트 된 ‘비인가 국제학교’
“모든 수업 영어로 하고 선행학습”, 학부모 “입시 유리” 공교육 포기
“아이비리그 진학” 과장 광고도
교습비만 1년에 2000만원 넘어… 강남-분당-판교 등 50여곳 성행




A 양(11)은 지난해 학교를 그만두고 2년째 학원에 다닌다. 일명 ‘비인가 국제학교’다. 오전 9시부터 오후 3시까지 모여 국어 영어 수학 등 수업을 듣는다. 단, 학교와 차이점이 있다.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 과정까지 모두 영어로 진행된다. 학제도 미국식(G1∼G12)이다. 마치 ‘학교’ 같은 이 학원의 교습비는 월 150만 원 정도. A 양의 어머니는 “입학금과 교복·교재비 등을 포함하면 연간 교습비가 2000만 원 정도”라며 “일반 학교를 보내도 학원비를 감안하면 그만큼 든다”고 말했다.



● ‘더 빠른’ 영어 학습 위해 공교육 포기

최근 영유아 사교육 문제의 핵심이 ‘영유’(영어유치원)라면 초중고교로 이어진 것은 비인가 국제학교다. A 양처럼 초교를 중퇴하거나 혹은 아예 입학도 하기 전에 비인가 국제학교에 등록하는 학생이 늘고 있다. 서울 강남, 경기 성남 분당, 판교 등을 중심으로 최소 50여 곳이 운영되고 있다.

15일 동아일보가 나이스(NEIS) 학원민원서비스와 취재 등을 통해 파악한 결과 서울 강남구의 주요 비인가 국제학교들은 과목별 교습비만 등록해 놓고 학부모에게 입학금·발전기금 명목으로 500만∼700만 원을 추가로 요구했다. 이들 비인가 국제학교는 당국에 신고한 과목 외에 가르쳐서는 안 되는 과목도 가르치고 교재·급식·재료비 등을 별도로 청구한다. 학원법 위반이다. 현행 초·중등교육법과 고등교육법에 따르면 인가받지 않고 학생을 모집해 사실상 학교 형태로 운영하는 기관에 대해서는 교습 정지, 과태료 부과 등 행정처분이 가능하다.

과거엔 해외에서 살다 온 학생들이 국내 학교에 적응하지 못해 이 같은 학원을 찾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최근에는 영어 학습을 위한 사교육으로 변질됐다. 서울 강남의 한 학부모는 “영어유치원만으로는 영어 노출이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영유아 때 다져놓은 영어 실력을 유지하기 위해 보낸다”고 했다. 일반 초교에서는 초3부터 알파벳을 배운다. 이미 ‘영유’에서 영어를 선행학습한 아이들이나 학부모 입장에서는 학교의 초1, 2 과정이 ‘시간 낭비’로 비치는 것이다. ‘공교육만 포기하면 학습적으로 아이에게 더 나은 환경을 제공할 수 있다’는 인식도 일부 학부모들 사이에 퍼져 있다.



● ‘선행학습’ 광고로 학부모 끌어모아
최근에는 아예 서울 강남 유명 학원장과 손을 잡고 입학설명회를 연 비인가 국제학교들도 있다. 선행학습과 입시에서 유리하다는 점을 광고하는 것이다. 이 비인가 국제학교들은 “초1∼초3 시기에 영어, 수학을 중3 과정까지 선행학습할 수 있다”고 내세운다. 기자가 실제 한 학원에서 입학 상담을 받아봤을 때 해당 학원 관계자는 “공립학교는 초3까지 학습이 느슨하다. 우리 학원에서 영어와 수학을 다져놓고 고학년이 되면 공립초로 옮기는 학부모들이 많다”며 “우리는 싱가포르식 수학을 가르친다”고 말했다. 이 학원은 처음에 ‘영유’로 시작했다가 학부모의 수요를 반영해 최근 초3 과정까지 확장했다.

사교육 현장에서는 영어유치원을 졸업하고 비인가 국제학교에서 초등 혹은 중등, 고등과정까지 마치는 것이 일종의 ‘입시 루트’로 여겨지고 있다. 주요 대학 ‘국제학부’ 등 외국어 혹은 외국 관련 학과로 진학할 때도 이런 방식이 유리하다고 학원들은 강조한다. 입시에 필요한 과목들을 대부분 모두 가르치기 때문에 다른 추가 사교육이 필요 없다는 점도 내세운다. 강남의 한 학부모는 “자녀가 학교에 다닐 땐 학원을 몇 개씩 보내야 했다. 비인가 국제학교로 옮긴 뒤에는 학원 숫자를 많이 줄였다”고 말했다.



● ‘아이비리그 진학’ 등 과장 광고 조심

‘해외 명문대 진학’을 광고로 내세운 비인가 국제학교도 많다. 미국, 캐나다 등의 학력인증을 받아 운영되는 비인가 국제학교를 졸업하면 해당 국가의 대학에 입학 지원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교육부 인가는 받지 않았지만 미국 학력 인증 교육기관 중 하나인 서부교육위원회(WASC)의 인증을 받은 비인가 국제학교도 전국에 31곳이다. “아이비리그 학교 입학에 유리하다” 등의 광고 문구도 흔하다. 하지만 여기에는 맹점이 있다. 해외 대학에 원서를 낼 수 있다는 것뿐이지, 입학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진학에 실패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송재원 유웨이 교육연구소 유학사업팀장은 “국내 입시를 치르지 않기 위해 일부러 비인가 국제학교를 가는 경우도 늘고 있다”고 했다.

비인가 국제학교들은 원어민 강사진에 대해서는 ‘대부분 교육 전공자’, ‘70% 이상이 교원 자격이 있다’라는 식의 추상적인 정보만 공개한다. 나이스 학원민원시스템에도 학원별 원어민 강사의 학력이나 경력 등 구체적인 사항은 공개되지 않는다. 인가받은 학교는 학교 입지가 유해시설과 차단됐는지, 재난으로부터 안전한지 등 검사를 받지만 비인가 국제학교는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공교육과 현행 입시제도에 대한 불신이 이런 기형적 형태의 교육기관을 낳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서울대 입학관리본부 연구교수를 지낸 김경범 서어서문학과 교수는 "학부모의 다양한 자녀 교육 욕망을 공교육이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최훈진 기자 choigiza@donga.com
박성민 기자 m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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