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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문화 자부심, 황금나무 황금공작… 조선사절단도 감탄

입력 | 2023-08-17 03:00:00

[한시를 영화로 읊다]〈64〉예르미타시 박물관



예르미타시 박물관을 배경으로 한 영화 ‘러시아 방주’에는 조선사절단이 만난 러시아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와 가족도 등장한다. jc 인더스트리 제공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80일간의 세계일주’(1956년)에서 주인공 필리어스 포그를 따라 세계 일주를 한 하인 파스파르투처럼, 구한말 역관 김득련(1852∼1930)도 특명전권공사 민영환을 수행해 세계 일주를 했다. 조선 사절단은 아시아와 미국, 유럽을 거쳐 두 달여 만에 러시아에 도착했다.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참석하고 외교 협정을 맺기 위해서였다. 다음은 그때 쓴 시 중 한 수다.

시인은 서구 신문물에 대한 다양한 기록을 남겼고,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본 것들을 죽지사(이역 풍속을 제재로 한 한시) 형식으로 기록했다. 이 시는 1896년 4월 1일 오후 2시 예르미타시 박물관을 구경하고 쓴 것이다. 시인은 이 박물관이 본래 황제의 겨울 궁전이었기 때문에 이를 ‘온궁(溫宮)’이라 표기했다.

알렉산드르 소쿠로프 감독의 ‘러시아 방주’(2002년)도 예르미타시에 대한 영화다. 주인공인 정체불명의 유령(감독이 직접 목소리 연기를 했다)이 19세기 프랑스 외교관이자 작가였다는 또 다른 유령과 함께 예르미타시의 전시실과 홀을 돌아본다. 박물관 곳곳을 훑는 이 공간 여행은 18세기 이후 러시아 역사를 돌아보는 시간 여행이기도 하다. 표트르 대제부터 예카테리나 여제를 거쳐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역사적 인물이 등장한다. 영화는 러닝타임 전체를 한 번에 찍은 것(원 테이크)으로 유명한데, 우연하게도 시인 일행이 관람한 오후 2시 무렵 실시간으로 촬영됐다.

아관파천 직후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활로를 찾기 위해 파견된 사절단은 러시아의 낯선 문물과 제도에 큰 감명을 받았다. 박물관에서 마주한 진기한 전시품들도 놀랍긴 마찬가지였다. 시인은 특히 황금으로 된 공작과 닭 형상의 자동 시계에서 받은 감명을 특기했다. 하지만 수많은 전시품들이 무엇인지 또 어떤 가치가 있는지는 파악하지 못했다. 사절단 중 한 사람인 윤치호가 썼듯이 그들에게 주어진 시간으로는 제대로 감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윤치호일기’)

사절단은 영화에도 등장하는 니콜라이 2세를 만났다. 민영환은 고종의 밀명으로 양국 간 비밀협정을 체결하기 위해 고군분투했고, 시인은 수행하며 보고 들은 것들을 열심히 시로 읊고 일기로 남겼다.(환구음초, 환구일기)

동일한 공간을 다뤘지만 영화가 러시아 역사와 문화에 대한 자부심을 드러낸 반면, 시는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시대 서구 문명에 대한 경이로움과 열패감을 함께 보여준다.



임준철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