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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과 내일/박형준]한국에서 제2 ASML이 탄생하려면

입력 | 2023-08-18 00:00:00

세계 유일 극자외선 반도체 장비 만드는 ASML
믿을 수 있는 파트너, 탄탄한 산학연 협력 중요



박형준 산업1부장


반도체 기업의 경쟁력은 미세공정에서 판가름 난다. 삼성전자는 현재 3nm(나노미터·1nm는 10억분의 1m) 공정으로 반도체를 양산해 내고 있다. 나노미터는 반도체 회로의 선폭을 뜻하는데, 선폭이 좁을수록 같은 크기의 웨이퍼에서 더 많은 칩을 생산할 수 있다. 초미세공정을 위해선 거기에 맞는 장비도 갖춰야 한다.

네덜란드의 반도체 장비 제조기업인 ASML은 1984년에 설립됐다. 당시 반도체 공정은 400∼800나노 수준이었다. 기업들은 더 미세하게 가공하기 위해 전자선, 극자외선(EUV) 등을 연구했다. ASML은 여러 기술 중 EUV가 가장 효율적이라고 보고, 1997년 EUV 장비 연구에 뛰어들었다. 이미 1980년대 중반 일본 통신기업 NTT의 연구원이었던 기노시타 히로오(木下博雄·현 효고현립대 명예교수)가 EUV 기술을 처음 실현해 낸 것을 감안하면 ASML은 후발주자였다.

터널의 끝은 보이지 않았다. 각종 기술적 난제로 10년이 지나도록 성과를 내지 못했다. “EUV 장비는 이론적으로만 가능하다”, “개발을 포기해야 한다” 등 목소리가 나왔다.

하지만 ASML은 2010년 결국 시제품을 만들어냈다. 180t 규모에 10만 개 이상의 부품이 들어간 EUV 노광(露光) 장비를 만들어낸 것이다. 그 시제품은 고객사인 삼성전자로 보내졌다. 단점을 보완하고 개선하는 데 9년이 더 걸렸다. 삼성전자는 2019년에서야 EUV 기반 7나노 반도체 제품을 처음 양산했다. ASML이 첫 연구를 시작한 지 22년 만이었다.

현재 ASML은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EUV 노광 장비를 만들고 있다. 초미세 반도체 가공을 위해선 EUV 노광 장비를 사용해야 하기에 전 세계에서 주문이 몰리고 있다. 한 해 40∼60개밖에 생산하지 못한다. 그러다 보니 항상 수요가 공급보다 많다. ASML은 장비를 만들어 파는 소위 ‘을’이지만, 실제로는 ‘슈퍼 갑’인 셈이다.

ASML은 어떻게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었을까. ASML 홈페이지에 있는 EUV 개발 역사 자료는 ‘신뢰할 수 있는 파트너’를 강조했다. 예를 들면 독일 광학기업 자이스. EUV 노광 장비 내부엔 EUV를 지그재그로 반사시키는 여러 특수 거울이 있다. 자이스는 ASML의 요구 수준에 맞춰 반사거울을 만들었다. 그 과정에서 우주를 관찰하는 제임스웹 우주망원경에 사용되는 것보다 훨씬 높은 정밀도를 갖췄다. ASML과 자이스는 공동의 목표를 가지고 20년 이상 프로젝트를 같이 했고, 특허를 공동 출원하기도 했다. 서로에 대한 깊은 신뢰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한국의 갑을 관계 기업 문화에선 상상조차 하기 힘들다.

권석준 성균관대 교수는 저서 ‘반도체 삼국지’에서 네덜란드의 산학연 클러스트를 주목했다. ASML도 연구중심대학으로부터 긴밀한 도움을 받았다. 기초 단계부터 산업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단계에서 산학연이 유기적으로 협업했다. 이는 한국의 절반도 안 되는 국토와 3분의 1 수준 인구를 가진 네덜란드가 제조업 강국이 된 비결이기도 하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달 말 페터르 베닝크 ASML 회장(CEO)을 만나 한국 투자 확대를 당부했다. 안정적인 반도체 공급망 구축을 감안한다면 한국도 초고성능 반도체 장비 제조 역량을 보유하는 게 더 낫다. 20년 이상 연구를 지원할 수 있는 기업 환경, 믿고 협업할 수 있는 파트너, 탄탄한 산학연 협력 등 ASML 사례가 보여준 것들을 갖출 수 있느냐에 달렸다.




박형준 산업1부장 lovesong@donga.com